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 14

[Chapter 3 : 본질] - 6

by Chris Paik 백결

[14/15]


밖은 여전히 추웠다. 가루눈이 어두운 하늘을 뒤덮었다. 해는 아직 하늘에 떠 있었지만, 눈과 구름에 가려진 채로, 그 빛을 뿜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의 기억이 선명했다. 내가 헛것을 봤던 걸까? 어쩌면 로즈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로즈의 얼굴을 제대로 못 봤잖아. 먼 곳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녀를 본 게 다였다. 그러나 그 기억은 선명했다. 나는 그 기억이 심하게 왜곡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눈길을 지르밟으며 피에르의 생가를 찾아갔으나, 낡은 소파 위에 누워 몸살에 떨고 있는 빈트 씨를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었다. 한숨을 내쉬면 입김이 선명할 정도의 추위였다. 빈트 씨는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맨 채로 자다가 눈을 뜨고 나를 발견했다. 그의 시퍼런 아랫입술이 벌벌 떨리는 것이었다.


빈트 씨가 왜 이렇게 런던에서의 여행에 집착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대목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은 명백했다.


여기는 호텔이 아니라고 하자 한쪽 벽이 무너져 서풍이 그대로 들어와도 저녁엔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그의 말엔 어이가 없었다. 얼어 죽어도 낭만이라는 사람과는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 듯했다.


“물이라도 끓여드려요?”


“레인지 고장 났을 텐데요. 주전자는 있는데.” 빈트 씨는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거친 기침을 섞었다.


빈트 씨는 기운 없이 잠겨버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차갑게 얼어버린 그의 어두운 피부는 여러 군데에 상처도 가득한 상태였다. 손가락 끝은 왜 이렇게 상했냐는 질문에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자에게 오는 책임이라 답했다. 나는 그에게 미쳤다고 대꾸했다.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그래도 혼자보단 둘이 낫네요.”


“같이 노을 보다가 죽을까요?”


“낭만 넘치네요. 많이 늘었어.”


그와 쓸쓸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마당으로 나갔다. 그래도 정말 내가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혼자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인지 단순한 감기라며 병원은 극히 거부하는 그였다.


장작을 모아 성냥으로 불을 붙이자 뜨거운 불이 장작 위에서 활활 타올랐다. 빈트 씨의 양은 주전자에 눈을 퍼 담고 나뭇가지로 지지대를 세워 불 위에 올려두었다.


“나오세요. 불을 피워서 밖이 더 따뜻합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며 불구덩이 안으로 장작을 던지고, 불을 향해 있는 힘껏 후 불었다. “왜 진작 불을 피우지 않은 거죠?”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엉금엉금 기어서 밖으로 나왔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게 한 달 전과 똑같았다. 그때가 다시 그리워졌다.

빈트 씨는 대답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는 술에 취한 듯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이제 가셔야죠.”


“성냥도 이제 하나 남았어요. 이거까지 쓰고 돌아가려고요.” 시간이 조금 흐르자 빈트 씨가 성냥갑을 만지작거렸다.


“돈 있어요? 열차 타고 돌아가게요?”


“예술가는 가난한 법이에요.”


“이러고만 사니까 가난하지.”


이런 데서 노숙이나 하는 그가 돈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때문에, 나는 그에게 표를 사서 역으로 바래다주기로 약속했다. 그를 위해서 표를 사는 돈 정도는 아깝지 않았다. 가장 의문인 건,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배를 채워왔냐는 것이었다.


“감사해요. 내일이나 떠나려고요.”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성냥은 내일 아침을 위해….”


“하룻밤을 더 자겠다고요? 여기서?” 병원도 안 가려는 그가 하룻밤을 더 묵겠다는 말에 큰 걱정이 앞섰다.

빈트 씨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었을까.


“즐기세요. 괜찮아요, 안 죽어.”


“내일이면 변사체로 발견되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난 빈트 씨에게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생각이 있냐고 물으려다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장발의 시체 때문에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전 그걸 한 번 더 보고 싶을 뿐이에요.”


빈트 씨는 그저 끓인 물을 컵에 따라달라고 요청할 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빈트 씨의 가방에서 컵을 꺼내 보글보글 끓는 물을 따랐다.


“그걸 한 번 더 봐요?”


“있어요. 이따가 보여드리죠.”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런던에 온 걸 후회하시나요? 잔뜩 고생하고 계시는군요.”


“…그 답은 나중에 할게요.”


빈트 씨는 뜨거운 물을 들이켜는데 정신을 쏟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마시면 바로 혀와 입천장을 데는, 아주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행동이었으니까. 그의 홀짝거리는 소리가 모닥불 소리와 어우러져 차가운 바람 소리를 덮었다.


시간은 오후 다섯 시를 향해갔다.


“짐 가방에 감자 몇 개 있어요. 구워서 먹죠.” 빈트 씨가 말했다. “내일이면 떠날 거니 더 이상 남겨둘 필요도 없죠.”


“몇 주째입니까?” 내가 그의 가방에서 감자 두 개를 가져오며 물었다.


모닥불 주위로 돌아오는 중간에 커다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감자 하나를 놓쳐버렸지만, 빈트 씨가 공중에서 잡아냈다.


“벌써 두 달째죠. 이제 정말 돌아가야 해요.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네요.” 그가 나른하게 말했다. “정말로 내일 가죠.”


“노숙자가 되기를 자초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왜 아까 가지 않은 거죠?”


빈트 씨가 내일 떠난다면 내일 약속된 시간에 다시 나와 킹스크로스역에서 표를 끊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물론 빈트 씨가 하루라도 더 런던에 있는 것은 좋았지만 내가 그를 리버풀로 다시 보내려는 것은 돈도 없고 감기에 걸린 그의 건강이 더 우선시 되어서였다.


빈트 씨는 내 질문에 아무 말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내 눈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 끝엔 아름다운 무언가가 펼쳐져 있었다.


낮게 뜬 해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랗고 붉은빛이 눈밭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까맣게 변해버린 나무들은 저마다 자리를 지키며 드넓은 하늘 이곳저곳을 채우며 하나의 배경이 되었고 강렬한 햇빛으로 인해 많이 대비되는 빛과 어둠이 하늘과 땅을 구분 지었다. 무엇보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데우는 느낌의 노을이었다. 눈부신 잔광이 황홀할 뿐이었다.


우린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볼 때마다 새롭죠.” 빈트 씨가 중얼거렸다. “제게 있어 눈 쌓인 산에서 노을을 보는 것은 세상이 주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이유를 알겠네요.” 내가 노을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저는 빈트 씨가 가더라도 나중에 이곳을 다시 찾아올 거 같군요.”


“이걸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젠 정말로 가야 해요. 아, 사진기를 안 가져왔네.”


모닥불과 함께한 노을은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멋있었다. 그도 그럴 게 기억을 전부 잃어버린 ‘기억의 날’ 이후로 음지에서 흑향기와 씨름만 하지는 않았는가. 인생에서 이렇게 조용한 것을 넘어 행복을 느꼈던 순간이 얼마나 될까.


“근데 제발 이런 건 집에서 보세요. 목숨 걸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내가 말했다.


“항상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해요. 이런 것들이 전부 경험으로 쌓이는 거죠.” 빈트 씨가 답했다.


감자를 불에 구웠다. 바싹 익은 감자에선 뜨거운 김이 한없이 올라갔다. 그와 하나씩 나누어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어느 하나 빠지지 않은 순간이었다. 입에는 구운 감자가, 피부엔 온기가, 귀에는 모닥불 소리가, 코에는 겨울 향기가, 눈에는 노을이, 그리고 옆에는 친구이자 동료. 이른바 낭만으로 묶여 불리는 것들이 모여 이 시간을 아름답게 채웠다.


“이게 낭만이죠. 전 이걸 찾았어요.” 빈트 씨가 말했다.


우린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담소를 나눴다. 빈트 씨의 마지막 밤을 그가 잠들기 전까지 함께 할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이것도 하나의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빈트 씨가 말했다. “나중에 이때를 그리워하기 전에 지금 충분히 만끽하세요.”


해가 저물어서야 우리는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스툴에 앉아 펼쳐본 <하이드>는 양초 위에서 작지만,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불빛으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 많이 훼손되어 내용 일부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글자들에선 이름 모를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피에르의 필체는 작가의 감정까지 전달해 주는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다. 나중에 그를 만난다면 반드시 책의 출간을 빌 것이었다.


잔뜩 구겨진 원고지를 손으로 꾹꾹 눌러 가며 피면서, 나는 보존된 마지막을 읽어 내려갔다.


「…그 분노와 야망은 전부 손끝으로 전달된 것이었다. 그간 권력을 쥐던 검사의 인생은 그런 벽돌로 끝을 맺은 것이었다. 그 순간에 나는 느꼈다, 상처가 나도록 벽돌을 세게 움켜쥔 손에서부터 흘러오는 전율을. 벽돌이 검사檢事의 머리를 파고들 때, 나는 이전을 청산하고 미래를 포기한 것이었다.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 그 속에서 나는 마지막 자유를 느꼈다. 40년의 길고 길었던 복수극과 억압의 도주극은 드디어 막을 내렸고, 그토록 갈구하던 것을 얻은 것이었다.」


나도 언제쯤 막을 내릴지 모를 인생의 방황을 끊고 잠들고 싶을 뿐이었다. 마음속의 짐을 덜어내고 물불 가릴 것 없이 열심히 살 수 있다면 소설의 루카스처럼 뭐든 마다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인생을 계속 살기보단 그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님, 장발 친누나의 죽음을 목격,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는 로즈, 구사일생으로 죽음 앞에서 두 번이나 살아남고 누명으로 들어간 교도소, 그리고 혼자 자살해버린 장발까지. 1년 만에 이런 일을 겪고도 내가 미쳐버리지 않은 까닭은 아마 이미 미쳐버린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인생을 예고한 하늘의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이것이 내 인생의 구원이 되진 못했다.

빈트 씨는 이미 지하실에 따뜻하게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이미 꾸려놓은 상태였다. 지하실은 버려진 집무실 같아 보였다. 먼지 턴 이불을 바닥에 깔아놓은 빈트 씨는 1층 부엌으로 올라오며 이곳보다 모닥불이 있는 야외가 훨씬 따뜻하다고 했다. 때문에,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꺼져가는 모닥불을 살리기 위해 장작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여분의 장작들을 주변에 두어 심야 중에도 빈트 씨가 장작을 보충하기에 편하게 하려 했다.


나는 생가의 지하실로 들어간 빈트 씨를 두고 마당으로 나왔다. 크리스마스 날, 이곳에서 자다가 로즈의 시계를 떨어뜨렸겠지. 나는 무성하게 자란 풀과 돌무더기를 하나하나 뒤지며 차가운 금속이 손끝 감각으로 전달되기만을 바랐다.


하나 연속되는 거센 바람과 함께 희미한 발소리를 인지했을 땐 당황스러움에 저절로 숨을 참았다. 이 시간엔 올 사람이 없는 데다 이곳 역시 올 사람이 없었으니까.


발소리의 주인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그 불안함을 키우며 다가왔다. 어느 작은 동물이 고통스러워하며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그는 이쪽으로 다가왔고, 곧이어 그 소리가 멎자 가득 쌓인 눈밭에 무언가 툭 던져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동물을 죽이며 들어오는 소리였다.


이윽고 깔끔하고 긴 코트 차림에 페도라까지 눌러쓴 키 큰 남자가 들이닥쳤는데, 하나 특이점이 있다면 뼈를 깎아 만든 까마귀 형태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곧바로 그 남자가 흑향기 신도라는 것을 눈치채고, 나는 나무 뒤에 숨어서 폐가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엿보았다.


그는 괜히 헛기침했다. 걸쭉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는 그 존재만으로 엄청난 심리적 압박과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혼자인 듯하였으나, 그 걸음걸이와 존재감은 그가 단순한 일반신도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케 했다. 그는, 교주 아덴타였던 것이다.


아덴타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그의 뒤를 쫓아 밖에서 집안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집 안에는 아직 빈트 씨가 있었지만, 다행히 그도 눈치껏 빠르게 숨은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집인 마냥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바닥에 던져두고 낡은 스툴에서 편하게 쉬는 모습은 아덴타가 이 장소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들게 하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금방 자리를 뜰 것 같지는 않았다.


난 계속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를 관찰했다.


아덴타는 성큼성큼 걸어가 이불장을 열어보았다. 아직 그가 집에 자신 말고 다른 이가 있다는 걸 알고 찾아내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이드> 원고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다.


…잠깐, 원고를 제자리에 두었던가? 그 순간에 떠오른 치명적인 자문은 당혹스러움과 함께 뇌의 사고를 잠시 멈추게 했다. 침입의 흔적을 그대로 둔 채 숨어버린 것이다. 차라리 혼자였다면 이대로 도망쳤겠지만, 안에는 빈트 씨가 여전히 숨어있어 혼자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야 곧바로 도망가면 되겠지만 지하실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빈트 씨는 아덴타가 그곳의 바닥 문을 열지 않기를 빌어야 했을 것이다. 지금 들어가서 원고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은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고, 그렇다고 도망치자니 빈트 씨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정적이 흐르더니 그 아덴타가 돌변하여 다급하게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숨느라 제자리에 갖다 두지 못한 원고를 찾는 중이라면 좋았겠지만, 곧이어 부엌에서 들려오는 빈트 씨(몰래 탈출하려다 남자에게 발각된 듯했다)의 비명은 나를 더 공포로 몰아넣었다. 판단력이 흐려지고 마음만 급해져 갔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은 그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곧바로 마당으로 달려 나가 도움이 될 만한 도구를 찾았다. 부서지며 떨어져 나온 조각상의 파편이나 날카롭게 꺾인 나무줄기라도 좋았다.


다급함에 몸과 마음은 분주했지만, 어두운 밤에 가로등 하나 없는 마당에서 더듬으며 그런 물건들을 찾는다는 것은 꽤 어려웠다. 어둠 속을 더듬다가 쓸모없지만 날카로운 것들에 베여 생긴 상처도 적지 않았다.


빈트 씨는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 물론 아덴타와 맞서 싸웠다는 것은 아니었고, 죽지 않고 비명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비명이 언제 멎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마당 외각, 커다란 나무에 꽂혀있던 도끼를 운 좋게 찾아 곧바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끼로 사람을 찍는다는 끔찍한 일은 실행하기도 무서웠지만 빈트 씨를 돕기 위해 도끼를 치켜들고 과감히 아덴타에게 달려갔다.


빈트 씨는 그를 사정없이 구타하는 아덴타에게서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머리를 보호하려 힘을 다해 두 팔을 희생하고 있는 빈트 씨의 모습은 흡사 코번트리 백작이 든 칼에 찔리지 않기 위해 악으로 버텨낸 1년 전 나의 모습 같았다. 그렇게 난 아덴타를 향해 도끼를 치켜들고 달렸다. 물론 도끼날로 내려찍을 생각은 아니었고, 도끼날의 묵직한 뒷면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갈겨 기절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덴타의 등 바로 뒤로 접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있는 힘껏 도끼로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 아덴타는 여전히 빈트 씨를 구타하다가 큰 소리에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긴 했지만,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도끼는 그의 정수리에 명중했다. 빈트 씨가 놀라서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아덴타는 도끼를 맞고 잠시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중심을 잡고 묵묵히 일어섰다. 그는 곧 페도라를 고쳐 썼다. 이걸로 기절하지 않았으니 이제는 도끼날로 내려찍을 수밖에 없다고,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나는 생각했다. 아덴타의 까마귀 가면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섬뜩한 눈빛에서 두려움이 몰려왔다.


빈트 씨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탈진하여 쓰러졌다. 죽었는지는 모른다.


나는 아덴타가 온전히 중심을 다 잡기 전에 한 번 더 그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그의 머리가 두 동강 나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푹 하고 무언가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힘껏 휘두른 도끼날은 아덴타의 얼굴을 강타했다. 두려움에 휘두르는 순간에 눈을 질끈 감았는데, 묵직한 것이 도끼날에 찍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도끼날로 두개골이 골절되는 느낌 또한 받았다. 순간에 든 희열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현실도 잊게 할 정도로. 이 지경이 되도록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된 나였다. 도끼를 휘두른 그 순간,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친 몸과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내 몰아쉬는 숨소리 너머로 희미하게 라이터 소리가 들리더니, 천천히 타들어 가는 불꽃이 시가 끝에 붙는 소리가 이어졌다. 곧이어 퍼지는 자욱한 담배 연기….


어라?


머릿속이 하얘지는 상황 속에서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채로 우두커니 서서 시가를 입에 물고 한껏 빨아들이고 있는 아덴타가 페도라 안쪽에서부터 얼굴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도끼날에는 그의 끈 풀린 까마귀 가면이 박혀있었다. 알 수 없는 짐승의 머리뼈로 만들어진 그 가면이 먼저 도끼에 박혀 그 얼굴에서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의 가면은 내가 도끼로 찍은 자국을 따라 두 개로 조각났다.


맙소사…. 처음으로 마주한 아덴타의 얼굴은 가히 그 당혹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잔뜩 늙은 주름살 많은 얼굴, 이제는 잔뜩 처진 눈매, 입을 가릴 정도로 자란 콧수염. 아덴타는 희대의 소설가, 피에르였다.


그는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렸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의 등껍질이 반으로 갈라지며 속에서 매미 성충이 고개를 내밀 것처럼 보였다. 그는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몸부림치다가 내게 달려들었다.


깊게 파인 상처가 났다.

그렇게 기색도 없이 갑자기 달려들면 누가 반응할 수 있었을까. 그가 커다란 바람 소리와 함께 옆으로 휘두른 낫 날이 왼쪽 옆구리에 깊게 박혔다. 순간적인 고통에 정신이 아찔했고 아덴타가 낫을 빼자 피가 많이 흘렀다. 낫 휘두르는 묵직한 소리가 귀에 박혀 순간의 고통을 더한 것 같았다. 숨을 내쉬며 복부가 움직일 때마다 왼쪽 옆구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숨을 잘 쉴 수 없었다.


“자네, 낯이 익군. 그러고 보니 지난 크리스마스에 여기서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이었지.” 그가 낫을 땅에 짚었다. “특히 자네는 <하이드>를 용케도 찾아내서 베고 자고 있더군. 내가 가져가려 했으나, 독자가 소설에 빠져서 열렬히 몰입하고 있는데 차마 그 몰입을 깰 수가 없더군.”


그는 입에 시가를 물고 있던 탓에 발음이 많이 뭉개졌다.


필사적으로 옆구리를 손으로 꾹 눌러 지혈했다. 아픔을 잊으려 노력했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런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곧 죽겠구나, 직감했다. 적어도 멀쩡히 집에 돌아가지는 못할 듯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서야 되겠는가?”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던 그날, 그 밤사이 아덴타가 와서 우리를 보고 갔다는 걸 알게 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장에 희망은 없었다. 깜깜한 밤에 깊은 숲 인지라 외부인은 없지, 이곳에 날 도와줄 사람도 없지, 옆구리가 날에 크게 베인 채로 그와 실랑이를 벌인다 한들 이뤄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몇 초 더 목숨을 부지하는 것뿐이다. 빈트 씨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없었다.


아덴타는 끔찍한 통증에 비틀거리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반대쪽 옆구리에 낫을 한 번 더 휘둘렀다. 그 순간엔 더 큰 소리와 함께 신경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큰 고통이 따르면 순간에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단번에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양쪽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는 멈출 생각을 안 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에선 피와 기름이 줄줄 새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전부 지혈하기에 두 개밖에 없는 손과 남은 힘은 역부족이었다.


“사실 자네는 내가 전부터 죽이려고 했었지.” 그가 낫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베시를 죽인 것도 자네가 아니오? 지독하게도 연이 깊군.”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은 살아 나갈 방법을 궁리하느라 과부하 되어있었다.


“잘 가세. 덕분에 루카스처럼 후회 가득한 밤이 되지 않았네. 지금 죽어가는 그 기분, 잘 기억해 뒀다가 지옥에서 마주하면 꼭 내게 전해주게. 자네만 아는 경험일 테니 말이야. 거기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네. 좋은 글거리가 되겠군. 음, 새로운 영감이 필요해.”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집 말이오. 쓰지도 못하는데 어차피 철거할 생각이었소. 좋은 장소로 개발을 마치면 자네의 이름을 올려두겠네.” 그가 물고 있던 불붙은 시가를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이쯤에서 그만두려는 게야. 피를 더 보는 건 이제 지루하고, 또 지겹잖소.”


아덴타는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바닥으로 던졌다. 시가는 먼지 쌓인 카펫에 떨어지더니 곧 큰불로 옮겨붙었다. 아덴타는 그 상황에서도 느긋함을 유지하며 거실 한가운데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불은 조용히, 점점 커지며 타는 냄새가 지독해졌다. 그 불은 순식간에 집 전체를 뒤덮었다.


“<하이드>는 재미있게 읽어보았는가? 그 책도 이런 식으로 쓴 걸세. 많은 친구가 도와주었지.” 아덴타는 이렇게 말하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난 이만 가보겠네. 불에 타 죽는 거랑 잔해에 깔려 죽는 것 중에 원하는 거 하나 골라서 신께 기도해 보게. 운이 좋다면 동시에 일어날지도 모르지. 아, 로즈메리에겐 자네 안부를 전해주겠소.” 그는 실실 웃으며 집을 빠져나갔다. “아아, 흑사병도 이렇게 종식하는 것이오.”


집 한 채가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도 난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도저히 도망갈 수가 없었다. 집을 빠져나간다 해도 아직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덴타가 날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만무했다.


난 곧 죽는다. 이왕 죽는 거, 아덴타랑 같이 죽을 거다. 거실에 아덴타가 던져둔 목도리가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와 함께 거실로 달려가 그의 목도리를 주웠다. 아덴타는 아직 현관을 나서지 않았고, 시가를 꺼내 집에 붙은 불에 갖다 대었다. 그를 향한 분노는 이미 쌓일 대로 쌓여있었다.


몸에 남은 온 힘을 동원해 그를 습격하자, 그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뒤에서 최대한 넓게 펼친 목도리로 그의 얼굴과 목을 감싸고 손으로 그 뒤를 잡아 힘을 주어 고정했다. 그가 물고 있던 시가의 불이 목도리에 옮겨붙으며 아덴타의 얼굴 전체가, 그의 목도리와 함께 불에 타들어 갔다. 언젠가부터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괴성을 질렀다.


불붙은 목도리를 꽉 쥐고 아덴타가 벗어나지 못하게 버텼다. 아덴타의 목엔 핏줄이 돋았다.


난 그렇게 잔뜩 당황해하는 아덴타를 집 안 깊숙이 끌고 갔다. 아덴타를 지하실에 처넣고 문을 닫아 가둘 생각이었다. 아덴타는 얼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저항할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얼굴을 태우는 불을 끄려, 필사적으로 손을 허우적대며 온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지하실까지 정말 몇 걸음 안 남았을 때, 건물 붕괴가 시작되었다. 천장이 꺼지며 아덴타를 깔아뭉갰다. 그의 복부가 끔찍하게 터져버렸다. 그를 내팽개치고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2차 붕괴를 피해 지하실로 몸을 던졌지만, 곧바로 입구가 단단히 막혀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지하실 천장은 잔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이미 푹 꺼져버렸고, 나는 몸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 갇혀버렸다. 두 발이 잔해에 깔려 뭉개져 버렸다.


또다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들리는 건물의 연이은 붕괴 소리에 살고 싶다는 본능이 앞섰지만 이미 무너진 지하실에 꼼짝없이 갇혀 손 쓸 도리가 없었다. 허리를 살짝 돌리기도 버거운 그 좁은 공간에서 무언가 위에서 내게로 쏟아지는 잔해를 막아서며 나를 보호했다. 매캐한 연기가 숨쉬기 힘들게 했다. 좁아터진 지하실 내부에 불이 붙었고 곧이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넌 왜 도망가지 않은 거지?〛 잔해를 막아서고 날 지킨 그것은 분명히 장발이었으리라.


위를 올려보았다. 그가 천장에 엎어진 채로 위에서 쏟아지는 잔해를 등으로 막고 있었다. 그 역시 하반신은 이미 뭉개져 버린 후였다. 나는 환각을 보는 것이었다. 요동치던 심장이 식어갔다.


〚어차피 못 나가. 이제 우리 둘 다 죽은 거야.〛 장발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 나가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한 어투였다. 나는 그저 할 말 없이 고개만 떨궜다.


“너 진짜 뭐야?”


〚기억을 잃었다지만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 놀랐어. 다니엘. 마지막으로 이건 말해야겠어. 죽는 그 순간까지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 장발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서 도버 참사의 유일한 생존자는 나지만, 너라고 하는 게 더 맞는 듯 해. 난 겨우 살아 나와서는 더 이상 미래를 살아가는 것을 포기했으니까. 옛날이 그리운 걸 감당하지 못한 거야.〛


장발은 말을 하는 도중에도 연신 기침했다.


“뭐라고? 다니엘?”


장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인가. 지금까지 본 장발은 전부 그리움 속에 스스로를 가둔 나 자신의 환각이었다는 걸…. 장발, 그는 도버 참사를 겪었던 나였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내게 미래를 떠맡긴 ‘기억의 날’ 이전의 나였다.


〚이사벨과 함께하던 그때가 너무 좋았어.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땐 절망적이었어.〛 그가 말했다.


클로드는 그저 가명이었던 것이었다. 이사벨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내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했던 거였다. 충격적이고도 쓸쓸한 충격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행복했었나 보다. 그 시절의 ‘나’를 환각으로 다시 볼 정도면, 난 대체 어떤 절망을 겪었던 걸까.


그때, 건물 잔해가 무수히 많이 밀려 내려오면서 장발의 왼팔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보이지 않는 검은 피가 튀겼다. 그래도 장발은 아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 고통을 버텼다. 어쩌면 그는 환각이니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 공간엔 나 혼자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무너진 잔해에 의해 공간은 더할 나위 없이 좁아져 엄청난 답답함을 자아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소리가 전해주는 불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많은 것이 바뀌지만 난 그걸 원하지 않았어. 갑작스러운 사고로 일상이 무너졌고 눈앞이 깜깜했어. 모든 것을… 잃었거든.〛 그가 말했다.


장발, 즉 과거 나의 심정을 이해하자 머릿속을 매운 혼란이 비로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네게 내 미래를 맡기고 난 현실을 살기를 거부한 거야. 도버 참사는 내가 아니라 네가 겪었다고 믿었어.〛


“서리 부인은 과거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했어. 가치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팔에서는 피가 계속 흘렀다. “아무리 봐도 가치가 없지는 않아.”


장발에게 전한 마지막 말이었고, 동시에 내 실수를 후회하는 혼잣말이었다. 나는 어쩌면 내게서 잊힌 기억 중 스스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아니었는가.


내가 본 나라는 환각, 내가 잊은 기억 중 가장 강렬했던 건 나 자신이었다는 것…. 결국은 새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던가 보다. 그렇게 과거를 잊고 살아보니 정말 행복했는가. 혹은 과거를 잊지 않았다면, 꿈꾸던 대로 행복했을까. 아니, 애초에 너와 나, ‘우리’라는 것이 영원히 깨지지 않을 순 없는 건가. 도버 참사 이후로 행복했던 날들은 몇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있어도 새로 만든 인간관계, 그 속에서 느끼는 새로움의 설렘이었고 그마저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들이었다. 왜곡된 기억 속에서, 불행한 삶을 행복의 평균치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었다.


〚이사벨이 아니면 다시 행복할 수 없을 줄 알았어.〛 희미하게 꺼져가는 장발이 말했다. 〚그런데 넌 이미 행복 속에서 살고 있었더라.〛


겨우 찾은 행복을 욕심으로 져버린 것이었다.


나는 곧 허리를 숙인 채 등으로 무너지려는 잔해를 받들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등으로 잔해를 막으며 나를 보호하던 장발의 모습. 그조차도 나였다. 왼팔은 잔해에 깔려서 뭉개진 채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 스스로가 잔해로부터 나를 보호하던 장발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느 순간 장발은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았다. 장발은 죽었다. 그러니까, 망할 정신질환이 사라진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비현실적이고 헛된 기대는 생각도 안 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구조되어봤자, 밖에서 숨을 몇 번 껄떡이다가 죽어버릴 것이었다. 밀폐된 좁은 공간 안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곧 연이은 충격이 몰고 온 흙먼지와 잔해들이 안 그래도 좁아터진 이 공간을 꽉 채우자 폐로 들어오는 텁텁한 연기가 기도를 막았다. 뜨거운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갈수록 답답함이 몰려왔다. 피가 너무 많이 흘렀다. 몸에 난 상처와 온갖 구멍에서는 전부 기름과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숨이 가빠지고 시야의 초점이 안 맞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내뱉는 숨결은 불보다 뜨거웠다.

모든 것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내가 되었다. 이제 모든 걸 받아들일 때가 온 거야. 등으로 떠받치는 잔해와 오른팔의 피부에 맞닿는 온기가 적당히 따뜻해진 것이 벌써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온 듯하다. 그 장미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빈트 씨가 깔아 둔 이불에 불이 옮겨붙었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흙먼지에 눈앞은 어두워져만 갔다. 가슴 밑으로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이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비참했던 그 모든 순간 속에서, 마치 긴 꿈을 꾼 듯하다.


괴로웠지만, …나쁘지 않았어.


이제야 눈을 감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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