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의 자세가 좋은 엄마다.

by 미지플라워

저는 딸의 학습문제 뿐만 아니라 사생활 전반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어떤 철학과 신념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딸에게 밀착해 개입할수록 내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고, ‘다 너를 위한 것이야’라고 내 감정으로 아이를 몰아세울 엄마라는 것을 지극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에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정과 느낌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것이지, 그것에 판단과 평가, 가치가 들어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요. 엄마가 보기에 아이가 왜곡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다면, “네 생각과 감정은 그렇구나···”가 끝이어야 합니다. 그 생각에 가치와 평가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이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워집니다. 나 자신을 수용하지 못 한다는 것은 타인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지요. 나를 적절한 감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수용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의 딸아이에게서도 발견되고, 성인이 된 여러 여성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어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지요.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 내가 가장 어려운 순간, 그저 나를 알아주는 ‘엄마’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문제로 가득 차 있는 한, 내가 나의 결핍과 상처들로 사로 잡혀 있는 한, 결코 소중한 나의 사람들을 내안으로 들일 수가 없습니다. 딸들은 끝까지 믿고 끝까지 함께 견디어 주는 누군가가 엄마이기를 원합니다. 그것만 해 주면, 그다음은 스스로 충분히 일어설 수 있습니다. 홀로 선다는 것은 물리적인 독립이나 경제적 자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개인이 된다는 의미이지요. 나의 쾌락과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권력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엄마가 아이를 믿어주고 불안해하지만 않는다면, 상처를 받지 않는 아이가 아니라 상처를 잘 견뎌 내는 아이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과도한 불안은 자녀의 상태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모 자신의 내적 불안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말은 오로지 자녀만 생각하고 고민하며 지켜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아이에 대한 생각과 신념, 이유가 부모에게 너무 과도하게 차 있으면 아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각하기 어렵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좋은 부모는 곁은 충분히 내주지만 자녀에 관한 한 무능한 부모입니다. 무능하다는 말이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무능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부모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면서 아이에게 끝없이 마음을, 곁을 내주지만 ‘네 삶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라는 무능의 자세가 아이를 생동감 있게 살도록 만들 것입니다.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이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 주어야 할지를 고민할 시간에 내 눈앞에 있는 아이의 존재를 즐기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아이의 미래 걱정에 내 불안을 투여하기보다 나 자신의 삶과 나의 상태는 괜찮은지 한 번 더 묻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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