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 15

[Chapter 3 : 본질] - 7

by Chris Paik 백결

[15/15]


1924년 3월 19일은 누군가에겐, 그의 인생을 뒤바꾼 최악의 날이었다.


잉글랜드 켄트군County of Kent에 위치한 도시, 도버에서 큰 규모의 화재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다니엘(그는 성실한 시계공이었다)은 2개월간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실종되었다. 많은 사람은 추측했다, 사고 이후로 심한 정신병을 같이 앓던 그가 자살해버린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의 일반적인 추측과는 다르게, 그는 병원에서 탈출하여 반쯤 미쳐버린 채 3개월간 떠돌이 생활을 이어오며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런던으로 발을 옮겨 그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이따금 도버에서 그를 애타게 부르는 추억들은 그를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자신은 그런 참사를 겪지 않았다는 망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불가능을 알면서도, 그 마음이 간절했었을 뿐이었다. 그는 간절하다면 시간까지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정신병이고, 본인의 망상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과거와 그리움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일상을 살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신을 과거에 두고 현재에 남겨진 상처투성이인 현실의 본인을 클로드라고 믿는다. 스스로를 부정한 그는 정신병자였고, 미치광이였다.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해가며 뼈아픈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과거에만 머무를 다니엘을 대신하여 현실을 살아갈 클로드는 긴 머리칼을 잘라 이전의 모습을 지우고 기억에 얽매이지 않으려 스스로 기억을 전부 잊는다. 이것은 다니엘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부끄러운 과거였으며, 지나간 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그의 내면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일이었다.


도버엔 이미 많은 것이 사라졌고, 다니엘에게 도버는 더 이상 그 시절 그곳이 아니었다. 클로드는, 어쩌면 선택지 없이 방황하던 다니엘이 정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최후의 결말이었으리라.


런던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를 가끔 미친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킹스크로스역에서 경비를 서던 애런 씨는 1927년 9월 말, 봉쇄된 기차역에 침입했다 발각된 그가 벌금이 50펜스라는 것을 듣고도 100펜스를 건넸다고 말했으며, 클로드가 미쳤거나, 수를 셀 줄 모르는 멍청이일 것이라 덧붙였다.


또한 본인을 예술가라 칭하는 루이스 씨는 그가 무뚝뚝하다가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급발진 장애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무엇을 본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클로드가 정신적으로 정상인 것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환상이라도 보는 듯 허공에 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는 런던 시민들의 증언도 부지기수다. 그들은 대다수가 클로드와 알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경찰이 클로드의 독특하고도 해괴망측한 꼴에 대해 묘사하자, 다들 단박에 그를 떠올렸다.



로즈는 그곳에서 다니엘의 사망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흑향기의 교주가 죽은 그 사건은 런던뿐만 아니라 영국 대부분 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수개월 전, 로즈를 불쑥 찾아온 다니엘이 그녀에게 전했던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이비 흑향기를 언급하며 그들이 본인을 죽이려 들 거라는 그의 통보에 로즈는 황급히 그의 말대로 도버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의 다니엘이었던지라 로즈는 마음 한구석에서 꺼림칙함을 느꼈지만, 다니엘을 신뢰하던 로즈였기에 그의 말을 믿고 런던을 떠난 것이었다. 또 다른 인격체의 의도적인 거짓말이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었다.


다니엘이 숨을 거둔 이 사건은 흑향기로 고통받던 런던 시민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입을 타며 곳곳에 알려지게 되었고, 대부분 공은 살아남은 빈트 씨에게 돌아갔다.


영국 정부 또한 이번 사건을 계기로 흑향기 토벌에 적극 나섰다. 그 결과로 앙리 사브리나를 포함한 여러 흑향기 신도들이 체포되어 더러는 종신형을 받고, 그중에서도 수많은 흉악범은 대거 처형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조용한 자정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로즈가 도버에서 런던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범죄와 약이 판을 치던 불과 몇 년 전의 런던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고, 이를 한 명에 의한 혁명이라 부르더라도 부족함이 없었다.


다니엘의 묘는 도버의 인적이 드문 어느 언덕에 세워졌다.


커다란 화재 속 지하실에서 잔해와 흙먼지, 그리고 온갖 재를 안고 죽음을 맞이했던 터라 그 유골을 찾는 데는 큰 어려움이 따랐고, 그의 조각난 두개골 일부를 제외한 모든 유골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발견된 유골마저 표본이 부족해 다니엘의 것이라는 확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로즈는 그것이 다니엘의 유골임을 알고 있었다.


“말도 없이 가서 미안해.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도버에 방문한 로즈가 다니엘의 묘 앞에서 중얼거린다.


로즈는 목숨을 위협받던 그날, 다니엘에게 미처 말을 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도망쳐온 그곳에서 매일 죄책감과 걱정에 시달려야만 했었다.


다니엘의 묘에는 묘비명은 물론 그의 출생 연도마저 표기되지 않아 허전함과 처연함이 맴돈다.


다니엘 에어우드 아나리스

? ~ 1929


물음표로 대신 표기된 그의 출생 연도에서 로즈는 흐릿하지만, 알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나 홀연히 사라진 하나의 영웅을 마주한다.


“빈트 씨가 고맙다고 전해달래.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어주었다며? 엊그제 병원에서 그를 만나고 왔거든. 다리가 하나 없었지만 나름 멀쩡한 것 같더라. 다음 주에 런던 여행을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대. 런던에 온 걸 후회하냐는 네 질문엔, 아니라고 답했다고 전하랬어.”


로즈는 빈트가 건네줬던 백파이프를 꺼내 다니엘의 묘 앞에 살포시 내려둔다. 빈트가 크리스마스이브에 그와 함께 밤을 새우며 불었던 그 백파이프였다.


“네 장례식은 곧 이곳에서 진행되는 모양이야.” 잠시 서 있던 로즈는 챙겨 온 작은 화분을 꺼내 든다.


하나는 너와의 슬픈 추억을 담은 꽃. 로즈는 화분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얼음새꽃 두 송이 중 한 송이를 다니엘의 묘비 옆에 옮겨 심는다.


“슬프지만 가치가 있어. 날 기억하길 바라.”


아주 오래전 일이었지만, 로즈는 아도니스에서 다니엘과 얼음새꽃을 봤던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꽃에 다니엘을 추모하는 의미를 부여했다. 덕분에 로즈는 다시 한번 그를 기억할 수 있다.


하나는 영원한 행복을 비는 꽃. 마지막 슬픔 서린 꽃이 심어지자 그 위로 로즈의 눈물이 흘러 떨어지는 투박한 비처럼 내려와 두 꽃을 천천히 적신다. 붉게 피어오른 저녁노을은 작은 노란 꽃을 주홍빛으로 비춘다. 묘지만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는 언덕 아래로 도버의 푸른 대지가 펼쳐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낸다.


힘들었던 그의 새 삶이 1년 반 만에 막을 내렸다. 다니엘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모든 기억이 되돌아왔고, 다시 그날처럼 좋은 일상을 보내고 싶어 했다. 도버의 모든 기억을 품고 있던 다니엘의 집은 그가 도버를 떠날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다니엘은 어둡고 조용한 옛집에 들어서자마자 안도감과 과로로 인해 곧바로 침대에 엎어지더니 쓰러지듯 잠든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어서도 과거를 잊지 못한 그의 마지막 환영이자, 못다 이룬 소망이리라.


차가운 기운이 드리워진 그의 어두운 방에서 기절하듯 휴식을 취하는 다니엘 환영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점차 번진다. 팔 하나도 들기 버거웠지만 지금은 팔을 들 필요가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이렇게 편할 줄이야. 이제 시간이 조금 흐르면 자신이란 존재도 완전히 사라지리라, 그는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 지쳐있진 않았는가. 다니엘은 변하지 않는 일상의 평범함이 가져다주는 따뜻함과 포근함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었으리라. 기약 없는 것들을 무작정 기다려서야 뭐 하겠냐마는, 때때로 바람이 푸른 것들을 실어 올 때면 그 시간을 장식해 온 찬란한 것들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은 전등만이 고요히 비추는 고즈넉한 그의 집에선 그 시절 장발을 엿볼 수 있었다. 런던으로 오기 전, 그는 변화를 지나치게 두려워했을 뿐, 필히 행복한 사람이었으리라.


본인을 클로드로 칭한 그 순간부터, 클로드 이전의 다니엘은 더 이상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었다. 본인이 그 속에서 살고 있다고 굳게 믿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에게 미래라는 게 있었겠는가. 그것이 정말로 행복을 움켜쥐는 최선이었겠는가.


장발, 즉 다니엘은 클로드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아온다. 그러나 장발은 커다란 상처를 떠안은 채로 이미 현실에서 자신을 지워버린 후였고, 어떠한 존재도 아니게 된 장발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미 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리움이란 것, 그 자체는 삶의 이유였으니, 이를테면 애달프고 어두운 겨울의 밤하늘을 수놓는 눈송이라.


불 꺼진 다니엘의 집, 허전한 공기가 맴돈다. 먼지 쌓인 그의 침대가 차갑다. 동이 트자, 5년간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그 집의 굳게 닫힌 문, 그 틈새로 따스한 햇볕이 스며든다.


새벽의 편린은 눈밭을 더럽히나, 어린 날의 추억은 눈처럼 내려 다시 그 눈밭을 덮는다. 그리고 결국은 청신한 그 눈밭이 녹으며 봄이 온다. 아로새길 기억 속에서 행복했던 것만을 남긴 채. 결국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새하얗고 깨끗한 것이다.


그것은 강렬하며, 매우 뜨겁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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