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빌리시 3일 차, 도시 구경은 대충 했으니 이제 교외로 빠져볼 생각이다. 오늘은 사랑의 도시, 낭만의 도시로 잘 알려진 시그나기로 목적지를 정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삼고리 버스정류장에서 마슈르카를 타는데 아침 7시부터 두 시간 간격이며 요금은 편도 5라리란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볼트로 삼고리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9시 반, 시그나기행 마슈르카를 찾아가 보니 텅 빈차에 나이 든 기사 한 명만 타고 있다. 출발 시간을 물어보니 11시, 꼼짝없이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버스비를 두고 웃지 못할 실랑이가 벌어졌다. 버스비가 얼마냐고 물으니 10라리란다. 순간 불길한 예단이 나를 엄습한다. 외국인이라고 바가지를 씌우는구나, 인터넷에서 검색할 때는 분명 5라리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뛸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따졌다. 5라리 아니냐고. 늙은 기사 아저씨는 택도 없다는 듯이 조금도 기죽지 않고 한 사람당 10라리를 외친다. 그래, 외국인인 내가 참아야지, 그래도 찍소리는 해야겠다 싶어서 최종 카드를 꺼냈다.
"피프틴!"
둘이 15로 하자는 매우 합리적인 제안인데 역시 노병은 만만치 않다. 조그만 감정의 동요도 망설임도 없이 10라리를 고집한다. 잠시 휴전하고 아내와 회의를 했다. 볼트는 어떠냐는 말에 앱으로 검색해 보니 150라리, 버스비의 일곱 배가 넘는다. 어쩔 수 없다. 체면을 잠시 접어둔 채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수밖에. 나중에 알고 보니 인터넷에도 10라리에서 15라리까지라는 내용이 올라 있었다. 게다가 우리 부부 뒤에 오는 사람에게도 모두 10라리를 받고 있었다. 결국 멀쩡한 버스요금을 두고 비싸다고 흥정을 한 셈이니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에 차표 파는 아가씨와 흥정 벌인 셈이다.
마슈르카는 15인 승 미니버스인데 얼마나 낡았는지 시트가 푹 꺼지고 거무튀튀해서 만지면 손이 더러워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막상 달리기 시작하니 승차감은 과히 나쁘지 않다. 그렇게 한 시간 반쯤 포장도로를 달리니 이번에는 비포장도로로 접어든다. 길가 풍경은 스페인처럼 완만한 구릉과 목초지, 넓은 농경지가 번갈아 나타나고 말을 탄 목동이 양을 치는 풍경도 보인다. 수확을 마친 옥수수밭과 포도밭도 가끔 눈에 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평선 보다 훨씬 높은 하늘 어디쯤에 구름에 싸인 산맥이 띠처럼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옳지, 저게 말로만 듣던 코카서스 산맥이로구나, 시그나기가 가까웠다는 말이다.
시그나기에 도착했다. 일단 차가 내린 곳은 버스와 마슈르카가 뒤엉켜 어수선한 분위기다. 사람들을 따라 성벽길 쪽으로 걷기 시작하는데 아내가 배가 고프단다. 길가에 작고 소박한 식당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테이블은 딱 두 개, 한 개에는 수염 기른 조지아 남자 혼자 식사 중이고 다른 테이블에는 최소한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전화기와 안경등을 늘어놓았다. 우리가 들어서자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한쪽 구석으로 몬다. 그 테이블을 나눠쓰자는 거다. 까짓 거, 이 정도야 일도 아니다.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마주 앉아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무척 어둡고 부스스한 할머니가 하차푸리와 다진 쇠고기 양념구이를 내 왔는데 뜻밖에 따끈하고 맛이 좋다. 믹스커피를 연하게 휙 타서 내온 커피는 차라리 뜨거운 물로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먹고 나니 둘이 20라리, 처음으로 현지인 값에 식사를 마쳤다.
교회 벽을 지난다, 벽에는 돌로 퍼즐처럼 만든 그림과 이름으로 보이는 꼬불꼬불한 글들이 여럿 붙어 있는데, 어쩌면 치열했던 전투와 그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린 듯 싶다. 흔히 즉석 결혼식을 하는 사랑의 교회로 잘 알려졌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걸어보니 앞이 확 트인 곳이 나타난다. 발 밑 평지로는 신 시그나기로 보이는 작은 도회지가 보이고, 농경지가 이어진 들판 끝에는 아까부터 보이기 시작한 코카서스 산맥이 구름을 감싸고 띠처럼 이어진다. 멋진 풍경이다. 그런데 감동이 없다. 네팔 푼힐 전망대에서 7천 미터 급 설산들을 바라보면서는 으악!,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가슴속에서 튀어나왔었다. 스페인 론다의 절벽을 바라보며 행복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마구마구 샘솟았다. 전혀 유명하지 않은 베트남 시골마을의 바람의 언덕에서는 또 어땠던가, 멀리 산과 집들을 내려다보며 괜히 눈물까지 쏟지 않았던가. 한 마디로 내가 나이에 비해 제법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거다. 그냥 멋있네, 얼른 사진 찍자, 다 봤으니 이제 가야지 하는 관광쟁이는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이 밋밋한 느낌은 뭘까? 뭔가 진정성 없는 어설픈 신파극을 보는 느낌은?
사진 몇 장을 찍고 성벽길 투어에 나섰다. 절벽 위의 집과 성당 너머 탁 트인 하늘과 멀리 코카서스 산을 바라보며 성벽길을 걷는다. 성벽 위가 아니라 성벽 옆에 붙여놓은 잔도길을 걷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다. 좁은 잔도에서 앞사람의 등을 바라보며 발끝을 조심조심 살피며 걸어야 한다. 군데군데 사다리를 타고 좁은 망루를 올라 총이나 활을 쐈을 법한 틈으로 조망을 해 보지만 그것도 엄청 멋진 풍경은 아니다. 그리 길지 않은 성벽길 투어가 끝났다. 도대체 이 속은 듯한 느낌은 뭘까?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그 이유가 될 법한 설명을 찾아냈다. 시그나기는 평범한 시골동네였다. 그런데 언제인가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예쁜 집도 짓고 성벽을 따라 길도 만들었다. 의도적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됐다는 거다. 진정성이 없는 껍데기 느낌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이런 느낌은 상당히 주관적인 우리 부부의 것이다. 인터넷과 유튜브와 텔레비전에서 모두들 극찬하니 말이다.
그냥 돌아가기엔 아쉬운 시간, 그나마 조망이 좋은 카페에 앉아서 와인 아이스크림과 하우스 와인 한잔을 시켰다. 둘 다 8라리, 4천 원 남짓이니까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다. 숙성된 맛은 아니지만 그냥 마실만 하다. 멀리 눈과 구름에 싸인 산맥을 바라보며 하우스와인을 마시며 아쉬움을 달랜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3시 50분, 마슈르카 한 대가 손님을 모으고 있다. 시간을 딱 맞췄구나 다가가는데 참으로 묘한 일이 발생했다. 나이 든 기사가 우리 부부에게 통로의 보조의자에 앉으란다. 아니 기사 옆자리와 맨 뒷자리에 몇 명 빼고는 좌석이 텅 비었는데 왜 통로에 앉아야 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서 그냥 좌석에 앉았더니 노우, 단호하고 커다란 목소리에 제스처까지 쓰며 통로에 앉으란다. 이게 뭐지? 이해하려고 고민하는데 맨 뒷자리에 앉았던 중국인 가족 셋이 차에서 내린다. 이번엔 기사가 뒷자리로 가란다. 뭔지는 모르겠고 일단 통로보다는 뒷자리가 낳다 싶어서 구겨 앉았다. 옆에는 부부로 보이는 젊은 중국인 커플이 앉았다. 앞 좌석들은 운전석 옆 여자 하나를 빼고는 텅텅 비었다. 어리숙한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