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서수준
MBC 기상캐스터 오요안나씨가 주변동료들의 따돌림에 괴로워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따돌림에 동참한 사람들의 논리가 어찌됐든간에 오요안나씨의 별세는 여전히 우리사회에 왕따라는, 야만적인 관습이 깔려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철학자 홉스는 인간의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하며, 사회계약을 통해 야만적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문명화된 사회는 약자를 보호하고 합리적인 규범으로 갈등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반면 왕따문화는 비합리적인 집단무지성을 상징한다. 우리사회 곳곳에는 그런 왕따문화가 밑바탕에 전제되어 있다.
왕따를 주도한 인물의 서사와 의도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정신적 성숙이 물질적 수준에 비해 미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닐까. 왕따를 주도한 인물에 공감하는 가해자집단은 피해자의 고통을 통해 일시적 유대감을 얻지만, 이는 자기성찰의 부재와 인간성을 수단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왕따문화는 문명사회의 윤리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과 진배없다.
고대사회는 공동체의 갈등을 한 개인에게 전가해 희생시킴으로써 질서를 유지했다. 왕따문화는 그러한 원시적 메커니즘의 잔재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합리화되는 순간, 사회는 진화 대신 퇴행의 길을 걷는다.
심리학적 연구도 이와 맞닿는다. 스탠퍼드감옥실험은 권력이 부여되면 평범한 사람도 가해자로 변할 수 있음을 보였다. 왕따가해자들은 종종 평범한 시민으로 표현된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이라는 점을 보았을 때, 또한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문화라는 점을 보았을 때, 이는 우리의 공통분모가 아닐까. 한국인은 조직내 집단에 들어서면, 일단 대세를 따른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익명성과 권력구조에 포섭되어 비합리적 폭력에 동참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권력구조에 대해 비판적 사고를 접목하지 못했기에 그렇다. 양적인 차이와 형태가 다른 측면이 있지만, 우리의 왕따문화는 아렌트가 언급한 '악의 평범성'과도 맞닿아 있다.
고대 아테네는 '도편추방'을 통해 시민의 추방을 투표로 결정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어두운 측면으로, 적어도 공식적 절차를 거쳤다. 반면 현대의 왕따문화는 암묵적이고도 은밀하게 진행되는 마녀사냥, 인민재판과도 닮아 있다. SNS와 온라인에서의 익명성은 책임없는 심판을 용이하게 만들며, 피해자는 물리적·정신적 추방을 동시에 겪는다. 오요안나씨의 죽음은 인간의 본질, 정신적 성숙과 물질적 성장의 격차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첫째, 개인주의의 재정의가 필요하다. 개인을 집단의 부속물이 아닌 주체로 인정할 때, 왕따의 구조가 흔들린다. 둘째, 약자의 고통을 공적인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지적하며, 침묵하는 다수가 악에 동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들어, 비판적 사고를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교육의 근본적 전환이다. 경쟁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되 공생하는 법을 배우는 인간, 순응보다 비판적 사유를 갖는 인간을 육성하는 교육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이 전제될 때, 우리의 미개를 한꺼풀 걷어낼 수 있다.
왕따를 일상화하는 사회는 스스로를 '문명'이라 칭할 자격이 없다. 야만은 돌도끼나 맨주먹이 아니라, 타인의 존엄을 유린하는 모든행위에 내재한다. 한국사회가 정신적 성숙을 이루려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야만성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이 공생의 첫걸음이다.
끝으로 관습적인 따돌림에 살아갈 이유를 잃었던 오요안나씨가 하늘에선 마음껏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