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분단이 지워버린 독립운동가
이 연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일을 기념해서 시작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일대기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박시백 작가님의 [35년]이라는 만화책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평전, 심지어는 온라인플랫폼에 이르기까지의 캐주얼한 자료를 기반으로 뒀습니다. 문장구성이나 정교한 편집은 AI의 기술보조를 받아 작성했습니다. 법령관련 글과 마찬가지로 전문가의 글이 아니라 한 명의 시민이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따라가며 느끼고 배운 것을 기록한 글이니,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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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야구선수였다.
솔직히 나도 처음에 이 사실을 알고 좀 놀랐다.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검색하면 건국준비위원회, 좌우합작, 암살 같은 단어가 먼저 뜬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놀란다. 한국에 야구가 처음 도입되던 시기, 황성 YMCA 운동부 주장이 여운형이었다. 미국인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들여온 야구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청년 중 하나였고, 영화 [YMCA 야구단]의 모티브가 된 그 시대, 그 현장에 여운형이 있었다. 나중에 조선체육회 회장을 맡았다. 경성축구단 설립을 주도하고, 조선씨름협회 초대회장까지 역임한다. 40대 후반에는 웃통을 벗고 [현대 철봉운동법]이라는 책의 모델이 됐다. 요즘으로 치면 장관급 인사가 인스타에 운동 사진 올린 격이다. 화려한 직함을 달고 체면을 차릴 법도 한데, 철봉으로 다져진 근육을 공개한 것이다. 장례식 날, 손기정을 비롯한 체육인들이 시신을 운구하고 하관까지 맡았다. 원로 체육인들 사이에서 그는 '한국 체육의 아버지'로 불렸다.
1886년 경기도 양평 묘골에서 태어난 여운형은 소론 계열 양반가의 종손이었다. 1914년 중국 유학을 떠나기 전,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이게 말이 쉽지, 갑오개혁 이후에도 현실에서 유지되던 신분제의 잔재를 자기 손으로 끊은 것이다. 집안 재산을 통째로 날리는 일이었다. 난징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수료한 뒤 상하이로 건너간 여운형은 1918년, 윌슨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을 영어로 직접 만나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장덕수를 국내에, 이광수를 도쿄에 파견하며 3·1운동의 해외 기획을 주도했다. 크레인에게 위탁한 독립청원서와 별도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중국대표단 고문 토머스 밀라드에게도 동일한 청원서 2통을 맡겼는데, 밀라드가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서 가방을 분실해 전달되지 못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하필 가방분실이라니, 역사의 아이러니치고는 좀 허무하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알려진 이야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문화통치로 선회하면서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을 회유하려 했다. 1919년 8월, 일본 정부는 일본기독교계를 통해 여운형을 도쿄로 초청한다. 목적은 명확했다. 3·1운동의 핵심기획자를 독립운동 대열에서 이탈시켜 친일 자치주의자로 전향시키는 것.
자치주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여운형의 도쿄방문이 왜 위험한 도박이었는지가 보인다. 자치주의란 일본의 식민지배를 현실적으로 인정한 위에서, 조선인 스스로 제한적인 자치권과 참정권을 부여받자는 노선이었다. 완전독립이 아니라 독립의 '전단계'로서 실력을 양성하자는 논리였고, 3·1운동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좌절된 뒤 일정한 설득력을 얻었다. 솔직히 당시 상황에서 이 논리에 끌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독립이 코앞에 보이지 않는데 '일단 실력이라도 기르자'는 말은 나름 합리적으로 들리니까. 총독부는 이 흐름을 적극활용했다. 1921년,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 주필을 맡고 있던 이광수가 일제에 포섭된 연인 허영숙과 재회한 뒤 귀국했고, 1922년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며 자치운동론의 이론적 토대를 깔았다. 같은 시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최린도 가출옥 이후 일제에 회유되어 천도교 내에서 자치론을 주도했다. 총독부가 내건 전략은 세 갈래였다.
실력양성, 참정권획득청원, 민족성개조. 이 세 슬로건을 통해 민족주의진영의 우파를 체제 내로 흡수하고, 완전독립을 주장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및 사회주의자와 갈라놓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전략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문화통치기는 일제강점기전체를 통틀어 친일파가 가장 많이 나온 시기로 기록되어 있다. 당근이 채찍보다 효과적일 때가 있다는 걸, 일제도 알았던 셈이다.
여운형에 대한 도쿄초청은 이 자치주의 포섭공작의 정점인셈. 3·1운동의 해외기획자이자 신한청년당 당수를 자치주의쪽으로 끌어들인다면, 독립운동진영 전체에 미치는 심리적 타격은 이광수나 최린의 전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클 터였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여운형의 도쿄방문에 반대가 거셌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의 초청을 받고 간다는 것 자체가 변절로 비칠 수 있었고, 일본 측이 여운형의 방문을 자치운동의 근거로 선전할 게 뻔했다.
그런데 여운형은 갔다. 1919년 11월 18일부터 12월 1일까지, 장덕수 등 측근들과 함께 도쿄에 머물렀다.
일본 정부는 예상대로 여운형을 회유하려 들었다. 장관들이 자치를 제안하며 정치적 지위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여운형은 넘어가는 척 하며 연설에 돌입한다. 도리어 일본제국을 불과 7년 전에 침몰한 타이타닉호에 비유하며 3·1운동 진압의 만용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적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배짱이 두둑한 정도가 아니다. 자치제안을 거부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배 자체가 침몰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경고를 일본고위인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던진 것이다.
제국호텔에서 200여 명의 내외신 기자 앞에 선 자리에서도 여운형은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연설의 골자는, 타국의 보호 아래 기생적으로 생존하느니 차라리 혹독한 고난 속에서라도 자주적 삶을 택하겠다는 것이었다. 1919년 11월 28일자 마이니치신문이 이 연설을 보도했고, 만좌에서 박수갈채가 터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연설의 파장은 여운형 개인의 신상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화제가된다. 척식국장관 고가 렌조는 여운형의 기개에 감탄해 떠날 때 만세를 불러 당사자를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적국의 장관이 식민지 청년한테 만세를 불렀다. 소설에 써도 안 믿을 장면이다. 불령선인 1호 인물을 일본 땅에 불러들여 독립연설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당시 하라 다카시 내각은 '여운형 내각'이라는 조롱섞인 별명까지 얻었다. 식민지의 34세 청년하나가 제국내각중심에서 타격을 입힌 셈이다. 이 사건은 여운형의 인적네트워크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도쿄 방문기간 동안 여운형은 일본 기독교계 인사, 정·재계 인사, 재일조선인 유학생 조직과 두루 접촉했으며, 이때 형성된 관계망은 이후 도쿄를 오가며 일본 내 동향을 파악하는 정보채널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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