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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나라의 정원사 Jun 04. 2024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이유

<소설 경청을 읽고>

 

 매일 밤 편지를 쓰는 여자가 있다. 가벼운 인사로 시작하고, 깊은 고뇌에서 건져 올린 단어를 소심하게 하나씩 내려놓는다. 때론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면 힘주어 또박또박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무수한 단어들 속에 길을 잃고, 밤이 오면 편지를 들고 산책을 가서 폐기하는 것이 하루의 끝이다. 그런 시간이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자신의 삶에서 기대한 수많은 것들이 이렇게 무의미하게 없어졌다. 매일 반복된 반성과 회고의 기록, 그 기록마저 그녀에겐 이젠 소멸되어 아무것도 없다. 소설에서 그녀의 하루는 차분하고 고요하게 흐른다라고 묘사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돋보였던 장치는 비록 내면은 깨어지고, 가벼운 충격에도 부서졌지만, 이전처럼 굳건하게 내면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산다라는 문장에서다. ‘굳건한 내면을 되찾는 희망’ 나는 임해수가 찾은 희망이 뭘까?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이 소설은 그것에 대한 답을 향해 아주 느린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의 끝에서 그녀가 찾은 희망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방송에도 잘 나가는 심리상담사다. 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들에게 솔루션을 제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삶을 흔들만한 큰 사건이 생긴다. 방송에서 어떤 배우를 지목했는데 그 사건으로 당사자가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말이 칼이 되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상황이 되었다. 임해수의 삶은 그 사건으로 인해 일상이 온통 뒤틀려 버린다.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받고, 남편하고 이혼도 한다. 온라인에서 저격하는 댓글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도, 시위도 없는 무저항의 시간, 밤마다 소심하게 편지 쓰는 이유는 억울한 이유에서다. 자신의 기사를 퍼뜨린 기자에게, 친구에게, 죽은 사람의 부인에게. 회사 동료에게. 소설은 그것에 대한 고백과 반성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경청>은 소파에 기대어 편하게 읽는 책이 아니다. 노인의 산책길을 연상케 하는 소설이다. 노인의 걸음처럼 느리고, 생각하고, 또다시 걷게 된다. 말하자면 사유의 간격이 넓은 책이다. 그런데 읽다 보면 임해수에게 감정이입이 되고 해수의 동선을 나도 모르게 쫓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장면 장면 또 틈새는 얼마나 많은지 이 소설은 한마디로 여백이 많다. 끝없는 의미 찾기. 꼬리를 물고 물어 그 의미의 끝은 어딘지 또 임해수의 반성은 어떻게 끝이 날까?라는 의문점이 계속 들게 한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임해수에게 투영되고 서서히 동화되어 간다. 그리고 그 끝에 세이와 마주하던 책상에서 비로소 안도하는 임해수의 표정이 읽혔다. 임해수의 반성과 방황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이 소설은 수렁에 빠진 주인공이 끈질긴 자신의 집념으로 이루어낸 승리의 기록이다. 물론 혼자 이루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의 삶에 순무라는 고양이가 툭 튀어나온다. 순무는 다리를 절룩이며 보기에도 아파 보인다. 그 고양이를 위해 자신의 몸처럼 돌보고 있는 황세이라는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임해수에게 츄르를 건네주며 말한다.

 “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대요. 그래서 잘 이겨 낸 거래요.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랑은 다르다고 했어요. 진짜 똑똑하고 용감하데요.”

 황세이의 이야기는 임해수의 마음에도 와닿는다. 그때부터였을까? 임해수는 산책할 때마다 순무을 찾아간다. 하잘것없는 생명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도와줌으로써 자신도 이 지옥 같은 시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순무를 구조하는 것은 임해수 스스로의 삶을 구조하는 과정이다. 고작 편지나 쓰면서 회고하는 자신보다 잘 이겨내고 있는 순무에게, 자신을 투영시켜 응원하고 싶었을 거다.  순무는 경계심이 강했지만,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다. 세이는 경계심은 없었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임해수는 길고양이 순무의 밥을 주고 세이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이들의 조용한 관계는 그렇게 끈끈하게 이어진다. 세이는 운동장에서 목도한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 왕따 당하는 아이임이 틀림없다. 아빠와 단둘이 살고, 또래보다 덩치가 큰 아이, 피구 연습하면서 아이들이 세이를 위협하고 따돌리고 있었다. 세이는 좀처럼 구조되지 않는 순무에 대해 말한다.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포기하지 않는 거예요. “

 그때부터 임해수는 길고양이 순무를 더 집요하게 기다린다. 순무하고의 지루한 줄다리기는 임해수의 처절한 고통과 닿아있다.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지게 했던 사람들에 대한 저항, 끝이 나지 않는 절망에서의 구원. 그래서 온몸에 힘을 주고 노려 보고 있는 것이다. 세이의 말은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된다.

 ‘포기하지 않는 것’ 

 그 말이 심장에 탁 꽂히는데 저릿하고 아팠다.      

 

 임해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이 인물을 통해 마음을 열어보는 용기가 생겼다는 걸 고백한다. 순무의 구조를 통해 무엇보다 절망이 아닌 희망을 말해서 이 소설은 따뜻하고 뭉클하다. 경청은 꼭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여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경청이다. 침묵도 대화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그동안 나도 상대방의 슬픔에 너무 가벼운 무게로 말하지 않았나 싶다. 말을 고르는 데 있어 생각하지 않고 쉽게 내뱉은 것에 대해 반성한다.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다가서는 방법에 좀 더 진정성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것. 이 소설이 내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이번 소설은 제대로 내 마음속에 파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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