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려놓는 삶에 대하여
중학생 시절 만화가게에서 이현세 화백의 '까치의 제5계절'을 보고는 그의 팬이 됐다. '국경의 갈가마귀', '날아라 까치야', '떠돌이 까치', '까치의 유리턱' 등등 그의 만화가 나올 때마다 만화가게로 달려가 섭렵했는데, 특히 그가 그리는 스포츠 만화에 나는 매료됐다. 그때 그 레전드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등장했다. 무리한 경기로 어깨를 다쳐 선수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던 까치 오혜성이 지옥훈련을 한 후 돌아와 프로야구 시즌 전 게임 우승을 실제로 이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난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이 대사로 기억되듯 엄지와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들어있지만 '공포의 외인구단'이 밑바닥에 깔고 있는 건 성공에 대한 욕망이다. 이제 막 프로야구가 국내에서도 시작됐던 시기, 연봉 몇 억을 받는 선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공공연하던 시절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 역시 그 만화를 보며 막연한 성공에 대한 욕망을 품었던 것 같다. 비록 지금은 라면 냄새에 담배 연기 가득한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도 까치처럼...
지옥훈련은 아니지만, 나름의 지옥 같은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의 입시 경쟁을 통과하고 대학에 들어갔고 잠깐 동안의 치열하면서도 찬란했던 청춘시절이 꿈 같이 지나간 후 겨우겨우 회사에 들어갔지만, 그 회사는 1년 만에 화의신청을 했고 거의 모든 직원들이 해고되는 사태를 겪었다. 나도 해고되어 몇몇 회사를 전전하다 결국 홀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게 됐다. 노력하면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다던 믿음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훗날 지나고 보니 IMF가 그간 한껏 부풀었던 욕망과 성공의 버블을 터트린 거였다. 회사가 직원을 평생 책임져준다는 평생직장 개념은 사라졌고, 정직원 대신 계약직이 갈수록 늘어났다. 노력하면 성공한다고? 노력해 봤자 나만 갉아먹을 뿐인 것이 현실인 세상이 되어갔다. 하다못해 지옥훈련을 해도 이제 성공은 보장되기 어려웠다. 어떤 수저를 갖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심지어 그 사람의 미래까지 결정되는 사회에서 성공은 세습되는 것일 뿐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성장의 사다리가 끊긴 사회에서 이제 노력은 '노오력'이 됐다. 중학생 시절 내 마음에 불을 질렀던 까치는 점점 과거의 유물로 사라져 갔다.
2017년 방영된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이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줬다. 주인공 제혁(박해수)은 이제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둔 촉망받는 프로야구선수였지만 뜻하지 않은 추락을 맞이한다. 여동생 제희(임화영)의 집에 들어온 괴한을 뒤쫓아 가서 한 대 때린 것이 그를 사망케 하는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그는 실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어깨를 다쳐 야구선수로서의 생명도 끝장날 위기에 처한다. 밖에서는 팬들이 '노력의 아이콘'인 제혁이 이번에도 불굴의 의지로 이를 극복하고 마운드로 돌아올 것이라며 응원하는데, 이 인물은 놀랍게도 포기하고 싶다는 뜻을 드러낸다. "준호야. 나 이제 그만 노력할래. 노력하는 거 지겹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지겨워. 노력과 끈기의 상징. 힘들어서 이제 못하겠다. 나 진짜 야구만 안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1983년에 나왔던 '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뢰가 사라진 현실에서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제목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 감방생활 같아. 노력한다고 해서 삶이 달라지거나 하기 어렵지. 그러니까 무조건 노력하기보다는 '슬기롭게' 대처해야 해. 너무 힘든 노력이 자신을 괴롭히거나 질식시키려 한다면 차라리 피하는 게 나아.
실제로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방영된 후 신원호 감독과 함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토크콘서트에 진행을 맡았을 때 그가 했던 말이 그거였다. 대학생들에게 인생의 조언 같은 걸 한 마디 해달라는 나의 우문에 그는 이런 현답을 내놨다. "여러분들이 꿈을 갖는 건 좋습니다. 꿈은 좋은 거니까요. 하지만 그 미래의 꿈 때문에 현재의 당신의 삶이 질식될 것 같다면 그 꿈은 버리는 게 슬기로운 선택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행복이 미래의 성공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의 행복한 삶들이 모여 여러분의 인생이 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신원호 감독은 그 후에도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통해 또다시 '슬기로운 삶'에 대한 화두를 꺼내놓았다.
7,80년대의 한국사회는 현재의 행복보다 미래의 성공이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당장의 행복을 위해 돈을 쓰기보다는 미래의 성공을 위해 저금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유예하는 것이 당연한 한국인들의 삶이었다. 특히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희생되더라도 자식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고 그래서 저마다의 현재를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당대의 연인이나 가족 간의 사랑이야기에서 나를 희생하는 서사들이 자주 등장해 뭉클한 감동을 줬던 건 그래서였다. 하지만 까치처럼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식의 사랑은 과연 현재에도 통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건 집착이거나 혹은 부담이 될 테니 말이다. 이건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생겨난 변화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타인에 대한 희생은 결코 사랑이 아닌 집착과 부담이 되는 시대를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나이 들면서 점점 알게 되는 건, 욕망과 집착이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이고 나아가 성공 그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적당히 힘이 빠지고 그래서 과하게 들끓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으면 비로소 진짜 사랑과 행복에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국사회는 그렇게 까치의 시대를 지나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제혁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스스로 가둔 감방생활에서 벗어나는 보다 유연하고 슬기로운 선택들이 필요해졌다. 까치를 좋아했던 젊은 시절 내 머리도 오혜성처럼 빳빳하고 고집 셌던 까치머리였다. 바람이 불어도 요동조차 않을 정도의 강모였다. 하지만 나이 들면서 절로 힘이 빠지자 부드러워진 머리카락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도 이리저리 흩트러진다. 물론 빠지는 머리가 고민이긴 하지만, 머리카락을 바람에 맡기고 그 흐름을 느끼는 기분이 영 나쁘지만은 않다.
2024.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