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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바리우다 Sep 07. 2024

큰아버지네 딸, 정화

“언니, 나는 나가기가 그래. ...... 담에 보자.”


40년 만에 정화에게 같이 밥이나 먹자고 했을 때 정화는 그렇게 말했다. 정화와 카톡으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거리를 좁혔다고, 그래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정화네 집으로 찾아가는 게 더 나았을지 모른다. 정화만 귀찮게 할지 몰라 밖에서 만나려 했던 것인데, 그게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큰 아버지네 셋째 딸 정화는 나보다 한 살 어렸다. 정화는 아기였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결국, 왼쪽 다리에 마비가 와서 왼쪽 다리는 짧고 가늘었다. 그러다 보니 두 다리로 걷지 못하고 대신 힘 있는 오른 다리에 의지한 채 엉덩이를 쓸 듯이 반쯤 구부려 들썩대며 움직였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큰어머니는 정화를 업고 학교에 갔다. 정화는 학교가 끝날 때까지 자기 책상에만 꼭 붙어있었다. 고무줄놀이는커녕, 공깃돌도 오재미도 하지 않고 친구들이 노는 걸 혼자서 멀거니 바라만 본 것 같았다. 학교가 끝날 즈음 큰어머니가 다시 업고 돌아왔다. 그랬기에 정화의 친구는 없었다.


가끔 나는 학교 끝나고 정화에게 놀러 갔다. 정화는 나와 공기놀이도 하고 오재미도 했다. 집안에서 절룩거리고 돌아다니면서 나와는 잘 놀았다. 자신의 짧은 다리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팔처럼 가늘고 애잔하고 슬픈 그 무엇이었다.


큰아버지 댁은 예전에 술 공장 터라 집터가 아주 넓었다. 앞뜰에는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가 있었고 뒤 뜰 웅덩이에는 연잎이 덮여있었다. 소꿉놀이 재료가 필요하면 나는 큰 아버지네 마당에서 결명자며 쑥이며 여러 가지 재료를 뜯어다가 정화에게 주었다. 정화는 예쁘게 썰어서 밥과 반찬을 만들곤 했다. 어쩌면 나는 정화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것 같다. 


그렇게 놀다가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면, 나는 정화와 헤어졌다. 큰어머니네는 우리 집보다 흰쌀 섞인 밥과 맛있는 반찬이 있었건만, 눈치 없이 얻어먹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 정화랑 놀다가 우연히 부엌에 들어갔는데, 정애언니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멸치 볶았던 냄비의 바닥을 긁고 있는 것을 보았다. 냄비 옆에는 기름에 반들반들하게 볶아진 멸치가 찬그릇에 담겨있었다. 하아, 흰밥에 저 멸치볶음 한 숫갈만 먹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얼른 돌아 나왔다. 울그락붉으락한 얼굴로 냄비만 벅벅 긁는 정애언니가 두려웠다. 정애언니는 정화의 배다른 손위 언니였다. 그때는 정애언니가 그저 부엌데기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나는 화난 얼굴을 하던 정애언니가 싫었다.   

   

어느 설날, 친척들의 모든 제사가 끝나고 오랜만에 정화에게 놀러 갔다. 정화는 나와 달리, 예쁜 새 스웨터를 입고 기분 좋은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정화랑 소꿉놀이를 하다가 연하장이 많이 쌓여있는 걸 보았다. 정화는 큰아버지한테 온 거라며 하나씩 들춰서 그림을 보여주다가 자기가 받은 세뱃돈을 꺼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열심히 발품을 팔면서 돌아다닌 나는 십 원짜리 동전 열댓 개가 전부였는데 움직이지 못하고 집에만 있던 정화는 빳빳한 천 원짜리 지폐도 있었다. 큰아버지 댁에 왔던 손님들이 정화에게 주고 간 세뱃돈이었다. 종이돈을 세던 정화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아, 나도 정화처럼 다리를 절룩였다면 그런 돈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수줍음이 많던 정화는 큰어머니 등에 업혀서 중학교까지는 어찌어찌 다녔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시골에 없었고 읍내까지 매번 통학시키기에는 큰어머니도 힘들었는지 얼마 다니지도 못하고 정화는 자퇴하고 말았다.      

부잣집이어서 맘만 먹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딸아이를 더 공부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딸들의 공부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자의 길은 남편을 잘 만나는 데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정화는 집에서 살림하는 것 외엔 더 배우지 못했다. 그와는 달리 우리 아버지는 딸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나는 사범대학을 나오고 교사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첫 월급을 탄 기념선물을 들고 큰아버지께 인사 갔을 때, 정화는 내게 맛있는 냉커피를 타주었다. 어느새 집안 살림꾼으로 성장한 정화였지만 표정이 즐거워 보이진 않았다. 말을 하다 잘못하면 자존심만 건드릴 것 같아 얘기도 별로 못하고 돌아섰다.  

   


이제는 둘 다 나이가 들었고 사는 게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만나면 즐겁게 옛날을 회상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기엔 우리가 너무 떨어져 지낸 탓일까? 내가 그리운 만큼 정화는 내가 그립지 않은 것일까?     

아무튼, 지금도 정화는 집에만 있을 뿐 나다니는 일이 없다. 요즘 같으면 전동 휠체어에 앉아서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을텐데...... 꽃 구경조차 나서지 않는 정화가 안타깝다.     



          

**오재미(헝겊 안에 콩이나 모래를 넣고 만든 주머니, 두 개를 이용해 한 손에서 번갈아 올렸다 내렸다 하며 노래를 부르며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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