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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인은
잘 살게 됐는데도 가난한가

각자도생에 지친 당신에게

by 백재민 작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그런데 송파에서 세모녀는 마지막집세를 남기고 생을마감했다. 이 두사실이 같은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며칠 전,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다. 나와 같은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지인이다. 커피마시다가 지인이 불쑥 물었다. "근데 진보가 한일이 있나요? 진보가 한게 없잖습니까" 하는 화제전환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동존중이니 복지국가니 하는 가치지향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마 지인과 같은 정당에서 일하며 똑같이 이뤄놓은게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인과 나눈 대화가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에 와서 책꽂이를 뒤졌다. 정당활동하면서 읽다 말았던 책 두 권이 눈에 들어왔다. [좌파포퓰리즘을 위하여]와 [공정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복지]였다. 한 권은 왜 진보가 한 일이 없는지를 말해주고, 다른 한 권은 무엇으로 싸워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두 권을 번갈아가며 펼쳐놓고 앉았다. 지인에게 변명할 말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다.


먼저 [좌파포퓰리즘을 위하여] 이야기부터 하자.

이준석현상이 열풍이었을 때 당내에서는 세 가지 해석이 난무했고 나는 셋 다 본질을 놓쳤다고 봤다. 책은 진보가 진짜적(국민의 힘)과 싸우길 포기했고, 대신 자기들끼리 누가 더 도덕적인가를 따지는 선민의식에 빠져 대중에게 버림받았다고 진단한다. 이준석같은 우파가 바로 그 버려진 대중의 분노를 낚아채 간 것이라고 말이다. 왜 망했는지, 왜 서로싸우는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그 싸움을 통해서 같은 진보를 어떻게 설득할건데? 하는 물음에 답을 못 했다. 답은 책 안에 있었다. 내가 읽다 말았을 뿐이다.


좌파포퓰리즘의 핵심을 풀어보자면 이렇다. 비정규직의 멍에, 청년의 주거불안, 노인의 가난, 여성의 돌봄부담이 남녀노소를 가라는 의제로 각자 따로 놀면 그냥 갈라치기로 그친다. 그런데 이걸 하나의 고리로 엮으면 '우리'가 된다. 이 감각을 정치적 열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좌파포퓰리즘이다. 말이 쉽지, 그 모든 의제를 하나의 정치적열정으로 엮어낸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다. 버니샌더스나 노회찬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한국진보는 외연확장에 실패했다. 가장 뼈아픈 실패는 '우리'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을 "우리는 하나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로 묶어내는데에는 성공했는데 다수를 차지하는 서민과 노동자의 정서에 가닿는데에는 실패했다. 소수자를 '우리'로 묶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경험이 있다. 너의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는 차별 앞에 서 본 경험이 그것이다. '너는 정상이 아니다'라는 시선을 매일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울분을 가지고 있을까. 월급이 오른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욕설을 듣지 않게 되는 게 아니고, 소수자가 정규직이 된다고 해서 가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물질적 분배 이전에 '존재의 인정'이라는 차원이 따로 있다.


이 차원을 무시한 채 '먼저 계급투쟁부터, 너희들 문제는 나중에'라고 말해온 것이야말로 전통좌파가 오랫동안 범해온 잘못이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여성노동자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전체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어떤 시선을 견뎠는지, 전체사회에서 장애인이 얼마나 자주 공론장 밖으로 밀려났는지를 생각하면 쉽다. 그 '나중에'는 영원히 오지 않는 약속이었다. 그래서 소수자들은 자신의 의제를 전면에 내걸어 정치세력화에 어느정도 성공한다. 다수로부터 외면받는 대신에 말이다.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통과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공론장에서 성소수자와 장애인이 가시화되는 데에는 진전이 있었다. 페미니즘담론도 일터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남성직원이 여성동료와 거리를 두는 룰펜스논쟁이 일었고 여러 갈등 중에 있지만, 정체성을 전면에 내건 정치적 결집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문제는 그 일정부분의 성공이 다른 영역의 실패와 맞물렸다는 데 있다. 한쪽의 인정투쟁이 다수의 정서와 어떻게 만나는지를 설명하는 작업을 진보는 본격적으로 하지 않았다. 했더라도 그 정서가 취향에 맞지 않다며 외면했다. 따라서 진보 바깥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과 무관해 보였던 셈이다. 막일판에서 일끝나고 함께 담배피우던 형님과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와 비정규직 이대남을 하나로 엮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진단이다.

20210125503464.jpg 장혜영 전 의원

그래서 진보가 구체적인 먹을거리를 약속하지 못했다는 말에 동의한다. "노동존중사회"라는 슬로건을 막일판 형님에게 들이밀면 "노동대신 기업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가 튀어나온다. 거기다 신좌파가 내건 "차별없는 세상"이라는 구호가 대두하며 먹거리 의제를 덮었다. 리어카 끄는 할머니는 대기업의 이익이 본인 이익과도 결부된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 기초연금이 얼마냐"는 것이 중요하다기 보다, 대기업의 번창이 본인의 자부심이자, 삶의 이유인 사람들이다.


[공정사회를 만드는 새로운복지]라는 책은 이러한 국민정서를 캐치했다. 책은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복지모델을 제시하고 있는데 저부담-저복지의 한국현실을 진단하고, 의료·돌봄·주거·일자리라는 네가지 영역에서 구체적인 정책방향을 그린다. 일정부분의 복지수요, 생산물의 남은 부분, 잉여분의 형평성 있는 분배, 호혜적 기여가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하다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반론과 정면으로 부딪힌다. "한국이 못사는 나라냐?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는데 왜 복지타령이냐?" 같은 반론은 생각보다 뿌리깊어서, 상당한 저항을 자아낸다. 실제로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다. 거리에 나가면 카페가 넘쳐나고, 해외여행은 일상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가정에 에어컨이 있다. 이런 환경에서 "복지를 확대하자"는 주장은, 솔직히 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 인식이 한국에서 복지의제가 환영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많은 한국인이 실제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스스로를 '자기 힘으로 먹고사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 자기규정이 복지를 '나의 권리'로 인식하지 못하게 막는다. 내 세금이 나한테 돌아오는 게 아니라 일 안하는 누군가에게 퍼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식의 밑바닥을 긁어보면 다른 풍경이 나온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라는 평균 뒤에는 극심한 양극화가 숨어 있다. 소득 상위 10%가 전체소득의 46.5%를 가져간다. 노인빈곤율은 38.9%로 OECD 최고수준이다. "평균적으로 잘산다"는 말과 "다수가 안전하다"는 말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불로소득으로 삶의 여유가 있든, 노동소득으로 쪼들리며 버티든 누구나 열심히 산다는 가정하에 재벌같은 부류가 기업이익을 두고 중소기업의 기술을 채갈 때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뇌출혈로 쓰러져도 방치하는 선택을 해야한다(강도영), 어떤 모녀는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책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한국사회의 양극화문제는 그 소득이 실패해도 다시일어설 수 있는 안전망으로 전환되지 않는 데 있다. 세금은 적게 내고 복지도 적게 받는 저부담-저복지 구도라는 것이다. 돈이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없다가도 있는 것이라는 말이 이해를 돕고 있다. 불로소득, 자산이 있는 동안에는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에어컨도 있고, 카페도 가고, 해외여행도 간다. 그런데 한순간에 망한다. 망하면 아래에 아무것도 없다. 실직, 질병, 사고, 가족해체가 기본수순이다. 어느 한 곳만 무너져도 위태롭다. 생존자체를 위협받는다. 장사잘되는 사장은 말하겠지. "능력이 부족해서, 성실하지 못해서 망한 거다. 더 노력해야지"라고.

사진출처 : 연합뉴스

우리가 번 돈이 오로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일군 것인가? 우리가 이용하는 도로, 전기, 교육시스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망했을 때 우리를 대신해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는 시스템이 있기에 3만달러시대가 가능했다.완벽하게 스스로 일어선 개인은 없다. 다만 운 좋게 시스템의 혜택을 먼저 누린 개인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식 복지국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국가의 사례를 자주 인용했다. 그럼에도 스웨덴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다는 걸 안다. 역사도 다르고 산업구조도 다르다. 스웨덴 사민당은 40년 동안 상식을 천천히 바꾸며 복지국가를 건설했고, 노동조합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위에 정당이 세워진 아래에서 형성됐다. 한국은 그런 축적이 없다. 노조조직률 10%, 그마저도 어용노조거나, 국민의 힘을 지지한다. 보편복지에 대한 합의 부재도 한 몫한다, "복지 = 퍼주기"라는 뿌리 깊은 인식이 만연하다. 이 조건에서 복지를 말하려면 한국의 현실에 맞는 경로가 필요하다.

최근 스웨덴사민당 중심의 스웨덴 엘리트계층은 왕족, 귀족, 사업가 집단으로 고착됐다. 능력이 있어도 계층이동에 대한 희망이 좌절됐다. 야심있는 젊은 층은 스웨덴에서 이탈해 미국과 영국으로 이주중이다. 당연 이같은 핵심인재 유출이 스웨덴의 미래에 좋은 영향을 끼칠리 없다. 전혀다른 이유로 미래기술투자가 좌절되고 중국으로 인재가 유출했던 우리 역시 암울했지 않았나. 그 전혀다른 이유가 복지제도를 무슨 절대악으로 규정하던 대통령의 머리속에서 나온 발상이란 점을 들면 논리적비약이긴하나, 수준차이, 이해를 돕는다.

KakaoTalk_20251205_190125031.jpg 북유럽국가 네 나라의 국기

[공정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복지]가 제시하는 경로는, '공정'이라는 의제로 한국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를 복지와 연결시키려한다. 이 접근이 영리하다고 느꼈다. 한국에서 복지를 말할 때 가장 큰 벽은 "왜 내 세금으로 남을 도와야 하느냐"는 조세저항인데, '공정'으로 프레이밍하면 달라진다. "출발선이 다른 경주에서 같은 규칙만 적용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가?"라는 것이다 강남학생과 지방학생이 같은 수능을 보는 것이 절차적으로는 공정하지만, 한 명은 초등학교 때부터 명문대 출신 과외를 받았고 한 명은 독학했다.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는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평에 가깝게 만드는 작업이다. 농어촌 출신의 학생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일과 학종전형이 대표적인 예다. 행정적으로, 제도적으로는 대학입시에 한해서 수평구조형성에 최선을 다한 일인지는 모르나, 이전에도 언급했다시피, 학종전형이나, 농어촌출신 학생우대에 대한 입시제도에도 빈틈이 많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이 근무중이고, 방과후에 알바해야되는 학생과 유복하게 태어나 부모님이 알아준 봉사활동처에서 경험을 쌓는 학생간의 차이가 능력의 차이로 설명될수는 없지않나. 그런이유로 상위층 자녀의 sky대학을 포함한 인서울대 진학비중이 70%를 웃돌정도로 압도적이다. 이미 계급, 신분이 공고해지는 과정중에 있다는 의미다.

차례로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로

장면을 전환해보자. 새벽 5시, 인력사무소 앞에 막일꾼들이 줄을 선다. 일감이 있으면 17만 원 중 수수료로 몇퍼센트 떼이고 10~16만 원을 받는다. 일감이 없으면 빈손으로 돌아간다. 기본소득이 있다면 일감이 없어도 당장 공과금을 낼 수 있다. 기본적인 생활수준이 유지된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바닥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중간업체가 수수료를 뗀 일당을 받으면서 "감사합니다"하고 고개를 숙여야 했던 위계구조에서, 바닥이라도 있으면 자아존중감이라도 생긴다. 중간업체 관계자 눈밖에 날까봐 수수료를 떼이면서도 고개를 숙이는 것과, 선택지가 있는 상태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과도한 압력에 위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인 즉슨 최소한의 생활보장이 있어야 부당한 갑질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진짜 자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22세 청년 강도영은 아버지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비극을 맞았다.


의료가 시민의 권리로 보장됐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서울관악구 반지하에서 폭우에 잠겨 숨진 40대 여성은 안전한 주거를 구할 수 없었다.


신청주의폐지가 기반이됐다면, 복지제도를 몰라서 그런 비극을 겪을일이 없다.


이들은 게으르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한 번 발을 헛디뎠을 때 받쳐줄 밑바탕이 없었을 뿐이다.


여기서 "좋은 말이다. 근데 돈은 어디서 나오냐"는 반문이 나온다. 당연하다. 재원문제를 외면하면 모든 복지담론은 공염불이 된다. 이 반문에 답하려면 복지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뒤집어야 한다. 교육과 의료와 돌봄에 대한 공공투자는 당장의 비용처럼 미래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투자로 기능한다. 저임금에 의존하던 섬유공장이 문을 닫으면, 정부가 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서 노동자를 더 나은 일자리로 이동시켰다. 복지가 구조조정의 윤활유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정반대다. 복지지출을 줄이면 재정이 건전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5평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의 삶이 무너지면 그 불안은 골목을 타고 확대된다. 치안이 흔들리고 지역경제가 위축되고 공동체의 신뢰가 깨진다. 50평 주상복합주택의 보안시스템이 아무리 촘촘해도, 사회 자체가 흔들리면 안전하지 않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사회전체의 안전비용이다. 이 관점이 보편화되야 조세저항도 달리 보인다. 복지는 '포퓰리즘'이라며 반대하면서, 재벌과 부유층에 대한 감세는 '경제정책'이라고 포장하는 정서가 기반인 사회에서 복지제도 자리잡힐 일 없지않나. 부자감세만 막아도 복지재원은 나온다. 재원이 없는 게 아니라, 걷을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복지제도를 '공정'개념과 함께 묶어내면 한국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다. 산업화를 위해 헌신한 세대에게 기초연금을 드리는 것이 사회적 부채상환인 것도 자신의 세금으로 매꾼다고 반대하는 나라다. 잔머리좀 써서 불로소득으로 호의호식하는 사람이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산재보험을 반대한다. 자신의 노력만으로 잘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렇지않다면, 이런 조세저항은 있을 수 없다. [공정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복지]가 제목에 '공정'을 내건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복지를 도덕의 영역 어디쯤에 있는 분야가 아니라, 도로안전망 처럼, 자신의 안전과도 결부된 공정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 그래야 3만 달러 시대의 중산층에게도 "이건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감각이 전달된다.

23024146__HAN1044.jpg 사진출처 : 민중의 소리

뜬구름 같은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나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막일판 형님한테 가서 "등가연쇄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이재명정부의 기본사회라는 구상도 있고요"라고 설명하면 형님은 십중팔구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야, 그게 뭔말인데"할것이다. 맞다. 결국 그 사람들의 정서에 맞는 톤으로 제도를 설명하고 사회보장제도를 논해야된다. 아무리 좋은 이론도 사람들에게 가닿지 못하면 학술대회 발표문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학술대회 발표문을 그사람들에게 가닿게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의무이기도하다. 그런데 진보정치는 그 의무를 저버리고, 소수자담론에 갇혔다.


한국인은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북한이 일으킨 전쟁의 폐허에서 맨손으로 일어선 세대의 후손이고, 새벽 5시에 인력사무소로 향하는 형님도 결국 자기 힘으로 먹고살겠다는 의지로 그 길을 나선다.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에도 이 악물고 일해서 자식 대학 보내고, 작은 가게라도 열고, 내 집 마련하겠다는 이 집요한 의지로 한국인 살아낸다. '한국인의 의지'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유명해졌다.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면서 이 양식을 무시하거나, 저 북유럽 사람들의 정서로 사고방식을 갈아엎으라고 말한다면 아무런 호응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는 이 양식을 어떻게 복지국가의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을까. 사회안전망이 복지제도에 의존하며, 일하기를 거부하게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 인식을 전환할만한 장기적인 제도전환이 필요하다. 이재명정부가 내건 '기본사회' 구상은 이런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기본소득, 기본주거, 기본의료, 기본금융 같은 '기본시리즈'는 [공정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복지]가 제시한 기본소득·기본서비스 모델과 그 결을 같이한다. 애초에 이재명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이전에 기본소득을 공론화하며 나온 책이기에 그렇다. 핵심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밑바탕'을 금수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동수저가 가진 만큼의 안전망을 모두에게 깔겠다는 것이다. 정책 하나하나의 성패를 떠나, 복지를 '시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한국정치사에서 의미있는 지점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정착되려면 야당의 견제, 재정논쟁, 그리고 무엇보다 '복지=퍼주기'라는 뿌리깊은 인식과 싸워야 한다. 정권 한 번으로 바뀔 일이 아니다. 물론 이재명정부가 이 구상을 끝까지 밀고 갈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 앞에서 후퇴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lyj_260416_19.jpg 세월호 기억식에서 추도사하는 이재명 대통령 사진출처 : MBC

지인과 의논 할 말이 조금은 생겼다. "진보가 뭘 했냐"는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해도 "해야할 게 뭔지 이제서야 좀 알 거 같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을거 같다. 적어도 벙어리는 면했다.


남은 것은 정치의 몫이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고 믿는 5천만의 악착같은 의지를,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데 쓸 것인가,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안전망을 깔아달라. 그런 다음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개척하겠다"는 하나의 요구로 묶어낼 것인가.


한국인의 양식을 복지국가의 동력으로 전환할 정치적 전략은 무엇인가. 우리의 악착같은 생존본능을 '각자도생' 대신 '공동체'를 구축하는 설계도로 바꿀 수는 없나. 그 전략의 필요성은 악착같이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여전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느 쪽에 손을 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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