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못하는 사람들 - 매슈 루버리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는 질문이다. 나에게 읽기란 그저 눈앞의 활자를 해독하고 그 함의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숨 쉬듯 당연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와 수용'만이 읽기의 유일한 정의라면, 나는 종종 읽기에 실패하는 사람이다. 어떤 날은 책장이 물 흐르듯 넘어가지만, 어떤 날은 단 한 문장에도 갇혀 길을 잃는다. 활자를 보고는 있지만 내용은 겉돈다. 글자를 '보는 것'과 문맥을 '읽는 것' 사이에는 분명 아득한 간극이 존재한다.
이해라는 영역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정답을 제시하려 든다. 유튜브만 켜봐도 저명한 학자나 전문가들이 등장해 '올바른 독서법'을 역설한다. 매슈 루버리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지점, 우리가 맹신해 온 '정상적인 읽기'라는 견고한 통념을 정면으로 꼬집는다.
저자는 애초에 '올바른 읽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보편적인 궤도에서 벗어난 다양한 독자들을 무대 위로 부른다. 글자가 춤추듯 일그러지는 난독증, 텍스트의 의미는 모른 채 사진 찍듯 통째로 외워버리는 과독증, 뇌 손상으로 하루아침에 활자를 잃어버린 실독증, 심지어 글자에서 특정한 맛이나 색깔을 느끼는 공감각적 읽기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세상이 규정한 '표준적인 방식'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어떤 영화감독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그는 관객이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의 노고가 들어간 작품을 어떻게 그렇게 대충 소비할 수 있느냐는 항변이었다. 창작자로서의 마음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아마 그 이유가 이 책의 메시지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는 데 있어 '유일하게 정상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활자를 온전히 읽어내지 못해도 책 표지를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집 안 가득 쌓아두는 사람도 등장한다. 과연 저자의 의도를 완벽히 분석하며 1년에 책을 단 한 권만 사는 사람과, 앞서 말한 기이한 방식으로 텍스트를 탐닉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이 문화의 파이를 키우는 데 기여할까? 나는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한다.
창작자는 소비자에게 감상의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 향유하는 방식이 다채로워야 문화가 팽창하고, 그 토양 위에서 새로운 창작자가 탄생한다. 한때 힙합이나 록 음악의 인기가 시들해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부 '순혈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서브컬처로만 남기를 바랐고, 대중적으로 성공한 아티스트를 교묘하게 깎아내렸다. 정작 자신들은 앨범 한 장 사지 않고 공연장에도 가지 않으면서, '올바르게 듣는 법'을 강요하며 새로운 리스너들을 구석으로 내몰았다. 누군가가 정답이라고 규정하는 '올바른 소비 방식'이 도리어 그 문화를 질식시키는 것이다.
책은 남들과 다르게 읽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삶이 얼마나 무참히 짓밟히는지 구체적인 사례로 고발한다. 이들은 글을 매끄럽게 읽어내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지능이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거나 집단 따돌림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뛰어난 수학적 사고력이나 비상한 두뇌 회전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저 텍스트를 인지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활자를 보편적인 속도로 소화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들을 바보라 낙인찍을 수 있는가?
특히 선천적으로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공통으로 증언하는 학창 시절의 기억은 끔찍하다. 국어 시간, 돌아가며 책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이들은 극심한 공황 발작을 일으키거나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어떤 아이는 그 끔찍한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자신에게 읽기를 강요하는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극단적인 방어 기제를 택하기도 했다. '다름'을 수용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시스템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폭력은 비단 활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나 역시 최근 비슷한 폭력을 경험했다. 누군가에게는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나는 남들 앞에서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무척 어려워하는 성향을 가졌다. 그런데 얼마 전, 목사님 댁에 방문했을 때 나는 원치 않게 찬양을 불러야 했다. 모두가 즐거워야 한다는(적어도 내게는 전혀 즐겁지 않았던) 명목 하에, 목사님은 느닷없이 나를 지목했다. 나의 내향적인 성향을 뻔히 아는 분이셨다. 다분히 폭력적인 상황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장난을 넘어 나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배려가 철저히 결여된 폭력이었다. 나는 그분을 알고 지낸 3년 만에 처음으로 깊은 인간적인 분노를 느꼈다. 단 한 번의 강요에도 이토록 수치심과 분노가 이는데,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평생을 이런 폭력적인 시선에 노출된 채 살아왔던 것이다. 그 억울함의 크기는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반면, 후천적인 요인으로 갑자기 글을 읽지 못하게 된 실독증 환자들의 삶은 또 다른 형태의 절망을 보여준다. 이들의 고통을 굳이 비유하자면, 평생 담배의 존재조차 모르고 산 사람과 지독한 니코틴 중독 상태에서 강제로 금연을 당한 사람이 느끼는 박탈감의 차이와 같다. 평생 누려왔던 활자의 세계, 그로 인해 구축된 삶의 토대가 한순간에 붕괴하는 경험이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타인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청각적 인지 과정에서조차 극심한 혼란을 겪으며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비참함에 빠진다.
우리는 흔히 '정상'이라고 규정된 다수의 시야에 맞춰 세상을 설계한다. 하지만 시야의 각도를 조금만 틀어보면, 그 보편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해 매일같이 배제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보편성의 폭력'이다. 오른손잡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왼손잡이의 일상을 끊임없이 방해하듯, 외향성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가 내향적인 사람의 침묵을 고쳐야 할 결함으로 취급하듯 말이다. 걷는 방식, 보는 방식, 듣는 방식, 그리고 읽는 방식까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의 표준들은 누군가에게는 매일 피투성이가 되며 맨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거대한 장벽이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재단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들은 결코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각자의 좁고 험난한 세계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치열하게 읽어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