이틀 뒤면 엄마 생신이다. 다음달이면 내 생일도 다가온다. 엄마와 나는 서로의 얇은 지갑 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생일을 조촐하게 보낸다. 즐겁고 따뜻해야 할 생일이 상대적으로 쓸쓸한 날인 셈이다. 생일처럼 가슴 시린 날, 얇은 지갑 사정에 몸까지 움츠러들면 추위와 공허감을 술로 달래던 때가 생각난다.
때는 11월, 초겨울밤, 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길거리를 배회하는데 삿된 것이 떠올랐다. 소주가 생각난 것이다. 나만 삿된 것을 생각했나 싶을 때, 친구녀석들의 입에서 소주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번화가에 접어들자 어느새 너나 할거 없이 소주를 찾았다. 다니던 학교도, 배우고 공부하는 과목도 제 각기 달랐지만, 똑같이 춥고 배고픈 처지에 소주를 마다할 우리가 아니었다. 누가 소주를 구해올지 정해야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한 녀석이 총대를 맸다. 친구녀석은 동네마트로 들어가 능숙하고 태연하게 소주를 사왔다. 길거리 민짜의 짬바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능숙한 친구녀석 덕분에 각자의 손에는 소주병이 담긴 비닐봉투가 들렸다. 술을 챙겨 인적드문 골목을 찾는 와중에도 술 마실 생각에 신난 친구녀석의 웃음소리와 봉투안에서 술병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짜랑짜랑하게 울린다. 그렇게 우리는 음침할 만큼 조용했던 골목 한켠을 시끌벅적하게 매웠고, 차갑게 식은 두손을 호호 불어가며 술병 앞에 둘러앉았다.
인적드문 골목구석에 자리잡은지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술에 취해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엎질렀다. "이 새끼 째린거 아니냐"는 친구의 말을 들은 것도 같고 "내, 집에 간다. 연락해라"는 말을 했던것도 같다. 골목구석에서 들이킨 술에 취해 인사불성 직전까지 간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꾸준하게 자취방을 향해 걸었다. 터덜터덜 자취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면, 마치 본가에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취기에 엄마와 떨어져 지내왔다는 걸 잊은 탓일까. 그동안 엄마를 그리워한 탓일까. 굳게 잠긴 현관문을 열면 걱정섞인 얼굴을 한 엄마가 "와 이래 늦노. 밥은 먹었나"하고 반겨줄 것도 같았고, 내 모습을 보고 단단히 화난 엄마가 "또 술마셨나? 술마시지 말라 했제!"하며 호통 칠 것도 같았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어 발을 내딛은 자취방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고요한 정적 속에 센서등만이 반응 할 뿐이었다. 인사불성에 다다른 몸을 끌고 센서등의 희미한 불빛을 의지해 이부자리를 찾으면, 그대로 자빠져 소곤소곤 엄마를 찾았다.
나는 공허할 때마다 삿된 것을 찾았다. 술과 담배로 내면 속의 공허를 채우려했지만, 그런걸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채워지지 않는 내면은 종종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공허한 나에게 그 누군가는 엄마였다. 춥고 배고플 때 기댈 수 있는 가족, 방황할 때 격려하고 꾸짖는 어른, 하다못해 음성과 얼굴만 떠올려도 힘이 생기는 조력자. 공허함에 방황하던 길거리 민짜에게 엄마는 비빌 언덕이었다.
아들에겐 비빌 언덕이 되어줬지만, 정작 자신이 의지할 가족은 없었다. 엄마(외할머니)는 10년전에 돌아가시고 함께 살던 남편과도 헤어져 아들 하나 남았다. 하나 남은 아들이 장성했지만, 아들은 비빌 언덕이 되어주지 않았다. 엄마는 비빌 언덕이 없는 세월 속에 억척스러워졌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직접 개척해나가는 것이라 믿었고, 남한테 손 벌리는 일을 창피하게 여기셨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돈을 빌리면 10원도 안 떼고 갚으셨다. 음식 한 조각도 허투로 버리지 않았고, 아끼고 아껴 생계를 이어나갔다. 술과 친하지 않아서 장성한 아들과도 술 한잔 기울이지 않았다. 그랬던 엄마가 어제는 약주를 드시고 귀가했다. 약주 두세잔에 긴장이 풀린 엄마는 아들에게 점잖은 어조로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요즘 같이 추울 때는 너희 외할머니가 해주던 음식이 생각나고, 외할머니 얼굴도 많이 보고싶다.“
자식 된 사람으로서, 아들로서 엄마에게 무심했다.
아들이 무심할동안 엄마도 엄마가 보고싶었다.
모진 세월을 억척스럽게 견딘 어른의 내면을 생각하면,
공허감을 달랠 짜랑짜랑한 친구의 웃음소리나 소주병 소리보다
집안을 가득 채우는 엄마의 웃음소리가 더 달갑다.
이번 생신에는 얇은 지갑을 털어서라도
엄마의 웃는 얼굴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