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작 - XXX
나는 드라마를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한 구석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 작품들이 있다. 이종석과 박신혜가 주연을 맡았던 <피노키오>, 그리고 박서준과 김다미가 출연한 <이태원 클라쓰>가 바로 그것이다. 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세부적인 에피소드는 가물가물하지만, 두 작품을 관통하는 거대한 줄기만큼은 뇌리에 박혀 있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현실 세계의 논리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 같은 철학을 고수하는 주인공이, 오직 그 본연의 철학을 지키며 끝내 성공을 거머쥐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들은 비겁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고독이 뼈를 깎고 고난이 앞길을 가로막아도,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관조하며 가장 선한 방식을 고집한다. 우리는 이러한 인물들에게서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사실 우리 모두는 마음 한편에서 그런 인물이 되기를 열망한다. 강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하며,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던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우리는 돈과 명예라는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유혹 앞에서 너무나 쉽게 비열함을 선택한다. 그 비열함의 크기는 제각각일지 모르나, 본질은 같다. 숙제 검사를 피하기 위해 친구의 노트를 베끼는 중학생, 취업을 위해 가공의 경험을 천연덕스럽게 써 내려가는 취업 준비생,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악의적인 언론 플레이를 일삼는 정치인까지. 이들의 행위는 결국 자신의 안위를 위해 진실을 파는 행위라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XXX의 곡 '수작'이 앞서 언급한 드라마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강력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가사 속 화자는 이 씬의 시스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힙합 문화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동료애, 리스펙트, 대중을 향한 친절함 따위를 '낡고 얄팍한 위선'으로 일축한다. 화자는 세상을 조금씩 수선하려는 온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유행에 편승해 억지로 조형된 가짜들이 판치는 이 세계의 판 자체를 완전히 엎어버리고 리셋하려는 빌런의 위치에 스스로를 세운다.
분노를 터뜨리면서도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서늘한 조롱은 곡의 타격감을 극대화한다. "너희들이 하는 짓은 뻔히 보이는 수작이고, 내가 만드는 것은 잘 만든 수작이다." 이 언어유희는 단순한 자부심을 넘어, 상대방의 위선을 발가벗기고 그 밑바닥을 전시하는 폭력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여기서 화자가 보여주는 오만함은 근거 없는 허세가 아니라, 타협의 유혹을 뿌리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늘한 고결함의 반증이다.
이 곡의 진짜 가치는 화자의 시선이 외부뿐만 아니라 자기 내부를 향할 때 드러난다. 그는 타인의 얄팍한 돈 자랑을 비웃지만, 동시에 자신도 음악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스스럼없이 고백한다. 대중은 그의 음악을 난해하다며 밀어내고, 화자는 그런 자신을 천재나 연예인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명작들을 정독하는 음악 하는 학생 정도'로 스스로를 격하한다. 이는 자학에 가까운 철저한 자기 객관화다.
그는 씬에 널린 수작을 비웃으면서도, 자신의 음악 역시 대중의 입맛에는 '먹힐 듯 안 먹히는 애물단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특히 가사의 절반을 영어로 채우면서 "한국에서 뜨겠다"고 말하는 자신의 모순을 무자비하게 찌르는 대목은 이 곡의 백미다. 세상을 비웃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해체해버리는 이 태도는, 화자를 단순한 분노 조절 장애자가 아닌 고뇌하는 예술가로 격상시킨다.
과거의 화자는 작품 속에 수많은 재미와 디테일을 정성껏 숨겨두었을 것이다. 누군가 발견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심어둔 그 씨앗들은, 그러나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썩어버렸다. 여기서 기인한 깊은 상실감과 패배감은 화자를 소통 거부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널 위해 준비했어, 근데 알아듣지는 마."
이 모순적인 문장은 대중을 향한 냉소이자, 소통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자의 비명이다. 친절하게 떠먹여 주는 짓 따위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사실 "나를 제발 알아봐 달라"는 외침의 가장 아픈 변주다. 결국 그는 대중을 향해 "너네 대체 왜 그러냐"고 힐난하다가, 화살을 돌려 "나는 대체 왜 이러냐"고 자신을 쏘아붙이며 곡을 맺는다. 타협하지 못한 자가 맞이하는 결말은 이토록 찝찝하고 고독하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둘 중 하나다. 시스템을 증오하며 거부하거나, 시스템을 숭배하며 받아들이거나. 전자의 길은 고단하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고난 끝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지만, 현실의 수작들은 대개 가난과 무관심 속에 사그라진다. "딱 한 번만 비열해지면 편해질 수 있다"는 유혹은 매 순간 우리를 흔든다.
하지만 그 선을 넘는 순간, 돌아갈 수 있는 다리는 끊어진다. 타협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돈을 포기해야 하고, 돈을 포기하면 사랑을 지키기 어려워지며, 결국 사랑을 잃으면 세상을 살아갈 원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삶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타협하지 않고도 살아남은 이들은, 어쩌면 스콧 피츠제럴드의 말처럼 그저 남들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 행운이 따르지 않는 대다수의 인간은 타협하거나, 혹은 고립된다.
결국 수작을 부리지 않고 수작을 남기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 이상의 고결함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결함과 모순을 똑바로 응시하는 용기이며, 고립을 형벌이 아닌 훈장으로 여기는 강인함이다. XXX의 수작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애물단지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불화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면 오늘도 누군가의 숙제를 베끼며 안락한 타협의 침대에 누워 있는가?
이 곡이 끝난 뒤 남는 불쾌한 잔상은, 우리가 외면해 온 비겁한 자화상을 목격했을 때 느껴지는 필연적인 감각일 것이다. 수작을 부리지 않는 삶은 비록 가난할지언정,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가장 선명한 수작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곡은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