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 10

[Chapter 3 : 본질] - 2

by Chris Paik 백결

[10/15]


런던에서 살며, 언젠가 나는 기억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


족보를 타고 올라가 보면 얼마 안 가 스위스 귀족 집안이 나온다는 그 노인은 낡은 회중시계를 손에 쥐고 나를 찾은 손님이었다. 그는 시계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골동품에 상당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왔을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전 클로드 베르나르입니다. 프랑…”


“…프랑스인이지. 그래, 자네는 프랑스인이지. 프랑스에서 왔고말고.”


그는 까무잡잡하고 군데군데 손상된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리를 절뚝거렸다. 서 있는 것도 불안정하여 검게 칠한 나무 지팡이에 자기 하중을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를 아십니까?”


“난 바쉐론 콘스탄틴을 사랑한다네.” 노인이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머릿속으로 그 노인에게 ‘치매 노인’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자네라면 조금 얘기가 통하지 싶소.”


노인은 자상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미소에 담긴 뜻을 읽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노인은 손에 쥔 낡은 회중시계를 내게 보여주었다. 시곗바늘이 그 속에서 멈춰있었다.


“이걸 고치면 되겠습니까?”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은 시계를 고치러 온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해 나를 찾은 것이라 덧붙였다. 처음에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한참 빤히 쳐다보다가 현관문을 열고 그를 집으로 들였다.

노인은 구부정하게 휜 몸을 끌고 소파에 앉았다. 그는 다리 하나가 없어 의족을 착용한 채로 절뚝거렸다.


“저를 아십니까?”


“난 바쉐론 콘스탄틴을 사랑한….”


“…사랑하시죠. 예, 압니다. 얘기하셨어요.”


노인이 웃었다.


“내가 프랑스인이었다면 아주 기뻤을 거야. 이 시계가 바쉐론의 시계일세.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골동품이지만, 이제는 명을 다하였소.”


“약이 떨어졌을 뿐입니다. 다시 고칠 수 있습니다.”


“아니, 난 이 시계를 다시 살려내고 싶지 않소. 그건 너무 구차하잖아. 이대로 끝을 맺는 게 아름다운 거야. 뭐든 가장 아름다울 때를 놓치면 그 뒤는 추해지기 마련일세.” 노인이 말했다.


그는 젊었을 적 이야기를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일이었지만, 아직도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샌가 혼자 남았다는 것을 자각할 때면 악몽에 몸부림친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말을 온전히 잇지 못하고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호흡곤란이 온 것처럼 숨을 몰아쉬면서도, 세상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악몽이 멈춘 시계에 담아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것입니까?”


“악몽이 아름다운 게 아닐세. 웃고 울고 행복하고 비참했던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게야.” 노인이 말했다. “귓가에 무언가 들리는 것만 같군. 자네도 들리는가?”


“아무래도 런던 시내인지라 이맘때쯤이면 상인들로 북적이긴 합니다. 특히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가장 거슬리지요.”


노인은 시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계속 심호흡했다.


“시계가 무언갈 들려주려는 것 같소. 그게 그날의 기쁨이건, 앞뒤 가리지 않는 괴성이건 두루뭉술하게 뭉개져서는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소만, 아직도 생생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면 다시 그때를 생각하게 되오.”


그는 자신이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용병이며, 다리를 잃고 갈 곳을 잃은 독거노인이라고 말했다. 끔찍하게도 사랑한 이가 전쟁 길에 건넨 마지막 선물인 시계는 그 노인에게, 죽음을 앞에 둔 순간에서도 지켜냈을 정도로 소중한 것이었다. 살아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받아낸 시계였으나, 영국군이 1차 전쟁에서 패배하고 노인이 한쪽 다리 없이 집으로 복귀하였을 때, 프랑스인이었던 그이는 집에서 홀로 노인을 기다리다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다는 것이다.


“보어인들의 저항은 생각보다 거셌다네.”


“거의 죽을 뻔하셨군요.”


노인은 눈을 감았다.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그때의 소리에 집중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내게는 기어가 돌아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시계를 고치는 자네에게 이 시계는 약을 넣고 살려내야 하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내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네. 시계의 역할은 못 하겠지만, 애초부터 시간을 보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던 거야.” 노인이 말했다. “기억하는 건 그녀의 마지막 그 한마디네. 소중한 것은 이렇게 물건에 담아서 보관하고 기억을 새기는 거라네. 그리고 되뇌는 거지, 순간순간을 이루었던 꿈속에서의 아름다운 찬가를….”


노인은 얼굴을 싸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는 곧바로 떠나갔다. 난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힘들게 나아갔다. 가면서 그는, 바쉐론 시계를 옷 주머니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다.


무엇이든, 시간이 멈추고 의미가 담긴 순간 그 가치는 형용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그 물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노인은 내게 기억하는 법을 가르쳐주고는 유유히 집으로 돌아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노인은 그 주 목요일, 집에서 홀로 고인이 된 채로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며칠 밤을 외로이 보낸 어느 날의 아주 고요한 밤. 그날따라 바람은 평소보다 덜 차가웠다. 시계를 만들거나, 고쳐 파는 일도 제대로 되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함과 함께 찾아온 손 떨림으로 인한, 계속되는 부품 결합 실패에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졌을 즈음, 작은 지네 한 마리가 거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신발을 벗어 지네를 향해 힘껏 던졌다. 지네는 얇고 많은 다리를 빠르게 굴러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카펫이 울어 생긴 틈으로 들어갔다. 신발은 바닥에서 튕겨 나와 서랍에 박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는 곧바로 카펫을 들어내고 막무가내로 지네를 밟아버렸다. 지네는 빨라봤자 지네였다. 단번에 초라하게 죽어버렸다. 이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렇게 나는 지네 사체를 앞에 두고 잠시 멍을 때렸다.


나는 지네의 사체를 핀셋으로 집어 올리려 했으나,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사체 조각이 작고 가늘어서 잘 잡히지 않아 핀셋을 몇 번 사용하다가 그냥 손으로 쓸어 모아 한 번에 밖으로 내다 버렸다. 햇볕은 따스했지만 바람은 차가웠다. 나는 거리의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우연히도 저 너머 거리에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머리를 말아 올린 어느 여자를 보게 되었다. 아, 모습이 1년 전과는 많이 변하긴 했어도 저건…, 로즈가 아니던가.


밖은 생각보다 쌀쌀했다. 난 뛰어대는 가슴을 붙잡고 그렇게 곧장 그녀의 뒤를 밟았다. 그런데 멀리서 보기에 그 형체가 흐릿한 게 로즈가 아닌 것 같기도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워낙 비슷한 사람이 많은 흔한 얼굴이라고 한다면 그런 얼굴이었으니까.


로즈는 상점에서 알 수 없는 물건을 산 후 내게서 먼 방향으로 유유히 향했다. 살갗이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두꺼운 가죽 코트를 둘렀지만, 여전히 추워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걱정 섞인 한숨이 나올 때마다 입김은 선명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끝이 저리고 귀 끝 감각이 사라질 즈음, 로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덜컹거리는 전철에 올라탔다. 전철까지 쫓아갈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뒤로 돌아섰다.


괜한 고생이었다. 로즈를 미행한 뚜렷한 이유는 나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저 정말 로즈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예전에 함께한 시간이 있다 보니 여운이 남았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로즈를 본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컸다. 이미 죽은 것이라면 여기에 다시 올 이유가 없었다. 허탈했다. 다시 환각을 본 듯했다. 그래, 로즈였을 리가 없지. 이미 죽었잖아.


이제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것일까. 몸은 다 자랐는데 기억은 고작 1년 3개월짜리인 인생의 서두니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셈이었다. 그마저도 일반인은 잘 겪지 못할 사건들을 연달아 겪다 보니 질 좋은 기억이 많을수록 점수가 높다고 한다면 나는 높아야 10점 중 2점인 것이었다.


그녀만 쫓아 걸어온 길에서 마지막 전철이 떠나자 마술처럼 거리에는 사람들이 확 줄었고, 나는 밟아오던 쓸쓸한 길을 되돌아갔다. 주머니에서 온기를 지켜낸 로즈의 시계가 조용히 달그락거렸다. 분명 좋은 부품만 사용해 수리하고 다음에 만나면 돌려주려고 했었지. 로즈를 보자마자 본능처럼 시계를 챙겨 그녀를 쫓았던 조금 전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흰 눈은 쉬지 않고 계속 내렸다. 사람들은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거리를 꾸미느라 분주해 보였다.


도로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장사하는 수많은 상인은 저마다 작은 난로를 하나씩 두고 따뜻한 열기를 쬐고 있었다. 추위 속에서 그 몽글몽글한 분위기와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 소리는 나를 끌어들였지만, 괜히 잠깐 불을 쬐려 다가갔다가 도리어 그 집 상인에게 쓴소리만 듣고 나올 게 뻔했다.


그렇다고 물품을 사자니,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는 내 처치에 맞지 않는 선택이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정답밖에 없는 것이 각박할 뿐이었다.



글 하나가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 주택 입구에는 두 마리의 사자 석상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고, 마당으로 들어서면 멋진 말 석상이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옵니다. 거기서 흐르는 물은 정말이지 맑고 투명합니다.…」

두 마리의 사자 석상,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분수대. 기억을 더듬을수록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집은…, 피에르의 생가가 틀림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밤인데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복잡한 인파 속에 떠밀려 이리저리 치이다가 깊은 숲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울창한 숲에 숨겨진 이곳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


분수대 한가운데에 있어야 할 말 석상은 그대로 쓰러져 마른 바닥에 처박혀 있었고, 활짝 열려있는 녹슨 대문은 이 주택 전체에 왠지 모를 음산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했기에 이 집은 단번에 버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원을 다채롭게 꾸며야 할 잔디와 나무는 이미 오랫동안 정원사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아담한 벽돌집은 이미 한쪽 면을 채우는 벽이 통째로 무너져, 작은 산새들의 집이 되어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세월의 흔적을 엿보았다.


그것은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더 심했는데, 말라비틀어져 밑바닥이 드러난 분수대를 지나 길을 따라 문짝이 뜯어진 대문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자 흙과 먼지가 바닥에 소복이 쌓여있었다. 이곳은 이미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버려진 지 오래된 듯 낡아빠진 상태였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섰다. 외벽 일부가 무너져 내린 탓에 저물어가는 햇빛과 겨울의 바람이 전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허전하고 초라한 폐가인데, 하물며 그곳에 있는 나는 스스로가 더욱 초라해질 뿐이었다.


폐가 안에는 예상했던 대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으나, 집안 곳곳에 짙게 남아있는 온기는 이미 나 말고 누군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낡은 선반 위에 고이 놓인 양은 주전자에는 한겨울에 바깥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 안 될 정도로 따뜻한 차가 가득 담겨있었다.


발밑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내게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의 주인공은 지하실 계단에서 천천히 올라오며 이윽고 모습을 드러내더니 내게 다가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내가 그의 정체를 판단할 순간까지 나는 생각했다. 제발 위험한 사람이 아니길….


“음? 당신은?”


“빈트 씨?”


“연회 때 봤던 그분이시군요?”


이런 누추한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빈트 씨에게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반가워요.” 그는 다시 만난 나를 격하게 환영해 주었다. “이건 로즈힙 티예요. 잔뜩 긴장한 몸을 풀어줄 거예요.”


빈트 씨는 선반 서랍에서 찻잔을 꺼내어 양은 주전자를 기울였다. 어두워서 색을 잘 알 수 없는 액체가 졸졸 흘러내려 찻잔을 서서히 채워냈다.


“받아요.”


마지못해 그가 건네는 차를 받기는 했지만 난 차마 그것을 마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들었어요. 그 연회 날 있었던 일. 저는 테러가 있기 전에 쫓겨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하늘이 도운 거죠.” 빈트 씨는 자신의 찻잔을 하나 더 꺼내어 똑같은 차를 마셔 보이고는 차가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쪽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좀 지쳐서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무사해서 다행이죠. 죽은 사람도 있다더라고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빈트 씨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네요.”


“아,”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클로드입니다.”


빈트 씨는 정원으로 나가 나무 장작을 모아서는 모닥불을 피웠다. 그의 주머니에서 꺼낸 성냥에서 피어오른 작은 불꽃은 어느새 나무 장작 위에서 그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활활 타올랐다. 그 모습을 집 안에서 지켜보던 나는 불 주변으로 다가갔다. 단번에 느껴지는 따뜻함이 몸을 녹였다.


근처에는 바닥에 처박혀 있는 말 석상이 있었는데, 빈트 씨는 주저하지 않고 말의 목을 의자 삼아 앉았다. 나도 주변에 있는 바위 중 최대한 평평한 것을 찾고서는 불 근처까지 옮겼다.


“도울까요?”


빈트 씨는 곧장 일어나 바위를 옮기느라 끙끙대는 나를 도왔다. 덕분에 곧 우리 둘 다 불 주변에 앉아 쉴 수 있었다.


“어차피 버려진 집이라서 괜찮아요. 건물 외벽이 저렇게 무너졌는데 그게 버려진 집이죠.”


빈트 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집 내부로 들어가 짐들이 쌓여있는 곳에서 작은 백파이프를 꺼내 들고나왔다. 집 한쪽 구석에 잔뜩 쌓여있는 저 짐들은 전부 빈트 씨의 짐이었다.


“이거 본 적 있어요?”


“백파이프요?”


“맞아요. 연주하는 법 알아요?”


“아뇨.”


“들어봐요.”


자세를 고쳐 앉고 크게 한 번 심호흡한 그는 바로 백파이프를 불기 시작했고, 중간중간 입을 떼고 노래까지 곁들였다.


죽음의 전염병이 유럽을 강타한 그 시절

(그는 다시 백파이프를 입에 물고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다)


에드워드 첸 그는 세상을 구원했소

(백파이프 소리는 처음 들었지만, 마치 거대한 현악기에서 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을 모아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백파이프 소리는 생각보다 컸지만 그래도 들을만했다)


괴질을 불러들인 악인들을 벌하였노라

(빈트 씨는 노래 한 소절을 부르고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것을 반복해 나갔다)


신이 노하셨으니 죗값을 치르리라

(백파이프 연주소리는 타닥타닥 타올라가는 모닥불과 함께 화음이 되었다)


그 뒤로 영국은 깨끗해지고 그를 칭송했으리라

(그는 마무리로 현란한 선율을 막힘없이 연주했다)


“이런 취향이신가 봐요.”


“제가 만든 곡이긴 하지만, 어디서 본 글 내용을 바탕으로 쓴 거예요.”


“글이요?”


그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작고 낡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몇 번 접힌 종이를 펴자 몇 줄의 글이 있었다.


“이게 내용이에요?”


“네, 맞아요. 제 노래는 대부분 실제 사건에서 얻은 영감으로 만들어진 편이에요.”


나는 그 종이를 받아 들고 모닥불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에 의지해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17세기의 런던. 발열, 두통, 오한 등으로 인해 몇 날 며칠을 앓는 환자들이 넘쳐나면서 모든 병원의 자리는 꽉 차게 되었다. 병균에 너무나 취약했던 당시 위생 상태로는 페스트균이 판을 치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이었다. 상황은 날로 나빠져 일주일에 7천 명의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담배를 피워대게 한 ‘런던 대역병(1665~1666)’ 속에서 나타난 의문의 혁명가, 에드워드 첸과 그를 필두로 포교된 ‘흑향기’는 일종의 구원자집단이자 그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종교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다녔으며, 그에 대한 이유는 항상 신의 형벌이었다. 흑사병에 걸렸다는 것은 신의 형벌을 받았다는 걸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매질을 서슴지 않은 사이비종교, ‘흑향기’의 신도들이 하나의 상징처럼 입고 다닌 역병 의사의 옷차림은 어느새 강도의 상징으로 변질되어버렸고, 그중에서도 특히 그 기괴한 까마귀 가면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옷차림이 강도가 아닌 구원자의 옷차림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흑향기에 조직되는 것. 이제는 멀쩡하던 이웃이 하루아침에 죽어버려도 흑사병 때문인지, 자칭 고트라프Gottesraff 신의 심판을 받은 것인지 알 수조차 없었으며, 그들에게 죽지 않으려면 흑향기에 조직되어야 했기에 종교의 규모는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17세기, 영국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런던 대역병은, 3세기 전인 14세기 중세 흑사병에서 이어지는 2차 범유행이라 볼 수 있었으며, 흑향기 종교는 그들의 살고 싶은 욕망과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두려움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3차 대란이었다.

이후 흑향기는 분열되어 영국의 여러 지역으로 퍼지며 대부분 소멸했다. 살아남기 위해 구축된 집단이라 되레 내부에서도 죽고 죽이는 일은 흔했으며,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교주를 세우고, 아직도 어떠한 형태의 악상일지라도 신이 내린 형벌이라 믿는다고….


경고 : 다음 세 사항을 반드시 지킬 것.

첫째, 그들의 활동 시간엔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말 것(그들의 주된 활동 시간은 자정이 넘은 심야였지만 당신이 만약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에 그들을 마주쳤다면 당신이 위 사항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둘째, 흑향기 신도와 마주치면 신의 뜻을 반했다는 죄목으로 말미암아 재판받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할 것(만약 선량한 당신이 습격을 받아 그들로 인해 배가 찢어지거나 목이 잘려 나갔다면 당신이 위 사항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셋째, 그들의 주된 접선 장소나 주거지역에 절대 발을 들이지 말 것(그들의 주된 접선 장소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만약 그들이 당신네 화장실에 침입했다면 당신이 위 사항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여기선 교주를 아덴타Adenta로 칭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 저도 알아요. 그 집단이 좋은 집단은 아니란 걸. 미화할 의도는 없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강제로 구원자집단이라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서요. 적당히 당시 상황에 이입을 좀….” 빈트 씨가 애써 웃으며 서둘러 말했다.


“흑향기?”


“…네. 집단 이름이 ‘흑향기’였대요.”


“이들을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요. 그 종이에 쓰여 있잖아요. 17세기 사이비종교, 아닌가요?”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호기심 많은 눈동자로 나와의 대화에 임했다.


“흑향기가 지금도 있는 거 모르십니까?”


“흑향기가 지금도 있어요? 그러면 집단 몇백 년은 더 됐을 텐데요.”


“네. 지금도 있습니다. 보기보다 늙은 집단이었네요. 범죄 집단인 줄로만 알았는데 종교집단인 건 처음 알았네요. 그래도 이전보단 힘이 많이 빠진 듯합니다.”


“그 당시에도 그들은 범죄 집단이었는걸요.”


그는 그 말을 듣고 나를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런던 출신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맞죠?”


“네 맞아요. 리버풀Liverpool에서 자랐어요.”


“리버풀이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지역이었다.


“네. 잉글랜드에 있는데 런던이랑 좀 멀어서요. 클로드 씨가 모를 수도 있었겠네요.”


“저는 프랑스 출신이라서 말입니다.” 내가 말했다. “암튼 흑향기는 지금도 런던에서 활동하는 범죄 집단이거든요. 그들도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니는데 그런 걸 보면 그때부터 이어진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영국인인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네요.”


“런던에서 좀 지내다 보니까요.”


“아직도 사람을 죽이고 다닐까요?”


나는 더 이상 말하기를 관두었다.


그레이스와 서리 부인의 기억이 갑작스레 마음을 스쳤다. 그들은 흑향기의 손에 세상을 떠났다. 빈트 씨에게는 세인트 케이든 연회에서 벌어진 테러의 배후에 코번트리 백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그가 알아봤자 좋을 게 없을 거라는 간단명료한 이유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조심할게요. 그래도 만나면 조금 재밌을 것 같기도 해요.” 빈트 씨가 말했다.


빈트 씨가 한가롭게 백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내는 투박한 소음이 서서히 잦아드는 무렵에도, 모닥불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빈트 씨에게 오늘 밤 이곳에서 함께 머물겠다고 말했다.


“저는 죽음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하곤 하죠. 죽음이 무서운 건 그 허무함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빈트 씨가 피곤한지 눈을 비비며 말했다. “살면서 쌓아 올린 탑이 전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 그게 죽는 거죠.”


고요하지만 동시에 심심하던 분위기를 깨는 대화의 시작이었다.


“죽어도 된다는 건 그런 탑이 없다는 것이겠죠.”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오히려 살아있는 게 고통입니다.”


“연회장에서 만났던 그녀가 생각나네요. 모든 기억은 헛되다고 말했던 사람. 비슷한 맥락이었죠, 아마. 당신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졌던 듯한데요.”


“서리 부인이요?”


“맞아요. 아세요?”


“그때 옆에 같이 있었죠.”


“아.” 빈트 씨가 짧게 소리 냈다.


“네, 서리 부인이 그랬죠, 추억은 회상한들 가치가 없다고. 죽으면 사라지기도 하고.” 내가 말했다. “서리 부인과 제 가치관이 비슷한 게 아니라 제가 그녀에게 스며들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이 남아 어떻게든 꺼내어 다시 느끼고 싶은 것이 추억이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회상해 봤자 얻는 것도 없으니 아무리 봐도 추억이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내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과거는 시계 만드는 법을 공부했던 1년 전의 나뿐이었다.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그녀의 말은 백번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분위기에서 회상하는 것만큼 멋진 일은 없죠. 아주 쓸모없는 짓거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빈트 씨가 말했다. “전 5년 전 친구들과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던 날이 기억나요. 사소하지만 잊히지 않아요. 계곡물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다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그 엉덩이로 물고기를 잡았었죠.”


빈트 씨가 웃음 지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재밌으세요?”


“행복하네요. 그런 것들이 바쁜 일상에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클로드 씨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그의 질문을 듣고 곧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나한테 기억이란 뭘까. ‘기억의 날’ 이후로 벌어졌던 힘들었던 것들. 그래도 그런 어두웠던 일상에서 로즈와의 추억은 혼자 빛나고 있었다. 슬픔에 외면하고 그동안 잊고 살아왔지만, 그 기억을 하나씩 꺼내 보니 심장이 요동쳤다. 지금껏 현실에 찌들어 살지는 않았는가.


“그리움이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가 아닐까요.” 빈트 씨가 말했다. “안타깝네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 것 같아요.”


“제게 기억이란 그리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클로드 씨를 위해 그 기억, 제가 살게요.”


“예?”


“제겐 그런 감정 또한 영감으로 다가오거든요. 얼마면 되겠습니까? 본가에 저금해 둔 돈이 많습니다.” 그가 재촉했다. “물론 제게 파시면 그 기억은 당신께 아니게 되는 겁니다.”


가치도 없고 행복도 없는 것을 돈 받고 버린다는 건 그렇게 이득이 아닐 수 없었다.


“제 기억은 별거 없습니다. 오히려 이걸 정말 돈 받고 팔았다간 명치를 한 대 얻어맞을지도 모르죠.” 내가 말했다.


“사람이 죽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던가요?” 빈트 씨가 물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 것이니까요. 처음엔 저와 관련 없는 사람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젠 죽는다는 것 자체에 우둔해져 버렸습니다.”


“고마워요. 기억들이 전부 제게로 왔네요. 아하, 서비스도 있군요! 많은 것들을 이루어놓으셨네요.” 그가 말했다. “당신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느꼈어요. 그것은 짧았지만 강렬했군요.”


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분명히 힘들었던 시간은 맞다. 그러나 거칠고 날카롭게 깨져버린 기억 이면에는 분명 행복한 시간이 유화 물감처럼 두껍게 발려있었다. 결국엔 쌓아온 탑의 일부이고, 그렇게 완성된 나를 구성하는 조각이었구나.


“기억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맞지만, 그 가치가 없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바뀌어버린 생각은 내게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경험으로 인해 생성되는 행복과 그 성장에서 느껴지는 쾌락이 삶의 의지를 주로 이루고 있지는 않은가.


“빈트 씨, 무르실 생각 없습니까?”


“왜요? 부르는 게 값인 데다가 클로드 씨에겐 가치도 없잖습니까.”


“기억을 판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빈트 씨가 제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요.”


“살아있는 순간순간을 기억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빈트 씨가 입김을 불며 말했다. “그냥 지금을 즐기는 게 당신에게 이롭다는 말입니다.”


모닥불과 저녁노을은 빈트 씨와의 경험을 담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것 같았다. 그렇게 기억을 정리하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깜빡 잠들었나 보다. 오들오들 떨면서 눈을 떴을 때,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모닥불은 그대로 꺼져서 잿더미가 되어버린 장작에 작은 불씨가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약간의 눈이 내렸다.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오전 세 시 정각을 향해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었다.


“빈트 씨.”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말 석상의 목을 침대처럼 사용하며 곤히 자고 있던 빈트 씨는 두꺼운 옷을 이불 삼아 덮고 있었던 것인지 그렇게 추워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음…?”


그가 잠결에 늘어진 소리를 냈다. 나는 그가 확실하게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렸다.


“….”


그가 다시 잠들었다.


“빈트 씨.”


빈트 씨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순간 깜짝 놀라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도 놀라서 잠에서 확 깬 건 마찬가지였나 보다.


“클로드 씨? 왜요?”


“너무 추워서요. 혹시 덮을 거 가져오신 거 있으세요? 코트나 담요 같은 거라도.”


“그런 건 없는데.”


“그렇군요.”


“차라도 마실래요? 따뜻할 텐데. 조금 남았을 겁니다.”


동의하자 빈트 씨는 무거운 눈꺼풀을 차마 올리지 못하고 비몽사몽인 상태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외벽이 박살 나서 밖과 안이 바로 통했기 때문에 우리는 멀쩡한 현관문을 놔두고 벽이 부서진 곳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계속 이래왔다. 이게 더 편하니까.


빈트 씨는 양은 주전자를 움켜잡더니, 한숨을 내뱉었다.


“겨울 냉기에 주전자가 차가워졌네요. 덮을 건 없을 텐데….”


빈트 씨는 차갑게 식은 양은 주전자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짐을 쌓아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밖은 여전히 추웠다.


“추위를 잘 타시나 봐요?” 그가 짐을 뒤적이며 말을 걸었다.


“그런가 봅니다.”


“더위는요?”


“모르겠어요.”


“미안해요. 덮을 게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빈트 씨는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다시 말 석상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그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손짓을 하고 그를 따라 다시 꺼진 모닥불 앞으로 향했다.


“춥겠어요. 이 집에 덮을만한 게 있나 찾아봐요.” 빈트 씨가 말했다.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죠.”


“그럴까요? 아니요, 빈트 씨는 앉아 계세요. 제가 찾겠습니다.”


“네. 장롱을 한 번 뒤져봐요.”


“장롱이요?”


“옷방에 있을 겁니다.”


난 나는 어둠이 내려앉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둡기는 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거실은 은은한 노란 빛의 샹들리에로 가득 차, 조용히 밝혀주고 있었다. 반짝이는 금실과 은실로 장식된 고급 가구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그러나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내 상상의 산물임을 깨달았다. 이 버려진 집은 낡고 쓸쓸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집을 멍하니 바라보며, 잠깐 추위조차 잊고 말았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방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옷장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손잡이에는 먼지가 푹신할 정도로 쌓여있었다. 나는 숨을 참고 먼지를 털어내며 옷장 문을 열었다.


재채기가 멈추지 않았다. 먼지를 피해 숨을 참았음에도 불구하고, 옷장 문을 활짝 열었을 땐, 그 순간에 휘날리는 먼지를 예상치 못했다. 눈에 들어간 먼지로 인해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옷장엔 덮을 것이 없음을 깨닫고, 이불이 가득한 이불장으로 손을 뻗었다. 사실, 많은 이불 중 하나만 꺼내쓰면 됐지만, 나는 좀 더 두꺼운 이불을 찾아 손을 멈추지 않았다. 팔을 깊숙이 넣을 때마다 먼지가 팔에 달라붙고, 손톱 사이에는 무언가 걸려 불쾌했다. 그러나 결국 마음에 드는 이불을 찾아냈다. 짙은 남색의 두꺼운 벨벳 이불이었다.


이불의 양 끝을 잡고 뒷마당으로 나가 그것을 마구 털었다. 눈을 꼭 감고, 숨을 참고, 입을 다물고, 얼굴을 찌푸린 채로 이불을 터는 내 모습이 마치 물벼락을 맞은 어린아이 같아 그저 우스웠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먼지가 눈과 코, 입속으로 모두 들어가 크게 고생할 것을 알고 있었다. 찌릿찌릿한 정전기 때문에 팔과 옷에 먼지가 달라붙었지만, 그 대가로 추위를 이겨낼 따스함을 얻었으니 만족했다. 날이 밝으면 집으로 돌아가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옷을 빨 생각이었다.


이불속에서 작고 오래된 나무상자가 발등 위로 툭 떨어졌다. 처음 이불을 꺼낼 때, 그것은 예쁘게 개어져 있었다. 누군가가 이불 안에 상자를 숨겨둔 것이었다. 가장 깊숙이 있던 두꺼운 이불에서 나온 나무상자. 그 안에는 분명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무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는 두꺼운 종이가 쌓여있었다.


<하이드Hide> 원고


피에르 아르튀르 록시 지음


le 25 decembre 1888

suis gueri


가장 위에 있는 종이에 적혀있던 글이다. 보아하니 종이 더미는 피에르의 신작 소설 원고였다. 의아했지만, 이 집이 피에르의 생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나름 간간이 피에르의 소설을 읽어왔으니 흥미가 가는 상황이었다. 그의 소설들 제목은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하이드>라는 제목의 소설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이 소설은 무슨 이유인지 끝내 세상에 공개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수필집, <흑백기억>에서 그의 신작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이 신작 소설이 이것이겠거니. <흑백기억>이 쓰인 시기가 40년 전인 1888년도이고, 이 원고 또한 오래도록 방치되어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그 근거였다.


피에르의 소설 중 중세 흑사병에 관한 소설은 없었는데, 40년이 되도록 완성하지 못했을 리가 만무했기에 어쩌면 특별한 이유로 그가 이 작품을 잊어버렸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 밑에 따로 적힌 글자의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decembre’는 12월이라는 괜찮은 추측을 했지만, 그 밑부분은 알 수가 없었다. 나름 정성스럽게 반듯이 쓴 다른 문구와는 다르게 유일하게 서둘러 휘갈겨 쓴 필체였다. 나는 당장 그것이 어느 나라 언어인지도 알 수 없었으며, 내 멋대로 스위스 게릴라Suisse guerrilla라고 읽고는 그것이 부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먼지를 어느 정도 털어낸 이불을 두른 채로 곤히 자는 빈트 씨에게 다가갔다. 자리를 잡고 앉은 채 원고를 읽어보려다가 글을 읽을 수 없을 정도의 어두움 때문에 바로 포기했다.


추위 속에서 악착같이 버텨낸 끝에 밝은 다음 날은 여전히 추웠지만 따스한 햇살이 지면을 조금이나마 데운 탓에 얼어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밤새 내린 눈은 소복이 쌓여 걸을 때마다 눈 밟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메리 크리스마스!”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소리를 질러댄 빈트 씨 덕분에 크리스마스임을 알게 되었다. 몸 위에는 눈이 한가득 쌓여있었는데 그래도 그다지 특별한 건 없었다.


원고가 들어있는 상자를 베개 삼아 자는 바람에 목이 뻐근했다.


눈을 문질러 최대한 깨끗하게 닦은 <하이드> 원고 상자는 원래 있던 이불장이 아닌 이불장 바로 옆 틈새에 고이 두었다. 먼지가 최대한 덜 묻게 하려는 것이었다.


“안녕.”


“잘 가요!”


빈트 씨와 인사를 하고 생가에서 빠져나왔다. 뜬금없는 외박에 뒤따른 허리통증 같은 여러 후유증은 금방 낫지 않을 듯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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