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다시
'세계'를 말해야 하는가

왼쪽이 사막에서 바늘을 찾을 때, 오른쪽은 사막의 초원화를 고민했다

by 백재민 작가

우리는 왜 거대담론 앞에서 이토록 주춤하게 되었을까?


민족, 계급, 국가, 이데올로기. 그 이름으로 설계된 거창한 서사들이 개인을 얼마나 잔인하게 짓밟아 왔는지, 새삼 열거할 필요도 없다. 1970년대 말, 여러 철학자가 "거대서사는 이미 신뢰를 잃었다"고 선언했다. 그 뒤로 지식층은 해체에 열을 올렸다. 큰 그림은 위험하다, 거시적 관점은 오만하다, 그러니 작고 세밀한 미시적 실천으로 가자. 지식인들은 그렇게 진일보처럼 보이는 한 발짝을 뗐다. 거대담론은 낡은 유물로 전락했다. 독재의 잔재로 취급받았으며, 지식인이 법관으로 있는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실 거대담론은 좌파의 태생적 무기이자, 흩어진 개인을 하나의 역사적 주체로 묶어세우는 관점이었다. 한때 좌파담론은 우주만큼이나 거대했다. 맑스주의는 인류역사가 원시공산제에서 자본주의를 거쳐 필연적으로 해방으로 나아간다는 '역사철학'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에서의 변화가 세상을 바꾼다는 명쾌한 서사는, 공장의 노동자부터 상아탑의 지식인까지 모두를 하나의 '운명'으로 묶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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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의 좌파담론은 그 거대서사를 산산조각냈다. 거대서사의 파괴력을 고발한 것까지는 좋았다. 안타까운 건 거대서사를 전면적으로 포기하는 방향으로 치달았다는 거다. 해체한다는 의도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관성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기존의 담론판도를 부수겠다는 선언은 복음처럼 널리널리 퍼졌는데, 정작 자본과 권력이라는 진짜 판은 아무런 견제 없이 잘 굴러갔다는 얘기다. 거대담론을 경계한다는 자뻑이 실은 세계를 움직이는 불평등을 은폐하는 데 복무하고 있었다. 거대서사의 폐해를 지적하기에 앞서 좌파가 몰락한 원인의 진범은 법정 밖으로 유유히 걸어나간 꼴이다.


담론의 파편화를 가속하며 좌파의 기질자체를 바꿔놓은 결정적 동력은 이른바 ‘신좌파’의 등장이었다. 1960년대 이후 서구좌파는 방향을 틀었다. 공장과 임금과 계급 대신 문화에서의 정체성과 차별을 말하기 시작했다.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구좌파가 계급 중심 사고에 머물면서 여성, 소수자와 식민지 출신을 외면했던 사실을 반성한다는 취지였다. 좌파는 오랜 기간 정체성을 강조하며 아예 기질 자체가 뒤틀렸다. 자본의 흐름을 분석하던 흐름에서 말꼬리 잡는 검열이 좌파에서 통용되는 윤리로 이동했다. 민권 중심으로 봤을 때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로 작동했다는 거다. 경제를 지우고 문화를 넣었다.


결과는 분명했다. 좌파가 대중에게서 멀어진 만큼, 대중도 좌파에게서 멀어졌다. 노동자가 듣고 싶은 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우리도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신좌파가 내놓은 건 "당신의 말 속에 가부장제의 잔재가 남았다"는 진단이었다. 월급이 깎이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도덕을 권하는 고압적인 태도가 나를 포함한 좌파진영내부에 그득하다. 장혜영 의원이 주도하던 정의당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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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좌파는 주객이 전도됐다. 정체성은 계급이라는 거대한 뿌리를 보전하기 위한 잎사귀여야 하는데, 어느새 잎사귀를 지키겠다고 뿌리를 잘라내고 있다. 지붕이 내려앉아 집이 통째로 뭉개지는 판에, 기둥에 칠할 페인트 색깔이나 고르고 있는 이 한가함을 대중은 '오만'이라 부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최종 승리라는 낙관이 세계를 덮었고, 이념 대결은 끝났다는 선언이 좌파 지식인들의 입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2008년, 규제 없는 금융 자본이 어떤 파국을 낳는지를 전 세계가 두 눈으로 봤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시작된 충격파가 지구 반대편의 공장을 멈추고 물가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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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릿출신 글쟁이. 넓은 스펙트럼을 지향하는 이단아. 평론과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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