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 13

[Chapter 3 : 본질] - 5

by Chris Paik 백결

[13/15]


웬일로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다섯 시 반, 창문을 열자 차갑기만 한 바람이 옷 안으로 들어가 살갗을 스쳤다. 신선한 공기에 얼굴이 꽁꽁 어는 느낌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바닥에 쌓인 눈은 그대로 얼어버려 가로등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사실 이전에도 이 시간에 잠깐 깨는 일은 종종 있었다. 악몽 속에 있음을 인지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허우적대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욕설을 내뱉은 뒤 일어나지도 않고 무거운 눈꺼풀에 다시 잠들었다. 놀랍게도 그렇게 다시 잠들고 나면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악몽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하젤 부인이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도움이 급해서 찾아왔습니다.” 말하는 내내 브로디 씨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브로디 씨와 에버린 씨, 그리고 에녹 씨가 나를 다시 찾아온 날은 1월 26일, 바로 어제였다. 그들이 날 찾아온 이유는 한참 동안 몰랐으나 간절한 목소리로 내게 도움을 청하는 그들을 보고 유추할 수 있었다.


“하젤 부인은 아직 다니엘이 어딘가에서 살아계시리라 믿고 계십니다.” 에버린 씨가 말했다.


“며칠을 침대에서 앓고 계세요. 의사도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브로디 씨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보고 싶어 하시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들은 이어 슬픈 표정을 지었다.


“무슨 부탁입니까?” 내가 물었다.


“클로드 씨가 하젤 부인 앞에서 본인이 다니엘인 척 연기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젤 부인은 시력이 안 좋으셔서 모르실 겁니다. 당신은 다니엘과 정말 닮았잖습니까.” 브로디 씨가 두 손을 모았다. “어쩌면 당신이 다니엘의 쌍둥이일 수도 있고요.”


“곧 죽을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하란 말씀이십니까?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거죠?”


“끝까지 빚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은 평생 저희를 위해 사셨어요.” 에버린 씨가 말했다. “사례는 걱정 마세요.”


물론 나는 생긴 것도 다니엘을 닮았고, 그와 오랫동안 같이 있다 보니 그를 연기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알지도 못하는 하젤 부인이라는 사람을 위해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장발을 불러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날 문을 굳게 닫고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이 워낙 충격이었던지라 곧바로 단념했다.


“저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난 그들에게 그렇게 남을 속이는 것은 윤리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도 죽여본 내가 윤리를 따질 리는 없고, 이것은 그저 하기 싫은 것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말일 뿐이었다. 그래도 수긍하는 셋을 보며 효과는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브로디 씨는 도버로 돌아가면 하젤 부인께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런던에서 행복해하는 다니엘을 보았다고 이야기하겠노라고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장례 준비도 해야 할 텐데.” 브로디 씨가 말했다.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클로드 씨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저희도 이제 다니엘을 찾는 건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어떤 이야기를 하며 돌아서서 내게서 점점 멀어졌다. 듣자 하니 하젤 부인의 장례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돌아가자마자 피터 씨에게 편지를 써야겠어. 장례식 일정을 미리 잡아둬야 해.” 에버린 씨가 말했다. “로즈메리 씨에게서 거베라와 백합도 좀 구하고.”


“네?”


그 순간 나는 무엇을 느꼈던가. 그것은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듣고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었다. 큰 목소리가 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셋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로즈메리요?” 난 그들을 멈춰 세웠다.


“아…, 저희 마을에 계시는 조향사입니다. 꽃집 운영도 겸하고 계십니다. 꽃에 대해선 빠삭하신데,…”


“언제부터 거기 있었죠?”


“저요? 저는…”


“그 조향사 말입니다.”


에버린 씨는 당황해서 날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게 일단 앉고 진정하라고 했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좀 됐죠. 1년 좀 넘었을 텐데요.”


그 순간 나는 확신에 찼다.


“하젤 부인이 다니엘을 그리워하십니까?”


“네 맞습니다.”


“얼마나 그리워하십니까?”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보고 싶다고 그렇게 이야기하셔서 저희가 여기까지 온 거 아니겠습니까.” 에버린 씨가 답했다.


“하젤 부인께 얼굴만 잠깐 비추면 되는 거라면…, 내일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셋은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겉으로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그들이 그렇게 하자고 말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윤리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브로디 씨가 물었다.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가끔은 그래도 되지 않겠습니까.”


브로디 씨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에버린 씨가 혼자 중얼거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브로디 씨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다니엘과 정말 닮았군요.”


그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그렇게 난 다니엘의 옷을 입고 도버로 가게 된 것이었다.


킹스크로스역에 다시 오니 그 느낌은 새로웠다. 처음 흑향기를 마주한 곳도 이곳이었고, 금발 머리에게 죽을 뻔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여러모로 안 좋은 기억만 있었던 곳은 역시나 사람들이 바글대는 쪽이 더 어울렸다.

오래된 천 가방 안에 교통비와 한 끼 식사비, 그리고 피에르의 책인 <도피>를 챙겼다.


여섯 시 반 열차에도 꽤 많은 사람이 북적였고 어느새 갠 하늘에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증기를 내뿜으며 큰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열차는 아침부터 세상 분주한 사람들을 태우고 도버로 출발했다.


열차가 이동하는 한 시간 반 동안은 그나마 홀로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음료 서비스에 감탄하며 감상하는 홍차를 곁들인 영국 시골의 풍경은 복잡하고 높은 건물들이 빽빽한 런던의 도심과는 사뭇 다른 향기가 자연과 어우러진 채 내 눈을 즐겁게 했다. 나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홍차를 들이켰다.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음이 신경 쓰였다.


‘기억의 날’ 이후 처음으로 다른 도시로 나가보는 거라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도버로 간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런던에서 끔찍했던 1년 하고도 3개월을 보내며 그 짧은 사이에 내 앞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고 나 또한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지만 그런 경험들도 결국엔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해 감정 따위 느끼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의지가 없던 내가 이제는 모든 것을 극복해 내었고, 앞으로 비슷한 불행이 닥쳐와도 전보다는 더 오래 버텨낼 거라 확신했다. 물론 도버로 가는 이유는 하젤 부인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내 유일한 좋은 추억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이가 그곳에서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 그 하나로 난 이 열차에 올라탄 것이었다.


도버는 공기마저 런던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열차에서 내려 도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느낀 향기는 내가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몇 번이고 되뇌게 했다. 눈이 멈추지 않고 내렸다. 도버는 이미 흰 눈으로 뒤덮여 새하얬다. 난 브로디 씨를 만나기로 한 카페로 들어갔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브로디 씨가 들어왔다.


“다니엘 씨?” 브로디 씨는 날 보더니 마구 손을 흔들며 얼굴에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드 씨. 당신은 오늘 하루 동안 다니엘입니다.”


“저택은 어디에 있습니까?”


“따라오세요.”


브로디 씨는 날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에게 이끌려 이곳의 작은 마을을 지났다. 이곳이 장발이 자라고 살아온 마을이구나. 이곳은 분명 내가 사는 곳보다 평화로웠다.


“이 서점은 저번 주에 문을 닫았습니다. 다니엘이 항상 피에르의 책을 샀던 서점이었지만 작년 사장님이 돌아가시고 그 집 형편이 어려워졌답니다.” 브로디 씨가 서점 한 곳을 지나치며 설명했다. “사장님은 다니엘이 사라지고 난 뒤로 그를 다시 본다면 선물로 주겠다고 피에르 소설집 전권을 항상 준비해 놓으셨는데. 안타깝죠.”

불 꺼진 서점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그 내부는 썰렁했다. 주인 없이 남겨진 책들이 먼지가 가득 쌓인 채 빼곡하게 올려져 있었다.


“여긴 골동품상점입니다. 다니엘은 이곳에서 시계를 잔뜩 샀었죠. 무언가에 한 번 꽂히면 그를 말릴 사람이 없었습니다.” 브로디 씨가 이번엔 골동품상점 한 곳을 지나치며 말했다. “당신을 데리고 다니는 건 다니엘이 다시 이곳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네요.”


“꽃밭은 없습니까?” 내가 물었다.


“꽃밭은 여기서 반대로 더 가야 합니다. 관심 있으시면 이따가 안내해 드릴게요.” 브로디 씨가 손가락으로 반대 방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꽃집에서 꽃을 살 수도 있어요. 일단 빨리 저택부터 가시죠.”


“예, 그러죠.”


나는 브로디 씨와 함께 저택에 도착했다. 빨간 벽돌로 높게 쌓인 벽 위로 검은 창문 몇 개가 활짝 열려있었다. 앞마당도 꽤 넓었다.


저택으로 허겁지겁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아차 싶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전부 좋지 못하였다. 저택 내부 큰방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숨 쉴 공간도 없이 빼곡하게 찬 인파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사람들의 우는 소리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브로디 씨의 표정은 거의 울상이었다. 아니, 사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아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무겁게만 짓누르는 불길함을 무릅쓰고 눈물을 참아내는 중이었으리라. 내부 공기는 잿빛이었다. 많은 사람의 울음은 기괴하고 무거웠다. 살아생전 이런 울음을 들어본 적이 있을까, 싶었다. 오래된 나무 바닥은 밟을 때마다 이리저리 틀어지며 삐걱거렸다.


“돌아가신 듯한데요.” 내가 말했다.


브로디 씨는 말없이 사람들을 뚫고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들리는 울음 섞인 사람들의 소리는 조금 시끄러웠다. 난 도저히 숨을 못 쉴 것 같아서 저택 입구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브로디 씨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많은 사람이 관을 들고 뛰어왔다. 그중에는 신부와 수녀들, 그리고 의사들도 있었다.


저택은 말 그대로 울음바다였다. 곧 브로디 씨가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의 옆에 에버린 씨와 몇몇 다른 사람들이 따라 나왔다.


“오늘 새벽부터 갑자기 의식이 없으셨어.”


“이렇게 일찍 가실 줄이야….” 그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으나, 난 더 이상 엿듣기를 관두었다.


저택 둘레를 두르는 여러 개의 기둥에 햇빛이 드리우며 기다란 그림자를 자아냈다. 시곗바늘은 오전 여덟 시 정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많은 인파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속에는 뚜껑이 닫힌 관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장례식을 하려는 것이었다. 난 입구 옆 발코니 의자에 앉아 멀리서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우글댔다. 그 뒤로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장의사가 파낸 땅에 묘지를 옮겨 넣었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의 울음은 멈출 기미를 안 보였다. 지루해진 나는 사람들을 한번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사람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와 어깨 위로 눈이 계속 쌓였다. 나는 사람들을 계속 둘러보았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설마…, 설마…, 어? 어라, 로즈…?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계속 주시했다. 로즈가 정말 맞을까? 로즈와 관련된 기억을 전부 끄집어냈다. 금빛 반묶음 머리…, 순식간에 몸이 반응하는 걸 보니 로즈가 틀림없었다. 얼굴과 아담한 키부터 걸어가는 모습까지 모든 게 그녀가 로즈가 맞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장례식 인파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곧바로 발코니에서 뛰쳐나와 그녀를 쫓았다. 사람들의 인파를 뚫어야 했다.


“다니엘?” 사람들이 나를 붙잡았다.


나는 아니라고 하며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난 상관하지 않고 로즈를 찾았다. 계속 찾았다. 이번엔 정말이겠지, 되뇌며 그녀를 쫓았지만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 누군가가 내 손목을 꽉 붙잡고 인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 방향은 로즈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이었다. 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그 힘은 생각보다 셌다. 브로디 씨였다.


“이거 놔!” 내가 소리쳤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브로디 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뒤를 돌아보니 장례식은 이미 어수선해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눈으로 보려고 했던 것은 그 사람들 사이로 점점 멀어져 가는 로즈의 뒷모습이었다. 어느새 로즈는 보이지 않았다.


“꽃밭 근처에 꽃집이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예?” 브로디 씨는 당황했다.


“절 그곳으로 데려다주십시오. 길만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부탁입니다.”


“뭐라고요? 이곳에 오신 이유를 잊으셨습니까?”


“잊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를 뿐입니다.” 내가 말했다.


“당신은 하젤 부인을 행복하게 해 드리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브로디 씨가 소리쳤다. “본 목적을 흐리지 마십시오. 정신 좀 차리란 말입니다!”


“1927년 9월은 말입니다, 제가 기억을 전부 잃고 잠에서 깼던 날입니다. 이때 이전으로는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내 목소리가 어제의 브로디 씨처럼 떨리고 있었다. “저는 기억상실증에 정신병까지 달고 살아온 미친 사람이란 말입니다.”


1927년 9월이라면 지금으로부터 1년 하고도 3개월 전이다. 난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첫 기억이자 모든 게 혼란스러웠던 ‘기억의 날’은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다.


브로디 씨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안 믿으시겠지만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쭉 각박하게만 살았습니다. 교도소도 다녀왔습니다.” 내가 말했다. “저도 행복하고 싶습니다. 저기에 그 열쇠가 있는데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하젤 부인은 이미 별세하셨으니 이제 당신 부탁은 끝이 난 것 아닙니까?”


그레이스가 죽고 내가 금발 머리를 총으로 쐈던 일, 로즈가 정말로 죽은 줄 알고 큰 절망감에 휩싸였던 일, 올리브가 나를 살리려 코번트리 백작과 함께 달리는 열차로 몸을 던졌던 일, 그 일의 여파로 교도소에 수감 되었다가 나온 일까지. 전부 1년 동안 내게 일어났던 일이다.


“당신은 감정이란 게 없는 사람입니까?” 브로디 씨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아니, 이기적 테두리에 갇혀 남 사정에는 하등 공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겠군요.”


“감정은 있습니다만, 단지 제가 하젤 부인의 죽음에 눈물을 흘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것뿐입니다. 이제 저는 제 행복을 좇을 겁니다. 그것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감정이란 게 있는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갈구하던 일상이었다. “하젤 부인 일은 유감입니다.”


거센 바람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푸른 소리를 내며 제각각 흔들렸다. 브로디 씨는 나를 계속 노려보았다. 난 그렇게 꽃집으로 가겠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에게 알려줄 마음이 없다면 내가 찾겠다고 말했다. 그의 손을 뿌리쳤는데도 그가 힘을 주고 꽉 잡아서 떨어지지 않자, 나는 조금의 무력을 사용하여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브로디 씨는 자기 손을 움켜잡으며 짧은 신음을 냈으나, 난 그를 뒤로하고 꽃집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로즈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닐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그리고 난 계속해서 도버를 돌아다녔다. 꽁꽁 얼어붙은 길거리에서는 빠르게 걸을 수가 없었다.


너무 구석구석 돌아다닌 덕분에 길을 잃고 울고 있던 어린아이도 만났고(엄마를 찾아주지는 않았다), 길거리에서 하모니카를 부는 노숙자(자신의 이름을 휘게라고 소개했으나 딱히 궁금한 사실은 아니었다)도 만났다. 그러나 끝끝내 꽃집과 로즈는 찾지 못하였다. 하루 종일 도버를 돌아다녔다. 이성은 이미 로즈가 도버에 있을 리 없다고 외쳤으나, 눈앞에 보이는 저 골목만 돌면 로즈가 거리 한 가운데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점심과 저녁도 쫄딱 굶었다. 결국 날이 지고 온도가 점차 내려가자, 마지막 열차를 남겨두고 나서야 다시 도버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돌아오는 열차에선 창밖에 눈을 떼지 못하였다. 멀어져 가는 도버를 보며 곧 다시 오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도버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참 로즈 생각을 했다. 로즈는 잊기로 한 게 아니었던가? 로즈 없이 살아오면서 그녀가 없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정신 승리를 해왔고, 실제로 그렇게 느꼈으면서, 그것들은 전부 착각이었던 것인가? 어째서 로즈 이야기를 듣자마자 도버로 한걸음에 달려오는 실수를 저질러 버린 것인가? 하젤 부인의 장례식을 망친 책임은 그렇게 잊어버리면 된 것인가?


시간이 조금 흐르고 이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도피>를 꺼냈다. 열차 안을 들쑤시는 붉은 노을에 공기마저 불그스름해진 듯한 곳에서 현실에 지쳐 도피를 강행하는 어느 극작가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소소하지만 고요했다. 덜컹거리는 열차 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증기기관 내뿜는 소리는 종잇장 넘기는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귓구멍으로 들어와 마음을 자극해 댔다.


육체적 도피와 정신적 도피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하여 몸을 피한다면 최소한 안정은 확보되는 셈이지만 마음만 도피하는 것은 쉽게 말해 안정 속에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같다. <도피>의 주인공인 어느 극작가는 그것을 깨닫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국에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가 큰 변화를 보여주진 못했다. 옛 동료들이 너무 그리워 뿔뿔이 흩어진 뒤에도 그들을 잊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정착하며 자신을 잊은 그들을 오히려 원망스러워 한 그 극작가에게, 나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를 과거에 얽매인 채 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집에 틀어박혀 옛 기억만을 대본으로 적어내며 망상 속에서 정신적 도피를 감행한 그가 잘 버텨낸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렇게 살아가는 걸 버틴다고 하는 게 맞나?


외로운 현실에 옛 기억조차 없는 게 지칠 때가 많다. 좌절감에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지만, 결국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그렇다고 하지만 그 과정을 버티지 못해 끝내 무너지는 것은 내겐 큰 악영향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오후 8시 38분에 열차는 킹스크로스역에서 멈춰 섰다. 로즈를 가까이서 보지 못했고, 그것에 정신 팔려 도버 참사에 대한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다시 도버에 방문할 생각이었다. 로즈가 살아있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그것이 진짜 로즈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삶의 목표가 생긴 것도 그때쯤이었다. 조만간 도버로 다시 갈 생각이었다. 로즈가 그곳에 있다는 희망이 생겼으니 도버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집 앞에 다다르자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리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런던,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는 끔찍한 곳이다. 매캐하게 코를 찌르거나 맡기만 해도 어지러운 냄새는 아니었으나, 이제는 벗어나고 싶은 지옥 같은 매일의 냄새였다. 현관문을 열었다. 소름 돋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고작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이렇게 기괴했던 적이 있던가.


행복은 고집할 만한 것이 못 되는가. 이윽고 쌓여가는 불안감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는 인상이 바뀌는 듯하다. 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장발이라는 작자가 거실 한가운데에서 보란 듯이 목을 매고 죽어있는, 내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그가 남긴 빛바랜 쪽지에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한 문장이 쓰여있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다니엘.


그게 끝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말이 안 나왔다. 진짜 자살한 건가? 무책임하게 죽었으니 지옥에나 떨어져라. 아이고, 나도 미쳤지.


난 그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졸음이 몰려왔다.


그다음 날엔 아침을 먹지 않았다. 두통과 지독한 몸살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허겁지겁 점심으로 하루 첫 끼니를 때웠다. 아침을 먹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어제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에 아침을 먹을 시간에 자고 있었으니까. 정오를 넘기고야 강렬한 햇빛에 겨우 눈을 뜬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창문을 열고 거리를 훑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은 전부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맞다, 이곳은 도버가 아니지. 꿈에서조차 로즈를 찾아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탓에 이런 기행을 펼친 것이었다. 조용히 창문을 다시 닫았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꿈을 꾸면서 꿈이란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장발의 자살도 큰 충격이었다. 그가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 고작해야 도버에 가기 전날, 도버에 가지 말라는 장발과 크게 다툰 것뿐이지만, 그것은 자살 이유가 못 된다. 그가 남긴 쪽지는 또 무엇인가? 거짓말해서 미안하다니, 이런 무책임한 말은 살아생전 본 적이 없다. 무언가 마음에 찔리는 게 있는 걸까? 그것이 너무나 중대하고 내 인생을 완전히 망쳐놓았기에 미처 말하지 못하고 떡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너무 늦은 사과가 아닌가? 우리는 킹스크로스역에서의 첫 만남부터 잘못되었으리라. 우리는 시작부터 꼬여버린 것이었다.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그의 시신을 내리지 않은 채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잠에서 일어났을 땐, 끝까지 그의 시신을 내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점심을 다 먹고 난 뒤에는 전등이 비추는 방에 틀어박혀 기껏해야 1년 남짓인 인생을 되짚어 보았다. 기억을 되짚어 지금껏 느껴왔던 감정들을 깊숙한 곳에서 다시 끄집어냈다.


1927년 9월, ‘기억의 날’, 새로운 기억이 시작되던 그날에 나는 무엇을 했던가? 고작 사과 하나에 무작정 달려간 기차역에서 나는 누구를 조우 했던가? 살인? 그것은 정당했던가? 그레이스의 죽음은 조금 슬펐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감정 따위를 느낀 것은, 그 이후였다. 그전까지 죽음에 대해 아무 감정도 없어서, 그저 인형처럼 장발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던 내가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터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정이란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자마자 우울증에 걸려버린 것, 그게 나였다.


인생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났던 세인트 케이든 연회는 어쩌면 큰 전환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끝은 아름답지 않았지만, 주변의 따뜻한 관계, 그 사람들의 존재를 내게 알려준 것만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으니까.


하나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버린 탓에 그들을 전부 기리기에도 벅찼다. 나는 가끔 스스로를 저주라고 생각하곤 했다. 나를 만났던 사람은 전부 죽어버렸으니 이것이 저주가 아니라면 나 자신의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이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남은 것은 후회뿐이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걸려있는 장발의 시신에서는 악취가 나지 않았다. 빈트 씨는 언제 돌아갈지 모르고, 장발의 시신마저 내린다면, 이제는 정말 혼자가 되리라, 생각했다.


어제 로즈를 찾지 못했다는 절망 그뿐이었다.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었다. 소망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듯했다. 그때 마지막 열차를 타는 게 아니었어. 그곳에서 밤새더라도 끝까지 찾아볼걸. 나는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행복으로 찬 미래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갈까.


마음은 암울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루 종일 로즈 생각을 했다. 가슴 깊이 나를 탓하며 끝없는 후회에 사로잡혔다. 나는 계속 되뇌었다, 로즈가 아직 죽지 않았어. 그저 도버로 간 거였어. 그런데,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도망치듯 가버린 거지? 날 피해서 도망친 건 아니겠지.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라는 것은 허무함과 무의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라는 것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라는 것은…, 나는, 아….


그때 난 눈을 뗄 수 없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장발과 똑같이 변해버린 것이었다. 눈은 새까맣게 깊어져 가고, 피부는 혈색을 잃어버렸다. 여전히 등 뒤로 걸려있는, 목을 맨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군 장발의 시신. 그 시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것이 현실인가? 나는 누구지? 난 악몽을 꾸었으리라.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속에는 인간성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이 변모를 억눌러야 하는 고통을 앞으로 어떻게 견뎌내지? 이제 내 인생은 답이 없으니 하루빨리 자살하라는 하늘의 뜻인가? 애초에, 살아가는 목적이 뭔가? 그것이 정녕 로즈였다면, 로즈가 없는 지금, 나는 자살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 목적이 로즈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나는 싸늘하게 식은 장발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모습은 똑같았다. 나는 그 사실을 혐오했다. 동시에 그를 혐오했다. 그의 얼굴은 나를 향해있었다. 그는 이미 죽어 미동도 없었지만, 난 그가 살아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그저 어느 미친놈의 시체일 뿐이었지만, 나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본질적 자아. 즉, 클로드는 이미 죽은 것이었다. 나는 어느새 그의 이름이었던 다니엘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 똑같다고 말해주었다. 어느새 우린 서로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었다.

이게 진짜 사람이 미쳐가는 과정인가? 시신을 올려다보며 그와 눈빛을 주고받는 게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지.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 나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손이 벌벌 떨렸다. 이게 정말 내가 미쳐버린 나머지 헛것을 보는 거라면?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까마귀 우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날카로운 소리가 날 제정신으로 되돌려놓았다. 거울을 다시 보니, 정상적인 내가 되어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거실에 매달려있는 장발의 시신은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웃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목을 조르는 밧줄이 빙글 돌자, 그 시신이 왼쪽으로 조금씩 돌아갔다. 숨이 거칠어졌다.


탁한 공기 속에서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더 이상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정신상태가 무너지고 있었다. 로즈의 환영이 기억 이곳저곳을 들쑤실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정말 왜 사는가? 조금 전 나는 고통 속에서 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조금 과격했을 뿐,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집안을 들쑤시며 로즈와 관련된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서랍에는 빈 향수병과 다 쓰지 못해 변색 되어 찰랑거리는 향수들이 서로 뒤엉켜있었다. 아직 하나도 버리지 않은 것들이었다. 로즈가 선물했던 화분(꽃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로즈가 거슬러줬던 동전, 내가 손수 갈아준 로즈의 낡은 시곗줄, 그리고 로즈의 시계가….


로즈의 시계…, 로즈의 시계…, 어?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듯한 충격에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랍을 뒤졌다. 없는 걸 알면서도 뒤졌던 서랍을 열어서 또 뒤졌다. 그 시계를 잃어버리다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불안해졌다. 내 머리를 쥐어뜯다가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머리가 아프기보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서랍에 쌓인 고장 난 시계들만 따가운 금속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서랍을 뒤지는 내 손가락을 긁었다.


거실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장발의 시신을 여태 매달던 줄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기다란 머리칼을 흩뿌린 검은 시체가 거실 한가운데에 엎어졌다. 마치 꿈틀거릴 것만 같았다. 덜컥 겁에 질렸다.


시계를 어디에 둔 거지? 누가 들어와서 가져갔을 리는 없고, 분명 밖에 가지고 나간 적도 없는데…. 분명….


아, 크리스마스이브.


로즈를 쫓을 때 그녀에게 주려고 챙겼었지.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천천히 심호흡했다.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날 끝내 로즈를 따라잡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피에르의 생가에 가서 빈트 씨를 만났었지.

차라리 그곳에서 잃어버린 것이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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