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 8

[Chapter 2 : 고착] - 4

by Chris Paik 백결

[8/15]


로즈를 죽였다고? 왜? 갑작스러운 상황에 좀처럼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작이 로즈를 죽였다고?


장발은 무심하게 그 말을 던지고는 식탁에 앉아 석상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나 직접 그녀의 집까지 찾아간 뒤에는 현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현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쿵쾅쿵쾅 뛰어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 모습은 로즈의 죽음을 전했던 장발의 모습과 똑같았다. 맨발로 달려온 탓에 발바닥엔 수많은 상처가 났고, 피는 흐르는 빗물에 섞여 돌 도로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발바닥이 쓰라렸다.


집에 돌아와 한꺼번에 버리려고 모아둔 신문 더미를 뒤져 최근 7일간 쌓인 조각 신문들을 모두 골라 집었다. 놓치는 부분 없이 전부 읽었다. 꼼꼼하게 기사를 전부 읽어 내려갔으나 언론을 통해 떠오르는 살인사건 기사는 없었다. 다시금 마음이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금발 머리랑 코번트리 백작이랑 무슨 상관이 있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는 장발에게 따지듯 물었다.


장발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듣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바위 같았다.


“날 죽이려던 게 금발 머리였어!” 장발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코번트리 백작은 지금 어디 있는데?”


장발은 내게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다 너도 죽어. 지금 백작은 궁에서 도망쳐서 거리를 활보하고 있어. 네가 알고 있는 그 모습이 아닐 거야.〛 장발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경찰도 백작을 쫓고 있는데 못 잡고 있어. 네가 어떻게 찾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부여잡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지금, 이 감정을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잔뜩 초췌해진 채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덧 10월 24일이었다. 로즈의 자리가 비어있는 동안 뼛속까지 깨닫는 그녀의 가치는 점차 높아져만 갔다. 온몸으로 거부하던 로즈의 죽음은 그녀가 아무리 찾아봐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탓에 점차 받아들이게 되었다.


현관문 앞엔 신문만 쌓여갔고, 마른 단풍 향만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집 내부의 습한 공기를 순환시켰지만, 기분이 나아질 기미는 며칠째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힘든 나날을 보내와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집착에 불과한 것일까. 겨우 찾은 행복했던 일상에 큰 변화가 찾아오더니 순식간에 몸과 마음이 금세 핼쑥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거실에선 언제나 장발이 소파에 앉아 허리를 구부린 채 잠을 청하고 있었지만 근래 그가 도움이 되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괴물 같은 것과 동거 아닌 동거를 하자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날부터 하루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현관문 앞의 신문을 확인했다. 모든 면에는 항상 도움이 되지 않는 기사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작업실에 앉아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간단하게 빵과 수프를 먹었다. 옆에서 장발이 부담스럽게 쳐다보지만 나는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난 장발이 다시 돌아온 이유가 로즈의 죽음을 알리려 온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오래 지나도록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마음속에 커다란 상처가 남아있었다.


추억은 위선자로서 따뜻함만을 전해줄 것 같이 다가와 쓰라린 아픔과 그리움만을 전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난다고 했다. 따뜻했던 추억이라는 이름표 뒤로는 날카로운 칼을 갈고 있으니 과거를 추억함으로써 얻는 것은 서글픈 그리움과 거대한 미련뿐이라고. 결국엔 서리 부인이 옳은 것이었다. 남는 건 없었다. 애꿎은 시간만 채우고 사라지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다면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잊지 못할 것이다.


코번트리, 그는 누구일까. 딱 한 번만 다시 만나보자. 어떻게 겨우 잡은 삶을 훼방 놓을 수가 있는 걸까.


괜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스스로가 생각보다 이것에 진심으로 미련을 두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애수 어린 마음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살아왔던 지금까지 정말로 강렬했던 것, 사람들은 그것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는다. 어떤 이는 마음을 위로해 줄 또 다른 추억을 찾고, 어떤 이는 더 이상 그것의 의미를 밑바닥까지 추락시켜 버린다. 모든 이가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눈물을 머금고 기다린다. 그것이 돌아오는 것이 간절한 염원이고 포기할 수 없는 소원이니까.


공허한 나날을 보내며 애써 잊어보려 하면 부정만을 인지하는 뇌는 내 심정을 알기나 하는지 그것을 꼭 붙잡아뒀다. 시계공으로서 시계가 아닌 시간을 고쳐 잘못된 모든 부분을 전부 고치고 싶었다. 고칠 수 없다면 되돌아가고 싶었다.


반복되는 시간의 굴레에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나였지만 이제는 시간을 돌려 행복했던 나날들만 반복하고 싶었다. 복잡한 정서와 울분을 연속으로 닥치는 불행한 일이 그 모든 것을 끄집어내는 듯했다.


로즈를 만나 술집에서 와인을 마시던 날부터 오기 시작한 비는 전보다 훨씬 굵어져 아직 그치지 않았고, 나는 오히려 그 비가 그치지 않기를 원했다. 로즈가 죽기 전부터 내리던 비. 그 향기가 남아있어 그녀를 회상하게 하는 유일한 가치였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로즈에게 느꼈던 감정은 친근함이었을까? 아니면 행복을 찾아 안정된 삶을 살고 싶은 나의 내면에서 나온 옅은 발악이나 망상에 불과했을까? 기억을 잃기 전에 겪었던 어떠한 일이 상처로 남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말 오후에는 낮잠을 잤다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유난히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잠을 잤음에도 피곤했다. 정신이 몽롱했다. 이상한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침대 위에서 가만히 숨을 쉴 뿐이었다.


작업실에 앉아 창문 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시계집 손님이 올 때면 활짝 열어 주문과 시계를 건네받는 그런 창문이었으나,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표면에는 온갖 이물질이 묻어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부담스러우리만치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고 오래된 얼룩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얼룩은 햇빛을 받아 제멋대로 울렁거렸다. 그러다 눈앞에 커다란 얼굴이 드리웠다. 나는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작업실의 창문을 두드렸다. 시계를 주문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리로 돌아가 창문을 열고 손님의 주문을 받았다. 중장년층의 여자 손님이었다. 그녀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이 시계 좀 수리해 주세요. 어제 한번 떨어뜨린 이후로 작동하지 않아서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내게 멈춰버린 회중시계를 내게 건넸다.


부인은 고풍스러운 옷을 걸친 사람이었다.


“이름이 뭡니까?”


“로즈 에렉스.”


“로즈?”


“예.”


다시 머리가 아파졌다.


“어디서 떨어뜨린…,”


“아도니스에서요.” 그녀가 내 말을 끊고 대답했다. “델타야 세책점 맞은편에 있는 술집인데, 현관 앞에서 떨어뜨렸죠. 떨어진 부분이 대리암이었는데 괜…,”


부인의 그 뒷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도니스라면 로즈와 내가 함께했던 유일한 술집이었다. 두통이 더 심해졌다.


“…만 이거 수리하는 데 얼마 정도 나올까요?”


정신을 차리니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중간 내용은 듣지 못했다.


“60펜스요.”


“생각보다 비싸네요.”


“다른 데로 가십시오.”


“이 근처에 다른 시계집이 또 있나요?”


“모르겠는데요.”


“여기 시계요, 다음 주에 찾으러 올게요.”


나는 부인의 중간 말은 듣지도 못했지만 대충 시계와 그녀가 건넨 지폐 더미를 건네받은 뒤 창문을 닫았다.

백 커버를 뒤로 돌려 뚜껑을 열자 나사 몇 개가 빠져 부품이 이리저리 뒤틀려있었다. 마침 기름칠도 수명을 다했으니, 감마제를 바르고, 조각난 로터와 이스케이프먼트만 교체한다면, 이 시계는 다시 제 기능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은 속이 안 좋았다. 눈앞이 일렁거렸고, 일상의 모든 사소한 소리가 확대되어 희미하게 들렸다. 물속에서 잠수 중일 때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 느낌이었다. 반경 약 5야드 외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뿐더러, 멀미와 함께 속이 울렁거렸다.


불이 이글거렸다.


“살려줘! 제발…!” 누군가 소리쳤다.


이곳은 생지옥이었다. 대형 화재 사고였고, 어떤 여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미 쏟아진 잔해에 다리가 깔린 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커다란 불이 사람들 북적이는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잔해에 깔린 그 여자는 비명을 질러댔다.


“다니엘!”


“기다려!” 장발이 소리쳤다.


“다니엘! 제발!”


도서관 한가운데에 우왕좌왕하던 장발이 그 여자를 구하기 위해 뛰었다.


유일한 탈출구인 정문은 반대편이었지만 장발은 그 여자를 포기하지 않고 구하기 위해 뛰었다.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을까?


귓전을 찢는 듯한 비명이 공중에 울려 퍼졌다.

마음이 너무 급했다. 건물은 이미 서서히 붕괴가 시작되었는데, 장발은 잔해에 깔린 여자를 구하러 가던 중에 그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덜거덕거리는 소리 끝에 커다란 소리가 쿵 하고 울려 퍼졌다. 한시가 급한 이 상황에, 그는 바닥에 턱부터 박기는 했지만, 고통은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났지만, 그 충격에, 불에 잔뜩 달궈진 나사 부품들이 우르르 쏟아지며 장발에게 수많은 상처와 한쪽 다리에 화상을 입히며 다시 그를 주저하게 했다.


그의 시야엔 죽어가는 여자뿐이었을 거다. 장발의 팔다리는 눈에 거슬릴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오른쪽 다리가 뜨거운 금속들에 잔뜩 지져졌는데 일어나서 여자를 구출하고 빠져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결말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장발은 피부가 지져지는 고통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일어났다. 단지 벽에 잡고 힘겨운 몸뚱어리를 일으켜 세웠을 뿐이었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무지 큰 소리였다. 장발은 바닥에 다시 엎어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벽이 부서지면서 그 충격으로 커다란 책장이 쓰러졌다. 활활 타오르는 책장은 정확히 엎어진 여자의 머리 위로 떨어져 그녀를 강타했다.


이미 불길 속에서 모든 것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는데 또 하나의 검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잔뜩 튀었다. 책장에 깔린 여자는 짧은 비명을 끝까지 내지르지 못하고 그렇게 죽어버렸다. 그 순간에 장발의 절규와 비명에 그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모른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이 허구라는 걸 알지만, 나는 이미 그에게 동요되고 있었다.


장발은 다리에 바닥을 기며 힘겹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 여자를 구할 가망은 없어 보였다. 아무리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라 한들 불타는 책장을 맨손으로 들어 올릴 수는 없는 노릇에, 이미 그녀는… 죽었으니까.


도서관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대거 탈출을 시도하며 장발을 밀치거나 밟으며 정문을 향해 달려갔고, 장발은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으며 뜨거운 불길 속에서 눈을 감았다. 격한 감정과 뜨거운 불길 속에서 탈진한 것이 더해져 기절한 듯 보였다.


수많은 사람이 정문으로 몰려 억지로 닫힌 문을 억지로 열려 안간힘을 썼다. 굳건히 닫힌 문 사이로 손톱이 끼어 점차 빠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달궈진 문에 손이 지져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질서도 침착함도 없는 그들은 그렇게 악을 쓰며 문을 열었고, 살기 위해 연 문은 그 순간에 막대한 양의 산소가 주입되며 커다란 폭발과 함께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그렇게 도서관 한가운데에서 홀로 쓰러져 있던 장발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는 모른다. 아마 구조대에게 구조되었겠지.

눈을 뜨니 은은한 조명이 달린 천장이 보였다. 나는 웬 침대에 누워있었고,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의사는 깨어난 나를 보더니 다가왔다. 그는 어딘가 익숙한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다.


“집에서 쓰러져 있었다는 신고가 들어왔었소. 사람들이 가보니 정말로 소파에서 굴러떨어진 채였다고 하더군.” 의사가 말했다.


방금 겪은 건 꿈이었다. 침대에서 자면서 꿈을 꾼 게 아니라 거실 한가운데에서 쓰러진 채 꿈을 꾸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꿈이었지만, 악몽을 가장한 지옥이었다. 이것이 장발의 과거일까?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있었다.


“악몽을 꾼 듯합니다. 쉽사리 잊히지 않는군요.” 내가 말했다. “왠지 실제로 있었던 일 같습니다.”


“그것참 안됐소.” 의사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수로운 표정을 유지했다. “밥을 좀 드시오. 그게 최고의 치료일 걸세.”


“예?”


“영양결핍으로 쓰러진 거요. 그리고 우울증도 같이 있는 것 같소. 악몽까지 꾸었을 정도니.” 의사가 무언가 적혀있는 수첩과 나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또한….”


의사가 날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오. 더 알아봐야 좋은 것도 없소.”


“전 혼자 사는데요?”


“누가 신고했느냐고?”


“예.” 내가 답했다. “집에 올 사람도 없을 텐데요.”


“평범한 길거리 화가였소. 창문 너머로 자네를 발견했다지.”


의사는 이 말을 끝으로 수첩에 무언가를 적으며 돌아갔다.

그 뒤로 병원 침대에 누워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익숙한 풍경에 이 병원이 발프 병원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렇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의사 몰래 병원을 나왔다. 곧장 뒷길로 달려가 올리브의 자리를 확인했다. 그가 지내던 가죽 텐트는 이미 찢어지고 허물어져 있었고, 그 근처에 수많은 양의 못 보던 벽돌들이 쌓여있었다. 그가 찢어진 가죽 텐트를 대신해 임시 공간을 만드는 중인 것 같았다. 그 한가운데에는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보이는 어떤 움직이는 형체가 있었다. 올리브였다. 그는 아직도 굽은 허리로 팔과 다리를 모아 쪼그린 채 가만히 누워 숨만 쉬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 나는 그것이 올리브의 시신인 줄 알았다.


어둑어둑한 거리에 그늘이 져 있고 이곳을 밝혀주는 조명도 하나 없어 그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생기를 느끼고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말 한번 섞어본 적 없었는데 지금은 그가 너무 반가웠다. 내가 지금 너무 힘들어서일까, 죽지도 않고 돌아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가 내 삶의 유일한 버팀목처럼 느껴졌다.

빼빼 마른 이 기괴한 노숙자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는 모른다. 그가 그 이후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는 지금 어딘가에 의지하고 기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직 안 죽었네.”


올리브가 옆으로 누워서 꾸벅꾸벅 졸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것을 느꼈다. 그도 내가 반가웠던 것인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나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그의 피부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지난번보다 살은 많이 붙어있는 것 같았다. 주변엔 머리와 다리가 뜯긴 쥐 사체와 군데군데 살점이 붙어있는 뼈가 즐비했다. 올리브에게 쥐를 잡아먹고 사느냐고 묻자, 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브는 웃는 얼굴의 나무 가면을 아직도 차고 있었는데, 하관 부분이 부서져 있어 그의 피부가 다 드러났다. 그의 왼쪽 입이 심각하게 괴사하여 입안이 다 보일 정도였다. 그가 지금까지 말을 하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올리브는 팔을 허우적대며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가 사는 환경을 보니 그 이유를 알 듯했다. 내가 집에 데려가겠다는데도 필사적으로 거절하는 올리브였다. 집으로 가는 길, 몇 걸음 걷고 뒤를 돌아보니 올리브는 나를 등지고 옆으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가 나보다 몇 배는 더 힘들게 살고 있겠지. 그레이스도 죽고, 그의 몸 상태도 말이 아니다. 지금까지 버텨낸 그의 정신력이 참 대단한 것이었다. 해가 지고 밤이 깊어져 갔고, 로즈는 더 이상 그립지 않았다. 더 이상 그립지 않았다. 더 이상.


나는 너무나 괴롭고 힘든 이 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마음가짐부터 바로잡기로 다짐했다. 그저 평범하게 시계로 먹고살면 힘들 것도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반대하는 것일까, 나아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을 반대하는 것일까.


오후 열한 시.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떨리는 눈꺼풀에 눈이 잘 감기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감으려 하면 얼굴에 힘을 주어야 했던 탓에 눈 밑 근육이 아파졌다. 얼굴에 힘을 풀면 눈이 끝까지 닫히지 않고 조금씩 저절로 떠지는 것이었다. 이제는 복잡한 정서를 정리하는 것도 지친 와중에 조금 열어 둔 창틈으로 들어오는 미풍, 그리고 함께 들어오는 습기가 내 얼굴로 불어왔다. 차가운 칼바람에 콧속이 온통 얼어붙는 느낌이었지만, 그것 하나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 다시 눕는, 그런 비효율적인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몸을 돌려 창문을 등지고 누우니 바람이 이제는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그냥 창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상당히 거슬렸던 바람이 멎자 내 귀에는 풀벌레 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반복되는 잔잔한 소리에 안정을 되찾고 있던 와중, 누군가의 찰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어, 마침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더 잘 들렸던 것 같았다.


나는 듣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고 소리만으로 그 발소리 주인의 위치를 유추했다. 그 사람은 침실 창틀 앞에서 멈추었다. 곧 잠긴 창틀을 억지로 열려고 하는, 소름 돋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열리지 않는 창문을 뒤로하고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발소리를 멈춘 것은 바로 내 집 현관문 앞이었다.

발소리의 주인은 내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다시 달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겨있는 문을 따는 시도를 했고, 나는 그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


그가 문을 여는 순간 달려 나가서 덮칠까? 지금이라도 창문을 열고 탈출할까? 날카로운 도구들을 무기 삼아서 들고 있을까?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상황이 떠올랐고 내 마음은 복잡했지만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수가 느껴졌다.


그것보다 대체 누구지?…


문이 열렸다. 기어코 그 사람은 내 집 안으로 침입하는 데 성공했고, 거실을 누비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 침실에 있었고, 그가 나를 발견하려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와야 했다. 나는 숨까지 참아가며 그가 이곳으로 들어오지 않기를 빌었다. 잠긴 문을 억지로 따서 들어왔다는 것부터 그가 악의 없는 손님은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언제라도 벌컥 열려 그가 들어올지 모르는, 거실로 연결된 그 조용한 문이 너무 무서웠다.


그가 바로 옆에 있는 내 작업실 문을 여는 것이 느껴졌다. 차라리 그곳에 있는 여러 값비싼 시계와 기구들을 가져가기만 하면 좋겠다고, 그것으로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침입자와 벽 하나를 두고 숨까지 참아가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유난히 스산한 기운을 내뿜는 경첩 소리를 들었을 땐, 그것이 누군가가 내가 있는 침실의 문을 천천히 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그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소름 돋게 뜬 그의 오른쪽 눈이 나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어…, 어어…, 백작…?


그는 코번트리 백작이었는데 비로 인해 흥건히 젖은 머리, 백작답지 않은 후줄근한 옷, 그리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다급히 등 뒤로 감추는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흉기. 지금까지 내가 본 그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그는 갑자기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놀라서 그의 팔을 붙잡고 저항했다.


코번트리 백작 얼굴을 보자 내면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백작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베시!”


코번트리 백작이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베시가 누군지도 모르…


“자네가 죽였잖소!”


금발 머리 이름이 베시였던가.


“베시 테오도르! 모른 척하지 말게, 내가 다 봤소!”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베시를 죽였다고 로즈를 죽인 사람이지 않은가.

나는 계속 백작을 죽일 기회가 생기길 기다렸다. 일단 백작의 팔을 붙잡은 채 버티고 있는 힘을 푼다면 나는 죽으니, 죽기 살기로 버티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에겐 흉기가 있고 나는 맨손이었다. 이 상태로 그에게 맨손으로 덤벼드는 자살행위는 하지 않기로 했으며, 코번트리 백작을 제압하고 무기를 뺏어 그의 목을 그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얼굴에 잔뜩 주름이 졌고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네인데, 금방 탈진하겠지.


그와 힘을 겨룰수록 점점 힘에 부쳤지만, 그것은 백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천한 잡것이 주제도 모르고 연회에서 좋다고 즐길 때부터 알아봤소! 몇 번 했으면 좀 죽을 것이지…!” 그가 또다시 소리쳤다.


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소리치는 것을 끝내고 숨을 고를 때 그를 오른쪽으로 내팽개칠 생각이었지만…,

나같이 안 될 놈은 끝까지 안 되는 거였지. 밖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없어야 하는 거실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가 천천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끈적한 진흙물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너무 어두웠다. 바로 눈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는 코번트리 백작의 칼이 내게 점점 가까워졌다. 새로운 침입자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코번트리 백작의 뒤쪽으로 걸어왔다. 백작을 부여잡은 내 손이 벌벌 떨린 탓에, 그의 칼날이 매섭게 내 눈앞에서 위험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그때 코번트리 백작이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정확히 말해, 두 번째로 들어온 그 사람이 코번트리 백작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고개를 뒤로 당긴 것이었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침입자가 코번트리 백작의 목을 기다란 손으로 한 움큼에 조여버렸다.


나는 그 순간 코번트리 백작의 왼손을 보았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 까맣게 변해버린 손은 마치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연회 때와는 다른 모습. 그의 피부는 마치 들끓던 용암이 식어버리듯 돌처럼 굳어버린 모습이었다.


다른 침입자는 천천히 코번트리 백작 옆으로 자기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둘의 숨 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둘 다 불규칙한 호흡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나 역시도 그랬으리라. 딱딱한 나무판자가 코번트리 백작을 바라보았다. 섬뜩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나무판자…, 올리브! 그는 올리브였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코번트리 백작의 팔의 힘이 풀렸고,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코번트리 백작은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개입에 당황이라도 한 듯 천천히 눈을 굴려 올리브와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기습적으로 올리브에게 칼을 휘둘렀지만, 올리브는 그의 팔을 잡아 칼을 빼앗으려다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나는 코번트리 백작이 놓친 칼을 빠르게 주웠다. 무겁고 차가웠다. 손잡이엔 찐득한 액체가 흥건했다. 진흙과 피가 섞인 냄새가 났다. 나는 백작에게 다가가 그의 왼쪽 손목을 내리쳤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왼손이 바위 부서지듯 잘려 나갔고, 피 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왼손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백작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다음으로 나는 백작의 목을 노려보았다. 올리브에 의해 그의 고개가 뒤로 꺾인 탓에, 울렁거리는 그의 울대뼈가 훤히 드러났다. 코번트리 백작은 우리에게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고, 목이 잘려 나갈 공포 앞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던 건지, 그는 기어코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올리브가 그의 허리를 꽉 잡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약간 넘어진 틈을 타 빠져나온 것이었다. 백작이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은 마치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를 보는 듯했다. 시끄러웠다.


코번트리 백작은 달려 나갔다.


그를 쫓아 허겁지겁 달려 나왔지만, 코번트리 백작이 보이지 않았다. 활짝 열린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올리브의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는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었을까. 올리브는 벌써 두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주었다. 난 양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렸다. 거친 피부에 딱딱한 뼈가 그대로 느껴지는 그의 어깨가 벌벌 떨렸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고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가면을 보고 있자니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가면을 손으로 만져댔다. 아무래도 끊어진 끈 하나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난 그를 내 작업실로 데려갔다.


그때,


쾅!


코번트리 백작이었다. 그는 작업실 구석에 숨어있다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던 철판으로 올리브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올리브는 그대로 머리를 움켜쥐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시계를 수리할 때 책상에 까는 용도인 철판이었는데, 수리공의 철판 특성상 두꺼운데다 묵직하여 올리브는 곧바로 쓰러졌다.


안일했다. 집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 작업실에 숨어있었다니.


나는 다시 그에게 칼을 휘둘렀지만, 그는 그 철판으로 나를 벽으로 밀치고는 현관문 밖으로 냅다 뛰어갔다. 중심을 잡고 그를 쫓아가려고 시도했을 땐 이미 올리브가 벌떡 일어나 나보다 먼저 코번트리 백작을 쫓아갔다. 난 그들을 뒤쫓아 갔다.


코번트리 백작은 전력을 다해 달렸고, 올리브도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올리브는 코번트리 백작을 잡아내려고 긴 손을 쭉 뻗어 마구 휘두르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허탕인 것이 멀리서 지켜보는 나의 마음을 졸였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의 세 남자의 추격전은 조용하지만 치열했다. 그리고 이내 킹스크로스역 근방까지 도달했다.


코번트리 백작은 넓은 기찻길이 있는 쪽으로 달렸는데, 야간열차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기차보다 먼저 기찻길을 넘어가 올리브와 거리를 벌릴 생각인지, 그는 달려오는 기차를 보고서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올리브는 앞으로 몸을 던지며 긴 팔을 쭉 뻗어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둘은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올리브가 바닥을 기며 그의 다리를 쥐고 스멀스멀 올라와 백작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고는 백작을 끌고 다시 바닥을 기었다. 나는 멀리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들이 올리브가 어느 지점에 자리를 잡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백작은 몸부림을 쳤다. 올리브가 자리를 잡은 지점은 기찻길 한가운데였다.


괴상한 굉음을 내며 달려오던 열차는 그대로 둘을 밟아버렸고, 덜컹거리더니 겨우 탈선을 면하였다. 검게 보이는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백작이 죽었다.


“올리브!”


올리브도 죽었다.


열차 안 사람들이 창밖으로 우르르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은 전부 놀란 눈치였다.


올리브가 기차에 밟히는 과정에서 내 쪽으로 튕겨 나온 나무 가면이 멀리 떨어져 나가서 묵직한 소리를 내며 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나는 분한 마음에 칼자루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자루가 부서졌다. 울음이 터졌던 것 같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비에 볼 위를 흐르는 물방울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런던에서 로즈와 만났던 날부터 쏟아지던 얇고 가벼운 비는 어느새 굵고 무서운 비가 되어 여전히 온몸을 때려댔고, 거센 빗소리에 덩달아 울컥했다. 이제는 죽은 사람의 수를 세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번에도 나는 또 혼자만 살아남았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나 혼자 남아있었다. 난 그 자리에 서서 커다란 고함을 질렀다. 백작이 죽었다는 후련함과 올리브마저 죽어버렸다는 안타까움이 섞인 고함이었다.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내 고함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마저도 빗소리에 묻혀버렸나.


시간은 이미 너무 지체되어 있었지만, 그 뒤로는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일이 끝나고 나니 되레 덜컥 겁을 먹었다. 그저 사람들이 무서웠고, 불안정한 그런 관계는 더욱 무서웠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는가. 한 사람에게 진심이었던 적도 있었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려움에 떨었던 적도 있었다. 상쾌한 아침과 아름다운 연회도, 힘들었던 시간도 전부 하나의 경험으로 남겠지.


이제는 앞만 보고 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저 안정된 삶, 행복한 삶을 좇으며 달리지 않을 것이다. 왜 그저 시계나 만지며 먹고사는 서민인 내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내게는 안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남은 가족도 없고, 우정을 나눌 친구도, 의지할만한 버팀목도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말았다. 미련을 두고 그리워하거나 미움을 두고 증오할 사람도 없다.


고개를 올려 작은달과 눈을 마주쳤다. 얼굴을 비추는 달빛은 그리 환하지 않았다. 강렬했던 만큼이나 힘들었던 이 시기가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기나 할까?


변함없이 거리에는 아침이 찾아왔고, 존재감도 없던 어느 시계공의 정신병과 어느 노숙자의 실종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론은 오직 코번트리 백작의 죽음만을 보도했고, 내게 시계를 주문했던 몇몇 손님들만이 나의 상태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조차도 며칠이 지나면 잊는 듯했다.


사람들은 내 집 앞에 모여 환급을 요구하는 작은 시위를 벌였고, 나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우울증에 추가된 공황장애 증세와 더불어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추가로 코번트리 백작이 죽던 날 밤, 그가 내 집으로 찾아왔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문을 통해 내가 용의자로 지목되기까지 했다.


이튿날엔 수많은 경찰이 내 집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 소란에 거실 바닥 한가운데에서 털을 갈고 있던 루시가 화들짝 놀라 탁자 밑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이제는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졌다. 그들은 조사에 임하지 않는 나를 체포하러 온 것이었고, 커다란 도구를 이용해 현관문을 박살 낸 다음에야 나를 법정으로 끌고 갔다. 연행되는 와중에도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불편했다.

“본 법정은 피고인에게 2급 살인죄를 적용하여 264개월에 해당하는 22년 형을 선고한다.”


그 판사가 내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다.


결국 3심을 걸친 재판에서 2급 살인이 인정되어 22년 형을 받게 된 나는 교도소 펜턴빌HMP Pentonville에 처박히게 되었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코번트리 백작은 이미 세인트 케이든 연회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후였지만, 그런 범죄자라 한들 살인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죄 없는 올리브 또한 죽였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이런 살인죄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억울했지만 재판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명확한 알리바이도, 그곳 사람들을 휘두를 진술을 할 실력도, 그 분위기 속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이 사건의 발단이 코번트리 백작의 습격이었음을 정부 측에서 알고 있었음에도 사람을 죽인 건은 그대로 감형 없이 재판받았다.


오로지 사람을 죽였다는 결과 하나뿐이었다.


더불어 사건이 있던 날에 올리브와 코번트리 백작을 죽게 만든 기관차를 몰던 차장이 재판에서 두 사람의 투신자살이라는 증언을 했지만, 증거가 충분치 않았으며, 법원은 이 사건의 모든 잘못을 내게 떠넘겼다.


다급하게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듯 보였다. 그들은 진실보다 실적에 눈이 먼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조롱 속에서 시달리느니 22년 동안 그들의 기억에서 잊힌 채로 사는 것이 오히려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런 재판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22년이면 사람들이 날 잊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재판을 듣던 청중들이 내게 야유를 보냈다. 죄 없는 불쌍한 노숙자를 죽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분명 이전까지만 해도 초라한 병원에 가려진 뒷골목에서 쥐 나 잡아먹던 어느 노숙자의 존재조차도 몰랐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어느새 올리브 편에 서서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어느덧 수감 생활 사흘째이지만 벌써 이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래도 아직은 이런 생활이 이전의 삶보다 더 나은 것 같았다. 내 집 앞에서 소리치며 시위하는 사람들도 없고, 혹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대폭 늘어나면서 조용히 생각을 가질 기회는 많아졌지만, 아무래도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결말은 아니었다.


연회장에서 로즈와 함께 남 부러운 것 없이 행복한 인생을 살자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홀연히 떠올랐다. 로즈가 살아있다면 면회라도 왔을까? 서리 부인이 살아있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좋은 결말이길 바랐건만, 나는 끝까지 행복하지 못했다.


「얼음새꽃 : ‘슬픈 추억’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 반대로 얼어붙은 차가운 얼음을 뚫고 혼자 꽃망울을 피우며 고개를 내미는 모습은 힘들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햇빛을 보려 애를 쓰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침대에 사뿐히 누워 손에 닿는 책을 집어 들고 펼친 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얼음새꽃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고, 덕분에 로즈가 다시금 생각이 났다. 그동안의 정이 있고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아도니스의 바텐더는 분명 얼음새꽃의 꽃말이 ‘영원한 행복’이라고 알려주었다. 분명 그때는 얼음새꽃이 마냥 예쁘기만 했다. 이젠 그저 이곳에서 내가 출소할 날을 기다릴 뿐. 특별한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뼛속까지 깨달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더 이상의 앞날은 없겠지만 내게 남은 짧은 시간에서의 발전을 위해 펜을 들었다. 그리고 예전처럼 일기를 써 내려갔다. 펜이 양피지 위를 긁으며 잉크를 묻혔다.


…기대하지는 않겠지만 누구든지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와 준다거나 편지라도 보낸다면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서글픔으로 가득 차서는 사라지지도 않았던 그 수수한 향기가 이젠 짙은 허망의 잔향이 되어 몸에 배었다. 그렇게 후회와 슬픔을 한가득 삼킨 채 잠에 빠졌다.


1927년, 내겐 뜨거우면서 차가웠던 어느 가을.


그러나 정신없이 달려온 희고 흰 길 위에서 있었던 모든 일이 악몽이었다.


시월 밤하늘의 달은 마을을 향해 은은하게 온기를 내뱉고 있었다. 골목길의 잿빛 어두움을 쫓아내며 이곳까지 팔을 뻗으려는 달빛은 끝내 수감자에게 등을 돌리고, 지면을 밝히는 사람들의 빛은 아프도록 눈부시다.

나는 또렷이 보이는 달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나 이것은 이미 거짓임을 알고 있는 나의 마지막 기대였다. 굳이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로즈를 한번 보고 싶네.”


그렇게 교도소에서 보내는 세 번째 밤이 깊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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