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의 기원
지방대생이 "힘들다"는 하소연이 공감을 얻고 공공연해지면서 이를 기사화하는 언론이 많았다. 지금도 종종 볼 수 있고.
여기서 "힘들어요"라는 표현은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내지는 "원하는 회사에 취업하기 어려워요"가 주된 의미겠지만,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대외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이들의 지적수준과 입지는 "이름있는 대학에 진학 못했으니 수준낮음"으로 확정된다. 고학력자에 맹목적인 지방이라면 말 할 것도 없다. 이름없는대학출신은 여기서 열등감을 느낀다. 나 역시 그렇고.
이 열등감확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열등감이 개인의 자질이나 결함에 있다기보다 한국사회에 속한 대다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결핍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학문적으로는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 비교되며 우리의 학문을 우리스스로 평가절하해왔고, 외모적으로는 서양인 중심의 외적기준과 비교되며 우리 스스로 열등감을 쌓아왔다. 이렇듯 열등감은 한국사회에서 태어나 성장해, 자리를 잡은 이들 일상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로인한 무기력(학습의지 저하, 뒤틀린 인정욕구, 노동의지 저하 등)은 대한민국에서 사는 모두가 한번 쯤은 겪어봤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과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남탓하지마라"거나 "너 뭐돼?"가 자동으로 튀어나오니 정당한 문제제기는 그 자리를 잃어왔다(정치개혁과 사회개혁을 완수하겠다던 민주당과 민주정부의 삽질이 이들 눈에 위선으로 비치며 열등감과 울분을 부추겼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기보다 사회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동기부여와 자기계발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개인의 삶은 본인의 의지와 능력으로 형성해나가는 것이지만, 개인의 능력보다 눈치보기와 인맥, 그리고 연줄로 상부상조하는 한국인이 할말은 아닌거 같다(지방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지방유지들은 부끄러운 줄 좀 알아라).
열등감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한 질투와 시기로 전이된다. 남의 성공을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이고,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불행으로 치환하는 왜곡된 인식이 정석으로 자리잡는거다. 이는 집단따돌림, 사이버불링, 혐오 표현의 확산이라는 사회병리로 발현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환경에서 진정한 사회성과 반사회성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집단의 비합리적 요구에 순응하고, 약자를 배제하는 데 동참하며, 권력에 아부하는 이들이 오히려 '사회성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원칙을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려는 이들은 여러 음해를 거치며 '융통성 없는 사람',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힌다. 이국종 소장이 여러 의사들의 시기어린 공격을 받아왔던 것과 김장하 선생께서 빨갱이 소리를 듣는 이유역시 여기에 있다. 또한 나를 포함한 많은 청년들이 정치에 뛰어든 이유 역시 여기에 기인한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본인존재를 인정받을 때, 다시말해서 인정받으며 자기존재를 긍정할 수 있을 때, 무언가 열심히하고자하는 의지가 생긴다. 여러 피치못할 사정으로 수도권대학에 진학하지 못해서, 이미 "지적수준 볼품없음"이라 낙인찍힌 학생들이 힘든이유와 학습의지가 떨어지는 이유 역시 상당부분 여기에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증오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이 증오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왜곡되고 뒤틀린 사회구조에 대한 정당한 분노여야 한다. 비록 일상에서 유난스럽게 떠들지는 않겠지만, 우리사회에 만연한 반사회적인 사회성을 인지하고, 각자가 자신을 긍정하는 일이질투받지 않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성공은 룰이 정해진 게임에서 탑티어를 찍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게임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과 실패의 경험을 나누고, 차별의 구조를 질문하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한다. 열등감에 기반한 사회가 아닌, 존중과 연대에 기반한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