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본질]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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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겨울.
양초에서 타오르는 불씨가 연신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스란히 올려둔 책상 위 양초는 어느새 절반 이상이 녹아내린 탓에 그 밑에는 촛농이 쌓인 채 굳어 마르고 있었다. 한산한 심야 시간,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추운 겨울은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살짝 열어 둔 창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꺼질 듯 흔들리는 촛불은 끝까지 꺼지지 않고 버텨냈다. 남자는 글을 쓰다 말고 하나의 그 아슬아슬한 상황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자고로 가장 강렬한 영감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는 남자가 어느 날부터 범죄에 손을 댄 유일한 이유였다.
3년 전, 그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고양이를 죽인 것은 분명한 실수였다. 그러나 순간에 그는 죄책감과 더불어 생명체를 죽였다는 느낌과 세세한 감정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그 뒤로 그는 영감을 위한다면 살인 따위 서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범죄에는 이유가 따르지만, 그의 범죄는 특이하게 범죄 자체가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경우였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영감을 곧이곧대로 자기 소설로 재구성하여 옮겨 적었다. 때문에, 그는 대부분 일인칭의 어두운 내용이지만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와 뛰어난 연출에 특출난 재능을 보여 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소설가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필력에 홀려버린 독자들은 남자가 그런 일을 벌이며 소설을 쓴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다음 신작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으리라.
남자는 그가 3년간 써온 소설의 마지막 장을 써서 마침표를 찍으려던 참이었다. 저번 주 월요일, 마지막으로 합류한 세 명까지 합하여 남자의 소설은 열두 명이 스며든 채 완성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소설은 3년 동안 살인사건이 급증해 공포에 떨고 있는 런던 시민들에게 한줄기 힘이 되어주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글이야. 이리 생동감 넘치는 글은 언제나 새로울 뿐일세.” 남자는 자신이 써 내려간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스스로에 대해 감탄했다. “세상을 멈췄던 흑사병도 내겐 소재에 불과하지.”
“생동감이라는 그 단어, 보기보다 무서운 단어였군, 그래.” 옆에 있던 남자의 오랜 사업 동료인 인쇄업자가 대꾸했다. “흑사병은 끝난 지 오래네, 친구.”
그 역시도 남자의 소설 내용은 전부 알고 있었지만, 그의 범죄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간간이 소설을 쓰는 남자는 지금까지 이 인쇄업자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남자는 소설을 쓰며 돈을 벌었고, 인쇄업자는 책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남자에게 책 판매 수입의 일부를 받았다. 전형적인 사업관계였다.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는 영감은 쉽게 가시지 않기 마련일세. 생동감이란 더욱 그렇지.” 남자가 황홀한 무언가에 홀린 듯 말했다. “흑사병으로 겪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흉내밖에 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표정이 안 좋군, 자네.”
“흑사병이 쉽게 가시지 않긴 했다만, 그것에서 영감을 뽑아내는 자네가 조금은…, 뭐랄까…,”
“괜한 걱정 하지 말게. 부자의 삶을 글로 써내려면 닷새라도 부자의 삶을 직접 살아봐야 한다는 말일세.” 인쇄업자의 겁먹은 얼굴을 잠시 확인한 남자가 그를 안심시켰다.
인쇄업자는 잔뜩 낡아 당장이라도 다리가 떨어질 것 같은 안경을 고쳐 쓰며 괜히 헛기침했다.
남자와 10년을 알고 지내며 그를 조금이라도 경계하게 된 것은 남자와 사업관계를 맺기 위해 처음 만날 때, 혹여나 그가 사기를 칠까 봐 경계했던 적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번 소설도 곧 마무리될 것 같으니 다음 달에 당장 출간하고 사업관계를 끝내는 것은 어떠한가?”
인쇄업자는 이번 소설을 인쇄하여 출간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와의 사업관계를 마무리 지으려는 생각이었다. 예술에 미쳐버린 이에게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었다고 생각했으니까.
인쇄업자는 삶과 죽음이 주가 된 남자의 소설을 늘 곁에 두고 살면 자신이 내적으로 어두워져 버릴까 걱정됐다. 사실 인쇄업자가 남자의 집에 찾아온 이유도 이 말을 전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려던 참이었네. 더는 영감이 들어갈 곳이 없거든.”
“영감이라….”
갑자기 생소하게 들리는 단어였다.
인쇄업자는 생각했다. 남자를 만난 이후로 자신에게 있어 ‘영감’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변질하지는 않았는가. 그가 밤낮 가릴 것 없이 떠들어대던 단어였기에 더욱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더 이상 이런 일에 동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세. 돈을 못 벌어도 상관없소.”
그의 영감 이야기와 깐깐한 성격에 지칠 대로 지친 것도 인쇄업자의 파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작 돈 벌자고 이런 짓을 해온 건 아니었으나…, 자네는 잘 모를 수도 있었겠군. 예술의 세계란 어려운 것이거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거까지 하지.” 인쇄업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소. 실은 나도 여기서 슬슬 그만둘 생각이었네.”
“입만 아플 뿐이지.”
“하하, 틀린 말은 아니군.” 남자가 폭소를 터뜨렸다.
둘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상큼하고 깨끗한 공기의 냄새가 나는 눈은 거리에 잔뜩 쌓여 온 세상을 하얗게 칠했다.
두꺼운 코트를 껴입은 인쇄업자는 너무 추워 감각이 둔해지는 자기 귀를 보고서야 두꺼운 털모자를 자기 집에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남자는 투덜거리는 그를 배웅하려 함께 마당까지 나왔다.
“잘 가세. 루카스처럼 후회 없는 밤이 되길.” 남자가 말했다. “암, 후회 없는 밤이 되어야지.”
“잘 있게. 근데 루카스가 누구요?”
“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말일세. 항상 일의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후회하곤 하잖소.”
“하하, 참 매력적인 인물이었지. 마무리란 곧 하루의 마무리인 숙면을 뜻하는 것이겠지?”
남자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곧, 손을 흔들며 뒤돌아선 인쇄업자의 뒤통수를 벽돌로 찍어 내리기 전까지는.
인쇄업자는 눈도 감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엎어져 죽어버렸다.
“…그만둔다고 하기엔 정말로 입만 아플 뿐이었네. 아직 소설의 결말을 쓰지 못했으나, 스스로 루카스가 되긴 싫었소. 후회 없는 밤이 되어야지 않겠나.”
남자는 인쇄업자의 뒤통수를 내려찍을 때 온 정신을 집중하여 그 느낌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손끝의 감각, 팔의 떨림, 공기를 가르는 묵직한 벽돌의 무게까지 기억하려 했다.
사실 그의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완성도 높은 결말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벽돌로 찍어내려 죽이는 장면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남자는 차갑게 얼어붙은 인쇄업자의 시신을 치우지도 않고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 머릿속으로 그 찰나의 순간에 느낀 모든 것으로 소설의 마지막을 써 내려갔다. 오감을 동원한 모든 것을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할 수 있었다.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는 영감은 쉽게 가시지 않기 마련이니까. 생동감이란 더욱 그렇고.
남자의 소설은 이제 열세 명이 스며든 채 진정한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의연히 첫 장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하이드> 원고.’
‘피에르 아르튀르 록시 지음.’
피에르는 그렇게 또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
며칠 뒤, 피에르는 <하이드>의 원고를 산 깊숙한 곳에 있는 자신의 오랜 생가에 꼭꼭 숨겨두기로 했다.
새로운 인쇄업자를 찾을 때까지 책을 출판할 수 없었다. 까다로운 그와 마음도 맞고 온전히 모든 시간을 자신에게 투자할 수 있는 인쇄업자를 찾는 것은, 까다롭고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기에 당분간 숨겨두기로 한 것이었다. 약 백 쪽 분량의 원고지에서는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알 수 없는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주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은 생가로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는 추억에 젖어 들었다. 공기와 섞여 코를 스치는 희미하지만 익숙한 향기가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눈앞에 오래된 생가가 펼쳐지자 그것은 정점에 다다랐다.
“맙소사…. 아직 그대로구나.” 피에르는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을 뱉어댔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섞인 복잡한 의미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느낌의 영감을 의외의 곳에서 받은 느낌이었다. 그의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추위가 조금씩 떠나고 슬슬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라지만 아직은 추웠다. 피에르는 문을 열고 생가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레인지에 불을 지폈다. 아직도 작동하는 레인지에서 시작된 온기는 금세 부엌을 가득 채웠다.
피에르가 생가를 찾은 건 원고지를 숨기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거주지에서 살인을 저질렀으니 당분간은 숨어 지낼 곳이 필요했다.
고작 하나의 영감과 살인을 맞바꾼 것을 후회하는가? 피에르는 후회하지 않았다. 경험하지 않고서는 영감을 얻을 수 없는 법이니까. 그에겐 고작 영감일 뿐도 아니었다.
5여 년 동안 방치된 생가였지만 아직 멀쩡하여 여기서 몇 년은 더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피에르는 경찰이 곧장 자기 집에 찾아올 것을 생각하고 몇 달은 묵었다가 가도 될 것이라, 판단했다.
“시설 좋은 곳에서 잠깐 노숙한다고 생각해야겠군. 이런 경험도 작가에겐 뜻깊지.”
레인지 위의 불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피에르는 생각에 빠졌다. 사실 <하이드>를 완성하기 전에 한 가지 해야 할 것이 남아있었다. <하이드>는 주인공 루카스가 지난 40년을 돌아보며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곳에서 루카스는 흑사병과 싸우며 홀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피에르에게는 그 40년이 필요했다.
정확히 40년. 40년 뒤 크리스마스에 끝을 내겠노라, 그는 생각했다. 피에르가 원고지가 든 상자를 두꺼운 이불로 돌돌 말아 이불장 가장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다. 그에게 40년은 그렇게 긴 세월이 아니었다. <하이드>를 잊고 살다가 40년이 지나 책을 끝내는 설렘과 기억의 잔재를 하나씩 꺼내 드는 것. 그것이 피에르가 원하던 것이었다. 자고로 예술이란 조금 미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광기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무용이든, 문학이든 그것들은 예술이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서 항상 신비로운 존재감을 뽐내며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뭐든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걸작은 그렇게 완벽한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세상에 나오기 위해 번데기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
“일주일만이네요. 도버 참사에서…”
“이제 압니다.”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다행이네요. 조사 좀 해오셨나 봐요.”
1929년 1월 8일. 자칭 예술가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서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오래되었더라도 기억나는 일은 하나씩 있죠.” 내가 말했다. “장발에게 이야기해야겠어.”
“장발이요?” 자칭 예술가는 내가 하는 혼잣말까지 놓치지 않았다. “어머 이 사람 봐라 웃긴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자칭 예술가는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조용히 중얼거리며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대놓고 이기죽거리는 그 태도는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정신 상태에 이상 있음….” 그가 펜으로 메모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일부러 내가 듣게 말하는 태도였다.
“흠.”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넘겼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내게 이상한 말들만 늘어놓고 상대방의 기분 따윈 고려하지 않는 그는 내가 지금 꽤 흥미로운 것을 마주한 상태라 화를 내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만약 장발이었다면 곧바로 화부터 냈을….
“아악…!”
자칭 예술가는 갑작스레 옆에서 성큼성큼 다가온 장발에 의해 멱살을 잡힌 채 들어 올려진 채 건물 외벽에 강하게 등을 부딪쳤다. 아, 세상에. 그의 짧은 비명이 잠깐 들렸고, 장발의 모습은 흡사 그를 꽁꽁 싸매어 옥죄이는 커다란 뱀이었다.
잠깐, 장발…? 지금까지 어디 갔다가 온 거지?
〚말하지 마. 도버 참사 얘기 꺼내지 마.〛 장발은 매우 얼떨해하는 자칭 예술가에게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나한테 리볼버 있어.〛
“이건 또 무슨 특이한 미친놈인가?” 자칭 예술가가 되레 화를 내었다.
장발은 강렬한 첫인상으로 지켜보는 나까지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자칭 예술가는 서둘러 수첩에 이상한 걸 적더니 도망가듯 황급히 자리를 떴다.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고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느라 눈을 꽉 감은 채로. 오랜만에 장발과의 조우에 반가움보단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느낌이 앞섰다. 대체로 평화로웠던 날엔 늘 그가 없었으니까.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의 과거를 알고 난 뒤에 그 사람을 다시 보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생생하고도 끔찍했던 그 꿈 한가운데에 장발이 있었기에 그 일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확신한 지는 오래였다. 1년 전, 정신을 잃고 발프 병원에서 깨어나기 전에 꾼 그 꿈 말이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꿈.
〚‘급발진 경향 있음.’… 축하한다.〛
“음?”
〚수첩에 그렇게 쓰더라.〛
“저 사람이?”
〚응.〛
“그렇구나.”
평소같이 장발을 적당히 무시해 가며 지나치려 했지만, 갑작스레 떠오른 그날의 기억은 장발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화재 현장 속에서 절규하던 그의 모습은 몇 년이 지나더라도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근데 리볼버 갖고 있다고?”
〚아니. 거짓말이었는데?〛
“미쳤냐?”
〚지금은.〛
“지금은?”
〚완전 처음부턴 아니지.〛
“너는 누군데?” 그의 진짜 정체성을 알고 싶었다.
〚…오랜만이라지만 처음 건네는 인사말이 내가 누구냐고? 너도 참 멋지다.〛
…그도 질문의 의도를 알고 있었을 거다. ‘너’라는 단어를 특히나 강조해서 말했으니까. 간접적으로 대답을 피하는 어투였다.
“진짜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넌 대체 어쩌다가 이 꼴이 나버린 거지?”
〚나 춥다. 들어가자.〛
“…다니엘?”
정적이 흘렀다.
〚잘 아네.〛
장발은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더 이상 그에게 어떠한 대답을 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상상과 꿈의 차이는 그것이 허구임을 의식하는가, 못 하는가이다. 오로지 내 머릿속에서 내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상상은 이미 허구라는 전제하에 시작되기에 몰입하기 힘들다. 하나 꿈은 그 순간에 그것이 허구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나 꿈은 상상과 다르게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온갖 비현실적인 일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나’는 이미 계획된 꿈을 연극 보듯이 관람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허구임을 알지 못하기에 그동안은 온전한 몰입이 가능하다. 남들은 말이다.
내게 꿈이란 잠을 자면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하나의 공간일 뿐이다. 매일 같이 꿈을 꿀 때면 낮과 밤을 주기로 다른 세상에 오가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 날부터, 남들과 다르게 꿈이 허구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악몽을 꿀 때면 잠에서 깨며 꿈이었음을 깨닫고 안도할 필요가 없다. 악몽을 꾸는 동시에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니까.
이따금 장발은 내게 꿈 이야기를 들려줬다. 행복한 과거로만 가득 찼다는 그는 잠을 자고 일어날 때마다 지금까지 본인이 보고 느낀 것이 전부 꿈이었다는 사실에 늘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그의 입을 통해 내 귀로 전달되는 방식이다.
〚그런 적 없어.〛
“있잖아.”
〚아니야.〛
장발은 내가 그에게 그 꿈(도버 참사)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언제나 부정해 왔다. 내가 기억을 몽땅 잃어 스스로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음을 교묘하게 이용하듯이 기억해 내거나 증명할 수 있으면 어디 해보라는 투다. 정말 희박한 확률이라도 내 기억이 돌아오면 어쩔 거냐는 말엔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자신 있게 주장하는 그였다. 그리고 꿈은 현실과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자칭 예술가가 아니었으면 도버 참사조차 모르고 살았을 거잖아.〛 장발은 똑같은 궤변을 반복했다.
매일 똑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느라 약간의 안정과 지루함을 동시에 느끼던 요즘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좋은 게 아니었다. 장발은 다시 이 집에서 살았다. 언제부턴가 피에르의 소설들을 읽고 있었다. 하기야 예전부터 그렇게 읽었다는데,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더 힘들겠지.
요즘 들어 시계를 들고 나를 찾는 손님이 많아졌다. 재정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끼니를 굶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다시 안정을 되찾은 이상 커다란 일에 다시 휘말리지 않기를 빌어야 했다. 앞으로 또 누군가 죽는 일이 생기는 등 나의 일상이 처참히 무너지면 그땐 정말 감당이 힘들 듯 보였다. 그만큼 지쳤다.
가끔씩 빈트 씨와 편지를 통한 교류를 해왔다. 그는 언제까지 런던에 머무를 거냐는 말에 이제 곧 런던 여행을 마치고 리버풀로 돌아갈 예정이라 답했다. 호텔비가 없어 폐가로 들어가 생활하는 그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지나 모르겠다.
꿈을 꾸는 날엔 항상 집요하게 목표로 삼는 것이 있다. 매일 같이 자각몽을 꾸는 탓에 장발이 꿈에 나올 때면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그가 나오는 꿈은 항상 도버 참사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 나로 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꿈이 끝나면 곧장 장발에게 달려가 이것저것 캐묻는다. 그것의 반복이다. 그러나 장발은 순순히 대답해 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