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과 옛 것

by 심웅섭

조지아까지 오느라 거의 24시간을 깨어 있었으니 틀림없이 여독이 몸에 쌓였으리라, 적어도 하루는 뒹굴거릴 각오로 눈을 감았는데 야속하게 잠은 달아나 버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 반, 그러나 몸은 5시간의 시차를 모르고 오전 10시 반이라고 판단했나보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는데 침대에서 나를 일어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아내가 배고프단다. 주섬주섬 일어나 식당으로 향한다.

우리 부부가 머무는 숙소는 Amante Narikala Hotel, 조지아 어머니 상과 나리칼라 요새 중간쯤 언덕 위에 있는 작은 호텔이다. 트빌리시는 강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데 양쪽 다 절벽이나 언덕위에 집들이 지어져 있다. 사람들은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터를 파 내고 집을 지어 멀리서 보면 마치 집들이 층층이 쌓여진 모습이다. 단점은 길이 몹씨 좁고 불규칙하다는 것, 가파르고 좁은 계단길이 원래 길이었던 듯 하고 지그재그로 만들어 진 찻길이 겨우겨우 집들 사이로 뻗어져 있다. 그나마 어떤 찻길은 좁고 경사가 급하거나 굴곡이 심해서 운전하기가 만만치 않겠다. 그러나 단점에는 장점이 따르는 법, 조망과 일조권 하나는 모든 집이 최고다. 이렇게 좁고 급한 찻길와 가파르고 불규칙한 계단은 묘한 탐험심과 궁금증을 유발한다. 요리조리 꺾어 오르면 새로운 모습의 집과 사람이 짠 하고 나타나는데, 쭉 뻗어 편리한 길에서는 도무지 느낄 수 없는 재미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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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진짜 재미를 주는 요소가 또 있다. 집들이 모두 낡았다는 거다. 돌과 나무를 이용했는데 기둥과 문과 발코니의 나무와 벽을 이룬 돌들이 모두 거무티티한 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 걸린 빨래줄, 아기의 낡은 옷가지들이 마치 설치미술 처럼이나 옛스럽고 그럴듯하다. 낡은 집들 사이를 걷는 일은 그 자체가 힐링이다. 낡은 것은 묘한 안도감, 편안함을 동반한다. 새롭고 편하고 번쩍거리는 것들은 궁금증과 소유욕을 주지만 휴식을 주지는 못하지만, 낡은 것은 편리함 대신 편안함을 준다. 왜 그럴까? 어쩌면 모든 것이 광속으로 변하고 그 미친 속도에서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무리에서 낙오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잠시 내려놓게 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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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세히 보면 낡은 것을 아름답게 보이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낡은 것을 아름답게 꾸민 미술적인 감각이다. 낡은 대문은 밝고 화사한 그림을 간직한 캔버스가 되었고 흉물스러울 수도 있었던 배전함과 벽에 튀어나온 전기 계량기도 알록달록 그림을 그려 마치 일부러 만들어 놓은 미술작품이 되었다. 낡아서 떨어지는 흙 벽과 검게 그을린 콘크리트 벽들이 모두 어울리는 그림들로 화장을 해서 마치 온 동네가 크고 작은 미술작품으로 보인다. 낡은 편안함과 발랄한 미술감각이 만들어내는 편하면서 상큼한 느낌은 여행자들을 불러 모았다. 거리와 골목과 계단에는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으며 행복한 표정으로 헤매고 있다. 골목길을 걷는 일이 이다지도 흥미진진, 즐거운 일이었음을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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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는 동산에 올랐다. 동상을 자세히 보려고 오른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트빌리시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날이 흐리더니, 10시가 넘으니 가을 햇살이 아낌없이 도시에 쏟아진다. 굴곡 없이 거의 평평해 보이는 산에서 절벽처럼 급한 경사를 따라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아래는 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좀 더 넓은 평지 끝에 다시 언덕과 산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용암이 분출해서 이제 막 침식이 시작된 유년기 지형이거나 석회암 지형이다. 어쨌거나 가을 햇살을 제대로 받은 강과 도시 집들이 빛나는 모습이 정겹다. 곳곳에 보이는 성당 갯수를 세는 것도 재미있다.

내려오는 길에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케이블카다. 내려가는 편도에 3.5라리, 두 명이라며 7라리를 내미니 종이 티켓 대신 하얀 플라스틱 카드를 준다. 내려가면 회수하겠구나 했는데 달라고도 않는다. 쓸데없는 자원 낭비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이건 교통카드였다. 이 카드에 돈을 충전하면 케이블카뿐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까지, 모든 대중교통에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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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에서 내리면 광장이다. 잠시 이곳에서 일광욕과 다리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과일과 주스를 파는 노점상들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길다란 쇠손잡이를 열심히 눌러대는 아주머니가 눈길을 끈다. 다가가 보니 석류를 눌러 주스를 만들어 파는 중이다. 붉은 석류를 반으로 나누어 동그랗고 오막한 홈통에 올려놓고 손잡이를 내리면, 홈통에 딱 맞는 작고 평평한 원반이 석류를 으깨어 붉은 즙이 격하게 흘러 나온다. 가만히 보니 석류 하나가 아니라 세개를 짜서 한 컵으로 만들고 있다. 이건 사야 해, 가격을 물으니 15라리, 대충 7,500원이다. 석류를 세개나 넣어서 짰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한 컵을 사서 나눠 마셨다. 상큼한 석류맛에 텁텁한 씨 맛이 살짝 섞였다. 무화과도 한 봉지 샀다. 20라리, 만원이 살짝 넘는다. 아내가 워낙 무화과를 좋아하니 사긴 했는데, 작고 덜익은 것이 섞여 있어서 꾹 참고 먹다가 몇 개는 버렸으니 실패.

오후 1시가 넘었다. 햇살은 눈부시고 공기는 상큼하다. 10월 중순이면 늦은 줄 알았드만, 적어도 트빌리시는 지금이 여행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도시에 강과 녹지가 많고 차도 그리 많지 않아서 숨쉬기도 편하다. 아직 배는 안 고프고, 이젠 뭐 할까아내에게 물으니 옆의 교회를 가잔다. 조지아의 어머니상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강 언덕의 오래된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었단다. 저곳은 어디일까, 궁금하여 구글을 검색하니 메떼히 교회, 혹은 성모승천교회라고 나온다. 12세기에 지어졌으며 조지아의 국왕 고르가살리의 동상과 함께 트빌리시의 랜드마크란다, 한 마디로 눈에 잘 띄고 사진찍기 좋은 명소란 말이다. 별 기대 없이 발길을 옮겼다. 아닌게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 끝 절벽위에서 사진을 찍기도하고 단체 관광객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따라다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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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퀴를 돌아서 교회 입구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몇몇 앉아서 쉬고 있고 검은 옷을 입은 거지 여인 두명이 불쌍한 목소리로 구걸을 하고 있다. 가끔 지나는 사람들이 동전을 넣는 걸로 봐서는 이곳이 제법 몫이 좋은 곳인듯 싶다. 현관의 돌기둥에는 격자 무늬가 촘촘히 새겨져 있다. 돌 위에 문양을 붙인 게 아니라 양각으로 조각을 했다는 거다. 자칫 힘이 들어가면 문양 일부가 깨어질테니 석공이 얼마나 살금살금 정성을 들였을 지 절로 상상이 간다. 그런데 낡은 교회 입구로 사람들이 드나든다. 문 옆에는 스카프가 쌓여있고 여자들은 모두 머리에 스카프를 둘렀다. 궁금하여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놀랐다. 우선 바깥에 비해 어둡고 넓지 않은 공간에 사람이 가득했다. 주로 할머니들이 많았지만 젊은 여자나 남자도 간혹 보였다. 벽에는 박물관에서나 볼 것 같은 성화들이 여기저기 걸려있고 예수 십자가도 보였다. 모두 적당한 어둠 속에서 묘하게 빛을 받는 위치에 걸려 있어 엄숙하고 성스러웠다. 사람들은 성화와 성물의 한 끝에 손을 대고 입을 중얼거리며 기도를 하고, 때로는 입을 맞추고 성호를 그었다. 구석에는 조용히 걸터 앉아 멍한 표정으로 쉬는 이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앞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리며 성호를 긋곤 했는데 나중에 옆으로 다가가보고 이유를 알았다. 한쪽 발은 천국에, 나머지는 이승에 디디고 있을 법한 늙고 작은 신부가 의자에 앉아 있고 웬 여인이 민망할 정도로 가까이 귀에 대고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고해성사를 하는 중이리라. 머리를 조아리던 나머지 여인들은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리라.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그 늙은 신부가 알아 듣기는 하는지, 고해성사가 과연 죄를 사하여 줄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엄숙함과 진지함, 간절함이 나를 감동시켰다. 먹먹해진 가슴으로 한참을 지켜보다가 나도 성화 하나를 향해 성호를 그었다.

흔히 종교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말한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자본주의와 ai까지 등장한 시대에 종교와 믿음이라는 단어는 유행 지난 낡은 옷이 돼버렸다. 이슬람을 제외하고는 서양이나 동양의 오래된 종교시설은 관광지로 주된 역할이 바뀌었다, 고 믿었는데 조지아는 아니었다. 이들에게 종교는 여전히 삶의 일부였으며 세상의 기준이었다. 마치 중세 어느 교회에 온 것같은 분위기에서 문득 어젯밤 가짜 볼트 기사를 떠 올렸다. 나에게 여섯배라는 엄청난 바가지를 씌우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늙은 신부의 귀에 대고 고해성사를 했을까, 내가 낸 돈의 일부라도 헌금으로 내 놓고 동전 몇 개를 걸인에게 주었을까, 그리하여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졌을까. 만일 그렇다면 교회는 올바른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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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시가 넘었다. 출출해진 아내의 배꼽시계를 따라 조지아 식당을 찾았다. 노천 테이블에 앉아서 하차푸리와 힌칼리를 시켰다. 힌칼리는 꼭지가 손잡이 처럼 생긴 조지아 식 만두인데 밀가루 껍질이 너무 두껍고 속에 든 만두소가 지나치게 짰다. 다섯개가 나왔는데 아내와 내가 두개씩 먹고 한개는 남았을 정도. 그런데 뒤이어 나온 하차푸리는 훌륭했다. 양쪽으로 꼬리가 맴씨있게 달려있는 동그란 모양인데 가운데에는 따뜻한 계란과 치즈가 촉촉하게 담겨있다. 이걸 포크로 잘 섞어서 꼬리와 몸통의 빵을 조금씩 떼어 찍어먹으면 된다. 그런데 빵이 노릇노릇 바삭바삭 잘 구어져 있다. TV에서 보면 항아리처럼 생긴 화덕 안쪽에 빵을 붙여 구어내던 데 바로 그 빵인가 싶다, 오래된 동네의 골목 노천테이블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낯선 음식, 하차푸리를 먹는다.

네시가 넘었다. 이상하다. 이 시간이면 우리 부부는 이미 피곤해져 있어야한다. 보통 10시가 넘어 숙소에서 나와서 오후 서너시면 피곤해져서 숙소로 돌아가 한 잠 자고 저녁때 다시 나오는 게 우리 부부의 해외여행 패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다. 더구나 어제 먼길을 좁은 비행기에 구겨져 여행한데다가 볼트 사기에 열받아서 잠까지 설쳤으니 틀림없이 피곤할 텐데 말이다. 아내가 전통시장을 가잔다. 약간 무리인가 싶지만 나도 아쉽던 차라서 볼트 앱으로 차를 불렀다. 삼고리 바자르까지 8.3라리 현찰결제다. 그런데 이동해보니 거리도 제법이고 퇴근길 정체인지 시간도 30분은 족히 걸렸다. 10라리를 주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20라리를 주고 싶지만 어제 가짜 볼트가 떠 올라서 그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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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과일을 사고 이번에는 아내의 제안으로 버스에 도전했다. 이렇게 낯설고 새로운 미션을 제안하는 건 원래 아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체력이 좋아졌거나 여행 근력이 커 졌다는 말이다. 버스 요금을 어찌 낼까, 나는 현찰을 주거나 교통카드를 쓸 생각이었는데 아내가 검색을 하더니 이곳 교통카드를 사야한단다. 난감해하는 나에게 아침에 케이블카에서 받은 플라스틱 카드를 찾아보란다. 이걸 꺼내어 차를 기다리는 여학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꼬불꼬불 조지아 어로 돼 있는 자판기에서 무사히 10라리를 충전했다. 버스 요금은 1라리, 단돈 500원에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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