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유실물 센터에서 쓴 기록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by 요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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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마주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습기 찬 편의점 유리창과 코끝을 스치던 야간 공기가 먼저 생각난다. 스물네 살, 인생의 잠시 멈춤 버튼이었던 휴학 시기에 나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어제 일처럼 생경한 그 새벽의 공기들이 벌써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는 사실이 가끔은 믿기지 않는다.


본래 나는 해가 뜨면 눈을 뜨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생존을 위해 생체 리듬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아침 9시에 남들이 하루를 시작할 때 잠들고, 오후 3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일어나는 기이한 삶을 살았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한다면 결코 엄두도 내지 못할 그 고단한 생활을, 당시의 나는 무려 1년 동안이나 묵묵히 이어 나갔다.


사실 육체적으로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밤낮이 바뀐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고역이었을 뿐, 손님이 뜸한 새벽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다. 7시간의 근무 시간 중 서너 시간은 계산대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다. 내 기억 속에 남은 진상 손님은 고작 한 명뿐일 정도로 평온했던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읽었다.


그로부터 1년 혹은 2년 뒤였을까. 이 소설이 일본에서 실사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극장을 찾았다. 나는 본래 글자가 영상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원작의 문장이 스크린의 미장센으로 어떻게 번역되는지, 배우의 눈빛이 내가 상상하던 문체의 온도와 일치하는지 비교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영화는 원작을 훌륭하게 구현해 냈지만, 나에게 있어 영화가 원작의 감동을 초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았던 이유는 텍스트와 영상의 상호작용 그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최근, 나는 이 영화가 한국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마 내가 삶의 또 다른 소용돌이 속에서 바쁘게 지내던 시기와 겹쳐 미처 소식을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히 여자친구와 함께 간 만화 카페에서 나는 들고 있던 만화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OTT 플랫폼을 통해 한국판 리메이크작을 마주했다.


주인공들의 이름과 배경은 달라졌지만, 작품의 척추가 되는 서사는 변함이 없었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서윤과 그녀의 곁을 지키는 재원의 사랑 이야기.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사랑도, 슬픔도,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도 사라져 버리는 잔인한 현실 속에서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서로를 붙잡는다.


서윤의 삶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기록의 숭고함을 느꼈다. 서윤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취미나 회고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 그 자체이며, 흩어지는 자아를 한데 모아 유지하는 유일한 끈이다. 그녀는 매일 아침 텅 빈 화면 앞에 서서, 어제의 자신이 남긴 활자들을 통해 오늘의 자신을 재구성한다. 기록이 없으면 그녀의 내일에는 ‘나’라는 주체가 존재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서윤의 기록은 나의 글쓰기와 맞닿아 있다. 나 역시 글과 문장을 통해 나의 기억과 정체성을 구축한다. 휘발되기 쉬운 찰나의 감정들을 문장이라는 박제 속에 가두어 보존하는 것. 그것이 내가 감상문을 쓰고, 일기를 남기며, 끊임없이 활자를 생산해 내는 이유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망각에 저항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나는 과거에 썼던 습작들을 다시 꺼내어 수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다시 마주한 과거의 문장들은 놀라울 정도로 우울했고, 지금의 내가 보기엔 참으로 엉망인 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형편없는 글들을 그냥 ‘그때의 기록’으로 남겨둘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더 나은 필력을 갖추기 위해, 그리고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나는 기꺼이 그 글들을 고치기 시작했다.


과거의 기억과 그 안에 담긴 핵심적인 감정은 그대로 두되,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흡을 다듬고 단어와 단어의 연결을 매끄럽게 수정하는 작업은 예상외로 즐겁다. 이는 단순히 오타를 고치는 작업이 아니다. 과거의 파편들을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조립하는, 일종의 ‘기억 심폐소생술’과도 같다. 서윤이 매일 아침 일기를 읽으며 자신을 업데이트하듯, 나 역시 퇴고를 통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화해시키고 있다.


영화 속에서 기억을 잃는 서윤이 자신의 삶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면, 재원은 그녀를 위해 매일매일 새로운 에피소드를 창조한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대비다. 서윤의 기록이 ‘상실을 막기 위한 방어적 투쟁’이라면, 재원의 행위는 ‘행복을 선물하기 위한 능동적 창작’이다.


치열한 기록과 다정한 창작이 만날 때, 비로소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완성된다. 기억과 창작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 같지만, 결국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는 가장 친밀한 동반자다. 기록이 사실의 뼈대를 세운다면, 창작은 그 위에 감정의 살점을 붙인다.


스물네 살, 편의점의 차가운 조명 아래서 이 책을 읽던 청년은 이제 스물여덟의 성인이 되어 자신의 글을 다듬고 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기억이 유실되었겠지만, 그때 읽은 책의 문장들과 그때 느낀 감정의 파동은 기록을 통해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설령 오늘 밤 세계에서 많은 것이 사라진다 해도, 내가 남긴 이 문장들이 나를 증명해 줄 것이라 믿는다. 기록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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