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균형
“근데 왜 하필 저예요? 저 소송 수행하는 거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셨잖아요.”
“왜 그렇게 내가 마음에 안들어 한다고 생각하지?”
“변호사님이랑 부딪치기만 했으니까요.”
“알다시피 난 딱히 변호사 필요 없어. 이혼은 내가 제일 잘하니까.”
“그럼... 저 퇴사 못하게 하려고 이러시는 건가요?”
“근데.. 한 변은 필요해.”
“제가 왜요?”
“나랑 다르니까. 한 변은 나랑 다른 생각과 시선을 가졌어. 해결방식도 다르고. 뭐... 발란스가 필요하다고 해두자.”
- ‘굿파트너’ 중에서
젊어서 나는 손바닥이 뜨거웠다. 그게 별로였다. 뜨거운 여름날엔 손에 난로를 들고 다니는 기분이었고, 잠잘 때도 손을 배 위에 얹어 놓지 못했다. 그래서 한 여름 시원한 캔 음료를 사면 먼저 마시기 전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습관이 있었다. 마치 손에서 치이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손바닥이 시원해지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정반대로 손바닥이 차가웠다. 그래서 연애 시절 난 아내의 손을 잡고 걷는 게 좋았다. 여름에도 적당히 시원한 아내의 손은 뜨끈뜨끈한 내 손을 녹여주었다. 내가 여름이 힘든 것처럼 아내는 겨울을 힘들어했다. 차가워진 날씨에 손이 너무 시리다고 했다. 겨울이 되면 아내의 손은 내 손을 찾았다. 겨울에도 뜨끈뜨끈한 내 손을.
딸이 대학에 들어간 해 기념으로 피렌체 가족여행을 간 적이 있다. 정중앙에 있어 언제 어디서든 두오모 성당을 볼 수 있는 피렌체. 우리는 하나의 미술관 속을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으로 도시를 활보했다. 사실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그 걷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래된 옛 건물들에서 자연스레 묻어나는 시간의 지층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르네상스 시절 그 건물들은 하나씩 지어질 때마다 아마도 이 곳에 사는 이들의 피를 들끓게 할 정도로 흥분시키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러간 피렌체는 그렇게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로 우리를 기분 좋게 했다. 그 평화로움이라니.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이 여기래.” 아내가 그렇게 얘기했을 때 당시 그 영화를 보지 못했고 소설을 읽은 적도 없던 나는 왠지 그 작품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사 너무나 성향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피렌체 같은 곳에서 어떤 남녀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또다시 만남이 이어지는 곳으로 피렌체 그리고 두오모 성당만큼 좋은 장소가 없을 것만 같았다. 인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냉정한 시간이 흐르는 그 곳에서 오히려 타오르는 열정적인 인간의 사랑. 물론 그 열정은 냉정한 시간에 의해 결국은 식어갈 운명일 테지만, 그래도.
‘굿파트너’에는 베테랑 이혼 전문 변호사 차은경(장나라)과 신출내기 변호사 한유리(남지현)가 등장하는데, 이들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냉정’과 ‘열정’이라고 할만 했다. 일(이혼 변호)에 있어 똑부러지지만 지나치게 냉정하게 사건만 바라보는 차은경과, 정반대로 사건 뒤에 존재하는 사람에 대한 열정적인 마음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도 하는 한유리. 그래서 온도가 너무 다른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치지만 그럼에도 차차 서로를 맞춰나간다. 그러면서 ‘굿파트너’가 된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적당한 온도를 만들어간달까.
목욕탕에 갈 때마다 나는 냉탕과 열탕을 오가며 삶의 온도를 생각하곤 한다. 뜨거운 열탕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지만 차츰 내 몸이 그 탕의 온도와 비슷해지면서 편안해지곤 한다. 정반대로 너무 차가워 발도 밀어 넣을 수 없을 것만 같던 냉탕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얼어붙는 것 같지만 차츰 내 몸이 그 냉기에 맞춰지며 편안해진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관계들의 모양이 대부분 이 온도를 닮았다. 사로 다른 온도를 가진 이들이 만나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거나 심지어 불편하다가도 차츰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처럼.
2월이었지만 아직은 차가운 날씨였던 피렌체. 나는 차가워진 아내의 손을 잡고 도시를 걸었다. 기분 좋은 시원함이 느껴졌고 아내는 “완전 손난로네”하며 따뜻해 했다. 아주 뜨겁고 차갑던 두 사람이 만나 적당히 기분 좋은 온도를 맞춰가고 그 느낌이 좋았다. “우린 냉손과 열손 사이네?” 내 농담에 아내가 환하게 웃는 웃음이 차가운 날씨를 따뜻하게 녹이고 있었다.
2024.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