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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뉘 Apr 09. 2024

한국과 미국 사이

뉴저지 한인타운에서 밴드 연습을 하다 보면 한국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 31년 인생을 포괄하는 한국음악이 들려온다. 학창 시절 즐겨 듣던 '예감 좋은 날', 대학교 때 썸을 타던 선배가 불러 날 설레게 했던 백예린의 'Square'를 들으며 감상에 젖어든다. 밴드는 내 전의 생까지 책임진다. 84년 대학가요제에서 상을 받은 '연극이 끝난 후'와 내가 응애거리고 있을 때 나온 '슬픈 인연'을 연주한다. 처음엔 ‘이런 옛날 노래가 있었구나’ 생각하고 마는데, 우리 팀 보컬이 하는 걸 들으면 지금 노래라는 착각도 든다. 옛날노래인데도 재즈 풍으로 요즘 노래와 비슷한 느낌이 난다.


기타 연습을 하다가 한국에서 아빠는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 비디오콜을 건다. 역시나 친구가 많은 우리 아빠는 절친들과 하룻밤 새며 놀고 다 같이 맛있는 점심을 먹으러 갈 참이다. 혹시 아실런가 싶어 '연극이 끝난 후'를 한 소절 쳤더니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와 절친인 원일이 아저씨는 바로 다음 소절을 부르며 노래 이름을 맞추신다. 그 예리함에 소리를 지르니 아저씨는 무지 뿌듯해하신다. 이렇게 아저씨가 노래를 잘하고 좋아하신다는 걸 14시간 거리인 뉴저지에서 영상통화로 알아갈 줄이야. 한국에서 한 집에 같이 살 때도 몰랐던 사실이다. 딸이 자신의 친구와 친해지고 있으니 아빠는 흐뭇한 웃음을 짓는다. 미국에 있다고 해서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점을 찾지 못하는 건 아니구나, 내가 미국에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구나 생각한다.   


우리는 매주 한 번 만나는데 거의 매번 다섯 시간 넘게 함께 시간을 보낸다. 첫날 연습을 왔을 때는 다섯 시에 왔다가 새벽 열두 시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내가 언제 이렇게 사람들과 한 번에 오랜 시간을 보냈나 싶어 신기했다. '에이, 첫날이니까 그렇겠지' 생각했는데 오해였다. 모두들 일을 하는 직장인인데도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늦게까지 위스키를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르고 수다를 떨었다. 올 때마다 내가 미국에 있는지, 20대가 아닌지 의문을 던지게 하는 신기한 그룹이다. 


한국 사람들이 모여 만든 한국 문화 때문에 그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미국에 10년 산 내가 두 번째로 최근에 정착한 사람일 만큼 다들 미국에 오래 살았다. 하지만 거의 매번 한국 음식을 시켜 먹는다. 단골 배달집이 생겨서 우리가 주문을 하면 인원수까지 맞추어 만두를 서비스로 주신다. 이 그룹과 처음으로 유린기도 먹어보고 미국에서도 단골이 되면 서비스를 주는구나 알아간다. 한국 사람들 특유의 배려하는 문화도 엿본다. 단체생활을 효율적으로 만드는 문화이기도 하다. 음식이 배달 오면 밴드 연습을 안 하고 있는 친구들이 뚜껑을 열고 열 한 명의 수저와 접시까지 준비해 놓는다. 서 있는 사람이 없도록 알아서 서로를 위해 의자를 가져다 놓고, 멀리 앉은 사람에게는 중간에 앉은 사람들이 음식을 떠다 준다. 한국에 갈 때마다 사람들이 '~해야 한다, ~해야지'라고 말하며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어 말하는 게 자꾸 귀에 거슬렸다. 내가 동의한 적 없는 규칙을 강요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지금 생각하니 서로의 눈치를 보고 배려하며 행동하는 거라고 좋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곳에서는 피아노도, 기타도 모두 한국어로 배우고 한국인 친구와 한국과 똑같이 생긴 노래방도 간다. 고등학교 때처럼 그 끝은 자우림의 일탈에 맞추어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며 마무리한다. 밴드가 콘서트를 하면 한국 노래에 한국 관중들이 한국어로 음악을 흥얼거린다. 한국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여기에 살다 보면 굳이 영어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겠구나 싶다.


유학시절, 처음에는 한국 사람들을 피했다. 한국 집을 떠나 유학까지 왔는데 여기까지 와서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돈 낭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영어도 더 배우고 싶고 미국 문화를 더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졸업 후 미국이 내 삶의 터가 되고 보니, 한국 사람을 찾게 된다. 한국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함께 즐길 수 있을 때 행복한데, 어릴 때부터 키워온 내 음악 취향을 쉽게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밤에 잠들기까지 휘성 노래를 테이프로 들었다. 그때의 포근함을 연상시키는 노래를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자진해서 부를 때의 그 짜릿함을 사랑한다. 이제는 영어로도 꿈을 꾸고 잠꼬대를 하지만, 아직도 계이름 '파'는 '파'지, 'F'가 먼저 생각나지는 않는다. 어릴 때 피아노유치원을 다닐 적에는 하농을 매일 한 번 칠 때마다 공책에 그려진 사과를 색칠했다. 그렇게 각 책을 열 번씩 연습해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무의식적으로 취미를 즐길 때도 스파르타식이 익숙하다. 무엇이든지 괜찮다고 받아주던 너그러운 백인 선생님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자세가 이상하다고 피드백을 주는 한국 스타일에 더 익숙하다. 그게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익숙한 건 확실하다. 


뉴저지에서 나는 한국과 미국의 중간에 서 있다. 이전에는 이도 저도 아닌 이 상태가 애매해서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중간을 받아들인다. 남편과 친구들은 대부분 미국인이고, 그들과 있을 때 나를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다.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 그들은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을 경험하며 살아왔기에 내가 조금 이상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한국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또 그들과 사랑할 수 있는 문화가 있다. 중간에 서 있기에 각각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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