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왕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와 4대가 함께 살아요.
2012년 5월 우리 가족의 귀하고 예쁜 첫 손녀가 태어났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고 자연분만인데도 순산을 하였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던지...
병원에서 산후조리원으로 가기 위해 만났던 손녀는 하얀 얼굴과 황금색 머리카락의 예쁜 아기천사였다.
아기를 잘못 안았다고 간호원에게 야단맞으며 손녀를 안고 병원을 나오던 그때의 충만했던 마음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손녀가 태어난 후 나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나의 직장과 그 일상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 매일 아침 출근을 대중교통으로 해야 할 만큼 마음이 번거롭고 생각이 많아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버스를 타기 위해 집에서 공원길을 따라 30분을 걸으며 기도하고 묵상도 하며 후회하지 않을 결정인가 수없이 자문 자답하였다.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한 딸과 손녀를 우리 집에서 3개월 정도 지내게 하면서 딸이 산후 회복도하고 손녀의 백일잔치도 하기로 했다. 어느 날 딸아이가 "엄마 학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하고 물었다. 그 질문을 듣고 나는 딸아이에게 되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직장을 계속 다닐 계획이니?" 딸아이는 " 엄마가 도와주시면 직장을 계속 다니고 아니면 휴직하거나 퇴직해야지요."라고 말했다. 이어서 "엄마, 내가 1달 정도 엄마가 만들어준 미역국 먹고 , 아이 젖 먹이고 쉬다 보니까 나의 현재 모습이 좋은 게 아니라 약간 우울해지고 이렇게 하다가 직장도 다니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 이 들더라. 엄마, 나는 직장 다니고 사회활동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딸의 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나는 딸아이에게 걱정 말고 산후조리 끝나면 회사에 다닐 계획을 잘 세우라고 다독여 주었다.
딸아이의 산후조리 기간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명예퇴직을 결정하였다. 명예퇴직서를 제출하기 전날까지 남편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것뿐인데 손녀를 잘 돌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았고 내가 평생해오던 일을 그만두고 난 후 나의 정서적 안정과 건강이 염려가 되었던 것 같았다.
명예퇴직 후 처음의 계획은 서울에 살고 있던 딸네 가족을 우리 집 근처로 이사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가 왔다 갔다 하면서 손녀를 돌봐 주려고 했으나 남편과 의논 끝에 아이들을 우리 집으로 이사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딸을 결혼시키고 난 후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당신의 외손녀를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돌보아 주셨고, 육아 걱정 없이 직장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나도 3년 정도 친정 집의 2층에 살면서 3대가 같이 살기도 하였다. 그 덕분에 외동인 딸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외삼촌들과 살면서 가족들 간의 사랑과 유대감, 예의, 책임감등의 사회성 발달과 정서적 안정감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릴 때의 성장환경은 우리 딸의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의 안정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2012년 8월 20일 딸아이 가족이 이사오기로 하면서 딸네 세 식구와 나의 친정어머니 그리고 우리 부부 이렇게 4대가 살게 되었다. 문제는 아파트의 평면 구조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4대를 위한 공간배치를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거실의 집기와 부엌살림, 가전제품 등 내가 사용하던 묵은 살림들은 처분하고 딸네 신혼살림을 옮겨놓았다. 거실은 육아 용품으로 채워졌고 조금은 어수선하였지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생기가 넘치는 집이 되었다. 이제 우리 손녀는 왕할머니인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예쁘고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게 되었고 내 딸과 사위는 육아 걱정 없이 직장생활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직장생활 30년의 나의 인생 2막이 끝나고 이렇게 인생 3막이 실버맘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