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본질]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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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네요.”
“예?”
“반가워요. 몸은 어때요?”
“아…, 누구…?”
“몸은 어때요?”
“갑자기요?”
“몸은?”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군요.”
1928년 12월 31일. 웬 이상한 사람이 나를 불쑥 찾아왔다. 그러고는 연신 괜찮냐는 말과 더불어 뜬금없는 안부를 물었다. 물론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려다 말고 내게 권했다. 나는 거절했다. 그는 마음대로 하라며 자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당신을 보러 아주 멀리서 달려왔습니다. 협조 좀 부탁드려요.” 그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머리 자르셨네요. 근데 얼굴은 안 늙었네.”
“멀리서요?”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긴 했죠. 하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으셨잖아요.”
“예? 세인트 케이든 테러 사건요?”
“음, 아뇨.”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경찰이세요?” 내가 물었다.
“아뇨, 그냥 예술가라고 해두죠.” 그는 어지러울 정도로 급하게 말하는 그는 꽤 답답한 사람이었다. “내일이면 새해잖아요. 해피 뉴 이어! 새해를 맞아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침묵으로 대응했다.
“죄송해요. 많이 당황하셨을 거 알아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도버 참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당신에게 약간의 영감을 받고 싶어서요. 사실 새해고 나발이고 이거 때문에 왔어요. 당신을 찾아오기까지 꽤 고생했다고요.”
“도버 참사요?”
“네.”
“에?”
“맞아요.”
“예?”
“설마…, 잊어버린 거예요? 세월아, 야속하기도 하지. 벌써 5년이 다 되어간다지만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오, 신이시여….”
지금 보니 그는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이상한 사람이었다. 자칭 예술가는 계속 내가 5년 전, 도버 참사의 유일한 생존자였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1년 전에 꾸었던 꿈을 겹쳐보았다. 난 장발의 과거를 듣고자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정말 잊은 거예요?” 그가 촐싹거리며 물었다.
“네.”
“정말?”
“네. 잊었습니다. 계속 이야기해보시죠.”
“정말?”
“네.”
“오, 이런! 안타깝지만 당신에겐 질문을 해도 답변을 받을 수가 없겠군요! 다른 생존자를 찾아가야겠어요.”
그는 보기 좋지 않을 정도로 표현이 과했다.
“제가 유일하다고 하셨잖습니까.”
“…아, 맞습니다. 잘 아시네요. 사실 막 정신이 오락가락해요. 정신과 혼을 하나로 묶는 그것이 예술가니까 이해 좀 해주시죠.”
미친 새끼.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뱉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한숨을 내쉬면서 배출해야 했던 이산화탄소가 몸속에 쌓이는 느낌과 함께 답답함을 자아냈다.
“잠시만요….”
그는 매고 있던 작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잔뜩 구겨진 조각 신문을 내게 건넸다.
[신문 기사 / 1924년 3월 19일 자]
「도버 참사 : 도버에 위치한 도서관에서 화재 사고 발생. 사망 36명, 부상 1명.’」
신문 내용은 내 이목을 끌만했다.
“제가 본문 내용은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런데요, 당시 도서관에 있었던 사람이 서른일곱 명이었어요. 유일한 생존자는 바로 그쪽이고요.”
난 곧장 집으로 들어가 곧바로 옷장을 뒤졌다. 작업실 책상 서랍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는데. 그것은 이사벨이라는 사람의 편지였다. 연회 날, 연회에 가기 전에 옷을 입다가 발견했던 편지였다. 내가 다시 이 편지를 다시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니엘, 잘 지내고 있어? 소식을 전혀 전해 들을 수 없어, 어떻게 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여기는 좀 어수선해. 며칠 전에 공장주가 죽어서 공장이 이제 문을 닫거든. 그 사실 말고는 공개된 게 없어. 좀 충격적이지만 어쩌겠어.
내일이면 드디어 만날 수 있어 좋다. 돈은 내가 열심히 벌어놨어. 오랜만에 보려니 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야. 오늘 저녁에 바로 도버로 출발할게. 안녕.
1924년 3월 17일. 이사벨.
바로 직접적으로 도버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점, 그리고 이 편지가 도버 참사가 있었던 이틀 전인 3월 17일에 쓰인 편지였던 점.
자칭 예술가가 옆에서 편지를 엿보았다. 그러나 그는 훤칠한 키 때문에 허리를 과도하게 숙여야 했다.
“맞네, 맞아.” 자칭 예술가가 담뱃불을 끄며 말했다.
“이거였습니까?”
“네?”
“장발이 도버를 떠나기 전 겪었던 일이 이거였습니까?”
“장발이 누구죠?”
“아.” 나는 부담스럽게 얼굴을 들이미는 그를 손으로 밀어냈다. “누구도 아닙니다.”
그렇게 두 손에 편지를 꼭 쥔 채 자칭 예술가를 뒤로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자칭 예술가는 그렇게 내 집 앞에서 한참을 멀뚱멀뚱 서 있다가 돌아갔다.
현재 런던은 영감에 굶주리는 예술가(자칭 예술가도 이 부류였다)들로 북적이는 곳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에서 영감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이렇다 할 작품을 만들고 이름을 널리 알리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 위화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빈트 씨는 이미 리버풀에서 영감을 찾아다니는 예술가들의 시초가 되는 것은 분명했다. 다른 지역에서 온 그가 런던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 순 없지만 분명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알고 있죠. 이미 그것을 주제로 노래까지 만든 적이 있는데요.” 빈트 씨가 말했다.
자칭 예술가에게 도버 참사에 대해 전해 듣고 곧바로 빈트 씨를 찾아갔다. 다시 한번 런던에 방문했다는 빈트 씨(그는 길거리 시민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어떤 대단한 무언가를 한 듯했다)가 머물만한 호텔을 전부 수소문한 끝에 그를 찾아내느라 꽤 힘이 들긴 했지만, 다행히 집에서 도보로 약 십 분 정도 걸리는 멀지 않은 호텔 303호에서 빈트 씨를 만나게 되었다.
빈트 씨의 방에선 처음 맡아보는 달콤하고 이국적인 꽃내음이 물씬 풍겼는데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특이한 향수병을 보고 어디서부터 나는 냄새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노래요?”
“그래요. 몇 년 전에, 런던에 놀러 왔을 때 불렀는걸요. 클로드 씨 앞에서요.”
몇 년 전에 빈트 씨를 만났던 것이라면 세인트 케이든 연회밖에 없었다.
“아, 그 연회에서 불렀던 노래요?”
“네, 맞아요. 막무가내로 들어왔다가 쫓겨나고선 머물 곳도 없어 꽤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요.”
“혹시 그 가사 좀 적어주실 수 있나요?”
그는 흔쾌히 수락하는 듯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에 누런 종이와 펜을 들고나왔다.
“항상 감사해요. 이곳 사람들의 해학성 말장난들은 듣기도 힘들 지경이지만,” 빈트 씨가 호텔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선반에 종이를 올려두고 가사를 빠르게 적어주며 말했다. “덕분에 런던 자체가 재미는 있네요.”
“제가 감사하죠.” 빈트 씨에게 신세를 진 것밖에 없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처지는 나였다.
“여기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는 열심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가사가 잔뜩 적힌 종이를 내게 주었다. 1년 전 노래라면 가사를 까먹었을 법도 했는데 막힘없이 쭉쭉 외워 쓴 것에 감탄했다.
“당시 도버 참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의 시점으로 쓰인 노래예요. 이 사람은 병원으로 곧장 이송된 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입원 중, 무의식중에도 여러 번 ‘내가 미안해’라고 연신 중얼거려 큰 화제가 됐었어요. 그 안에서 안타까운 일이 있었던 거죠.”
빈트 씨가 슬픈 표정을 한 채로 말했다.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이 그 사람 한 명뿐이었나요?”
“아뇨, 사람들이 대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웬만해선 이미 죽은 후였다죠. 단 두 명만이 생존할 가능성을 보였지만, 한 명은 치료받던 중 죽어버렸고, 한 명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완전히 미쳐버려서는 병원에서 탈출하고 실종되었대요.”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군요.”
“결국 생존자는 없는 거나 다름없죠.” 빈트 씨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유일한 생존자는 실종된 이 사람인데, 생사가 불확실해서 생존자라고 단정 짓기도 참 뭐하고.”
빈트 씨는 막힘없이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갔다.
“기억력이 좋습니다.”
“고마워요. 워낙 충격적인 일이라, 잊히지 않아요. 가끔은 꿈에도 종종 나오고요.”
결국 심야는 오는 법인 걸까요
아프지만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던 그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불기둥 아래에서 마주한 태양조차
밤이 되어 사라지고 없습니다
앞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이곳에
남은 것은 제 몸 하나 빼고 없습니다
아직도 조금은 오글거렸지만, 그의 노래 가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불기둥 아래에서 마주한 태양이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뭔가 그것을 알 것만 같았다.
“빈트 씨, 불기둥이 무슨 뜻입니까?”
“아, 그 유일한 생존자였다는 그 사람이 그렇게 진술했거든요. 자기 연인은 2차 피해로 무너진 잔해로 죽었다는 겁니다.”
빈트 씨는 그 뒤로 내게 그날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주었다. 그의 말이 반드시 옳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저 빈트 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 유일한 생존자, 그러니까 장발은 도버 참사에서 극적으로 구조되어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정신적으로 여러 문제점을 보이더니 끝내 미쳐버리곤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정신적으로 미쳐버린 가장 큰 원인은 화재가 아닌 그 참사 현장 속에서 있었던 안타까운 일이 마음의 상처가 되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하죠.” 빈트 씨가 계속 설명했다. “그 뒤로 그 유일한 생존자는 몇 달간 도버, 캔터베리Canterbury, 로체스터Rochester, 다트포드에서 차례로 목격담이 돌았는데, 엉겨 붙고 엉킨 긴 머리에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매일 밤 기괴한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기를 며칠간 반복하고 바람처럼 사라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해요.”
“….”
“어찌 보면 그냥 좀 특이한 사람의 특이한 소란이었을지 몰라도, 그가 그 지경이 되도록 아무런 조치가 없었냐는 비판적인 여론이 떠돌기도 했어요. 온갖 억울한 일은 다 겪었음에도 부정적인 시선이라는 미운털이 박혀 방치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안타까울 뿐이죠.” 빈트 씨가 말을 이었다.
장발의 과거를 알고 나니 1년 전에 봤던 꿈이 다시 떠올랐다. 책장에 깔린 여자를 두고 구하지 못한 채 절규하던 그 상황은 도버 참사였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던 장발의 아픈 과거였으리라.
“그런데 갑자기 가사는 왜요?”
빈트 씨가 소파 위에 있던 바이올린을 정리하며 물었다. 그가 바이올린을 잡은 손으로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현이 조금씩 움직이며 작은 소리가 났다.
“…가사가 좋아서요.”
“정말요?” 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유일한 생존자가 누군지. 그는 아직도 살아있어요.”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미쳐있으니 이상한 말을 해도 넘어가 주십시오.”
빈트 씨는 짐을 다 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로드 씨, 제가 내일 아침이면 체크아웃해야 하거든요?”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가시게요?”
“아뇨, 그건 아닌데 지금 당장은 돈이 없습니다.”
“없는 돈을 호텔비에?”
“…그렇게 됐네요.” 빈트 씨가 멋쩍게 웃었다. “아무튼 내일부터 저를 찾아오시려거든 그때 그 폐가로 오세요.”
“피에르 씨의 생가 말입니까?”
“네, 맞아요. 아무도 없고 비용도 없어 혼자 머물기 좋아요. 한 이 주 정도 더 머물다 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장발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꿈은 기억에서 파생되어 나온다고 했던가. 장발은, 어쩌면 내게 자신의 과거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지금까지 그가 보였던 행동들, 심지어 그의 정체성까지도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 마당에 아직 한 끼도 먹지 못하여 슬슬 배고픔이 몰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 하늘에 덮인 어둠과 그 한기가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