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빌리시에서의 둘째 날, 아침 일찍 아내와 오늘의 동선을 설계했다. 우선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성삼위일체 성당, 주말 벼룩시장, 그리고 캐논 카메라 매장이다. 그 유명한 관광지 뒤에 카메라 매장이 따라붙은 이유가 있다. 출국하기 전에 짐을 꾸리는 건 아내 몫이었다. 왜 매번 나냐고 투덜대면서도 두 사람분의 옷과 세면도구와 소소한 생활용품들, 그러니까 면봉이니 치실까지도 꼼꼼히 챙겼다. 그런데 예외가 두 개 있었다. 바로 카메라와 내 노트북이다. 둘 다 한무게 하는 데다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만큼 해외여행 휴대품으로는 좀 망설여지는 아이템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눈물이 나도록 멋진 카즈베기 사진을 보고는 귀찮아도 휴대폰이 아닌 DSLR로 인생샷을 찍자는 결단을 내리고 카메라에 와이드렌즈까지 하나 더 챙겼다. 또 아내가 작은 넷북을 가지고 가지만 아내의 컴퓨터 작업을 방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내 노트북을 따로 가져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짐을 부치고 면세구역 안에서 시간을 때울까 노트북을 꺼냈는데 충전선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코드를 구겨서 넣은 기억이 있는데 이상하다 싶어 이리저리 뒤져봐도 없다. 순간, 며칠 전 코드를 넣었다가 다시 꺼낸 기억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출국이 며칠 남았으니 휴대폰 충전기로 쓰다가 마지막에 챙기자, 생각만 하고 그냥 두고 온 것이다. 아내의 핀잔이 쏟아졌다. 할 말이 없다. 이제 보름동안 무거운 노트북을 짐으로만 모시고 다녀야 한다.
그런데 하루 시내 투어를 마치고 돌아와서 더 큰 문제가 터졌다. 이번에는 캐논 카메라 충전기가 없다. 이것도 노트북과 같은 이유다. 마지막에 챙긴다고 생각하고는 배터리만 덜렁 꺼내 온 것이다. 문제는 충전기 없이는 이삼일 밖에 카메라를 쓸 수 없다는 거다. 도대체 난 왜 이럴까. 예순이 넘어 일흔을 향하는데, 아직도 덜렁대는 성격은 고쳐질 생각을 않는다. 아내는 그냥 아이폰으로 찍으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다. 노트북보다 무거운 카메라에 광각렌즈까지 짐으로 모시고 다니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더구나 쿠팡에서 찾아보니 충전기가 정품 5만 여 원, 호환품은 불과 만원 남짓이다. 조지아도 비슷할 터, 부담 없는 가격이니 하나 사기로 했다.
먼저 카메라 부품점을 검색했다. 4km 떨어진 곳에 메가픽셀이라는 카메라 매장이 검색된다. 구글에는 진열장에 빼곡한 카메라 사진과 오후 5시까지 영업 중이라는 안내가 선명하다. 볼트 택시를 불러 거금 4,500원을 들여 매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공원 한편의 전자제품 매장, 직원에게 충전기를 찾으니 바깥으로 나가서 1번 상가로 가란다. 나가보니 그곳은 작은 구멍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은 전자부품 판매점이었다. 마치 옛날 세운상가나 황학동 뒷골목처럼 별거별거를 다 파는 쪼그만 부스 말이다. 문제는 그곳이 닫혀있고 꼬불꼬불 조지아어 끝에 전화번호가 쓰여있다는 거다. 인근 상인에게 무슨 뜻인지 물으니 대충 읽어 보고는 전화하란 말이란다. 아니, 그 정도야 나도 눈치로 안다. 문제는 꼬불꼬불 조지아어의 분량으로 봐서는 뭔가 더 자세한 사연이 있다는 건데 상인은 그걸 말해주기 귀찮아하는 눈치다. 아내가 구글로 번역해 보란다. 그러나 구글은 조지아어는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 잠시 후, 지나가는 경찰에게 도움을 청했다. 들여다보던 경찰 왈,
"오늘은 어렵겠네요, 월요일에 연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다른 상인에게 물었다. 혹시 충전기를 파는 다른 매장이 있을까 해서다. 그러나 한결같이 그곳을 가리킨다.
다시 검색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좀 떨어진 곳에 캐논 판매장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구글 맵을 켜고 호기롭게 찾아갔다. 그런데 있어야 할 곳에는 엉뚱한 게 있었다. 좁은 계단들이 여러 개 지하로 나 있고 계단 아래에는 묘한 느낌을 주는 좁은 가게들이 하나씩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문을 여니 쇠창살 안에 어둑한 표정의 여직원 혼자 앉아 있다. 이건 뭘까? 나는 감이 안 잡히는데 아내의 촉이 빨랐다. 전당포란다. 오호, 전당포로구나. 어렵던 시절, 학생과 문인들이 사전이나 코트를 맡기고 돈을 빌려 술을 마셨다는 바로 그 전당포다. 그러나 내가 자란 시대, 충주에는 전당포가 없었거나 있어도 내가 갈 일이 없었으니 나에겐 평생 처음 보는 전당포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길거리에서 젊은 여자에게 구글지도를 내밀며 도움을 청했다. 여자가 고민하는 사이 마침 나타난 친구 둘까지 합세해서 토론을 하더니 내가 갔던 그 전당포 위치가 맞단다. 내가 가 봤는데 거기 없더라, 조지아에서 구글이 정확하지 않은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단호하게 부정한다. 조지아 구글은 정확하단다. 이때 다른 친구 하나가 결정적인 멘트를 날린다. 자신이 두 달 전에 그 자리의 캐논 판매장을 다녀왔다는 거다. 이 정도면 다시 가 볼 수밖에. 다시 그 자리에 간 우리 부부는 어이없는 웃음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전당포 바로 위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약간 높은 1층이 바로 카메라 판매장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코 앞에서 헤매다가 지하 계단만 내려가보고 돌아선 것이다. 어쨌거나 문을 열고 들어서 충전기를 찾았다. 있단다. 반가운 마음에 얼마냐고 물으니 159라리, 우리 돈으로 8만 원이란다. 으윽, 만 오천 원짜리 호환품을 사려다가 거금이 나가게 생겼다. 더구나 집에는 충전기가 두 개나 있는데, 교통비까지 치면 얼추 10만 원을 지출하게 됐다. 순간 자책감이 감싼다. 늘 부풀어 있던 자신감이 콩알처럼 쪼그라드는 순간이다. 마음을 다잡고 거금을 내놓았다. 다음엔 출국하기 전에 꼭 짐 체크를 하리라 다짐하면서.
주말 벼룩시장을 찾았다. Dry Bridg 부근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은 현지인뿐 아니라 관광객에게도 유명한 명소란다. 구 소련시절의 카메라와 잡다한 중고물품들이 쏟아져 나온단다. 실제로 가 보니 볼만한 골동품이 많았다. 옛날 코자크 시대에 쓰였을 법한 전투용 검, 도끼나 삽 같은 농기구들에서 전자제품과 카메라, 공예품들이 즐비하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수동 커피그라인더에 눈길이 닿았다. 큼직하고 묵직한 핸들이 달린 그라인더는 프랑스 산과 독일 산이란다. 가격은 1,000라리와 350라리. 50만 원이 넘는 돈이니 지갑에서 쉽게 꺼낼 액수는 아니다. 공원 한편에는 미술품들이 모여있다. 합판의 질감을 그대로 살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오려 붙인 소품도 눈에 띄고, 가위니 집게며 시계 등을 붙여 새를 만든 작품도 너무 재미있다. 그러나 지갑도 얇고 가져가기도 힘든 우리 부부는 이리저리 거닐며 눈요기하는 걸로 만족했다.
그런데 눈으로는 요기가 안 되는 거였다. 오후 2시가 되니 아내가 급하게 배가 고프단다. 식당을 찾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바로 옆에 있는 매점 같은 식당엘 들어갔다. 늙은 주인남자가 오래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아내로 보이는 여인은 열심히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날라다 준다. 보아하니 실력이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바이올린 덕분에 꿀보직을 받았구나 싶다.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귀에 익은 올드 팝 멜로디를 들으며 점심을 먹는다. 닭고기 요리와 버섯 구이에 버섯 수프, 거기에 커피 두 잔을 시켰다. 나중에 계산해 보니 75라리, 개별 요리 가격의 합에 10%를 붙이는데 이게 봉사료인지 부가세인지, 혹은 외국인 바가지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거의 4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우리나라보다 결코 싸지는 않구나 싶다.
성삼위일체 성당을 찾았다. 사실 이곳은 2004년에 건축되었으니 그리 오래된 성당이 아니다. 그래도 꼭 와 볼 수밖에 없는 건 워낙 유명한 데다가 트빌리시 어느 곳에서나 눈에 띄는 랜드마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숙소에서도 훤히 보이고 밤에는 경관조명이 화려해서 야경까지 훌륭하니 이걸 빼놓을 순 없다. 도착해 보니 유명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대단히 안정되고 아름다운 구도를 지니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건물이 세 개의 중첩을 이루고 있는데 이건 아마 성부 성자 성신이라는 삼위를 상징한 것일 듯싶다. 건물 외벽은 노란 대리석으로 덮여 있는데 오후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는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찬란하게 느껴진다. 입구에서 본 건물까지는 넓고 긴 진입로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마지막에는 높은 계단 위에 지어져서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성당을 우러러보며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데 반쯤은 기도가 아니라 구경꾼인 것 같다. 한쪽에서는 결혼 예식을 하는 것도 같고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어제 본 성모승천 성당에 비해서 진지함은 많이 없는 대신 편리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점은 있다. 고개를 들어본다. 천정 높이가 30m라더니, 과연 엄청나게 높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봤던 레옹성당이 떠 오른다. 저렇게 높은 천장을 만들려면 그만큼 돈과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인데, 아무래도 신을 모시려면 비싸고 높은 지붕이 필요했나 보다.
오후 네시, 아내가 피곤해졌다. 감기 기운도 살짝 있단다. 서둘러 볼트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2라리짜리 감자빵을 두 개 샀다. 따끈하고 촉촉한 속이 짭조름한 감자 맛이다. 식당은 비싼 대신 길거리 빵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싸는구나 싶다. 이 빵과 어제 사놓은 과일들로 저녁을 대충 때우고 뒹굴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