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네가 이러면 안 되지

by 심웅섭

조지아, 오는 길부터 만만치 않았다. 우선 멀었다. 미국도 유럽도 아닌 중간쯤이니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서 청주에서 공항버스로 인천공항에 도착, 세 시간의 대기와 일곱 시간의 비행, 재미없는 영화도 보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해도 보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밥도 먹고 잠도 잤는데 시간을 보니 겨우 세 시간이 지났다. 좁은 좌석에서 발을 이리저리 뻗으며 스트레칭도 하고 괜히 화장실 가는 척, 복도를 어정거리기도 했다. 이상하다. 열두 시간 비행도 큰 무리 없이 잘 해내곤 했는데, 겨우 일곱 시간의 비행이 지루해질 줄이야. 아무리 봐도 나이가 문제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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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 가지 즐거움은 있었다. 네 시간쯤 지나서일까, 지루해서 창의 암막을 슬그머니 올렸더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발아래로는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산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산들은 능선에서 계곡으로 작은 능선들을 마치 잎맥처럼 뻗어 내리고, 그런 산들이 다시 밀려오는 파도처럼 겹쳐진 모습이 참으로 경이로웠다. 사면의 북쪽은 눈에 덮이고 남쪽은 녹아서 마치 흑백만으로 그린 세밀화가 펼쳐진 것 같았다. 그 산맥의 끝에는 눈이 흩뿌려진 작은 집과 동네와 계단식 논이 마치 수묵 추상화처럼 비현실적인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멀리 지평선 부근과 바로 눈 아래로는 평지다. 산들은 길게 줄을 이루어 우뚝 쏟아 있던 것이다. 내가 산 하나가 아니라 산맥을 한눈에 굽어보고 있는 중이다. 마치 신이 스스로 창조한 지구를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오호라, 세상에 이런 풍경도 있구나. 어쩌면 이런 진기한 구경만으로도 10만 원쯤은 값어치를 하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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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에서 네 시간을 기다렸다. 키르키츠스탄이라는 나라의 수도인데, 물론 처음 들른 곳이다. 옛날 소련의 일부였다가 연방 붕괴 때 독립한 곳이다. 공항 청사 제법 현대적인데, 문제는 뭘 먹을 수 있는 데가 신통치 않다. 면세구역이 워낙 작고 단출해서 아내와 두 바퀴를 돌고서야 겨우 kfc매장을 찾았다. 한참을 기다려 치킨을 받아서 허기를 해결했는데 값이 싼지 비싼지도 모르고 먹었다. 화폐단위도 환율도 모르고 그저 카드가 찍히는 대로 계산했으니까.

저녁 6시 10분, 다시 비행기를 타고 트빌리시로 향했다. 그런데 옆자리에 젊은 남자가 말을 건다. 항공사에서 나눠주는 작은 파우치 가방과 그 안에 든 목베개를 꺼내며 이걸 가져가도 되냐고 묻는다. 아마 그럴 걸, 시큰둥 대답하고 영화를 보는데, 그래도 뭔가 말을 건네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한 잠자고 나서 심심하기도 해서 짧은 영어로 물어보니, 자신은 인도사람이란다. 안경점을 하는데 비즈니스로 처음 조지아를 방문하는 중이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릴 때가 되자 인스타 계정을 묻고 전화번호까지 달란다. 혹시 한국에 오면 연락하겠단다. 하도 험한 세상이긴 하나 뭐 이 정도의 정보로 피해를 입을 건 없겠지 하고 전화번호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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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정도의 에피소드면 조지아 오늘 길이 순탄했다고 봤으리라. 그런데 진짜 문제는 비행기가 착륙하고 나서다. 우선 공항 와이파이가 신통치 않았다. 아내는 아고다에 로그인해서 예약 호텔을 알아내고 나는 깔아놓은 볼트 앱에서 주소를 넣고 택시를 불러야 하는데 공항 와이파이가 자꾸 끊긴다. 작전을 바꿔서 환전을 하고 유심을 구입하기로 했다. 환율은 2.372라리/usd, 우리 돈으로 환산하니 대략 520원이다. 우선 1,000달러를 환전했다. 유심을 파는 곳이 몇 군데 열려있는데 그중 하나를 찾았다. 인터넷에서 마그티라는 통신사를 선택하라고 들어서 이걸 물었더니, 자기네는 실크넷이며 마그티와 동일하단다. 거기에 14일 사용 유심이 있었다, 마그티에는 7일 치와 한 달 치만 있어서 일주일치를 사서 쓰다가 연장해야 한다고 들었던 터였다. 14일 한꺼번에 사면 편하다 싶어서 55라리, 한화로 29,000원씩을 주고 두 개 구입해서 바꿨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유심을 교체하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삐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서 볼트 택시가 밖에 대기 중이니 그걸 타고 거기서 앱으로 결제하란다. 그것도 괜찮다 싶어서 볼트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써진 택시에 냉큼 올랐다. 기사는 자신의 스마트폰 단말기에서 미터를 꺾으며 미터 요금으로 간단다. 볼트 앱이 아닌 게 마음에 걸렸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러라고 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183라리, 그냥 180만 내란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산수에 약한 내 머리가 버벅거렸다. 대충 쳐 보니 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이다. 얼씨구나 돈을 지불했다. 기사는 무거운 가방을 혼자 두 개를 들고 호텔 프런트까지 가져다준다. 그게 고마워서 자칫하면 10라리 지폐 한 장을 팁으로 줄 뻔했다. 방에 들어와서 계산해 보니 9만 원이 넘는 거금이다. 볼트앱을 켜 보니 30라리가 채 안 되는 요금이 뜬다. 무려 여섯 배짜리 바가지를 옴팡 쓴 거다. 생각해 보니 삐끼 인건비에 가방 날라준 팁까지 혼자 다 내준 격이다. 순식간에 국제 호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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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했다. 적게 잡아도 7만 원을 버렸으니, 시골 카페에서 하루 벌까 말까 한 거금이다. 그런데 돈보다 큰 문제가 있다. 스페인 산티아고부터 시작해서 한 달 이상의 자유여행을 세 번 치른, 나름 여행 베테랑(?)이라 자신했던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겼다는 거다. 그것도 아주 깊이. 인도나 이집트, 혹은 모로코 정도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크고 작은 바가지와 사기꾼들 사이에서 덜 속고 살아남으려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을 수도 있고, 좀 작은 바가지를 써도 그렇거니 웃을 수 있다. 그런데 조지아는 좀 다르다. 유럽 문화니, 정이 많고 물가 싼 스위스니 하는 말에 잔뜩 기대가 부풀어 도착했는데, 믿고 찾은 집 대문에서 구정물을 뒤집어쓴 격이다.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다가 그 화살이 조지아로 돌아갔다.


"조지아, 네가 이러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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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좁은 호텔 발코니에서 바라본 야경은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웠다. 이 조지아를 어째야 할까, 미워해야 할까, 아니면 다시 사랑에 빠질까? 혼란스러움과 피곤함에 잠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