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할 수 없는 삶을 껴안는 방식에 대하여

기사단장 죽이기 - 무라카미 하루

by 요아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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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이 문장은 절반만 맞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내 방'이라는 철저히 구획된 공간에 홀로 남겨지는 것을 즐긴다. 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지인들은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지만, 그들은 종종 한 가지 착각을 한다. 내가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고 믿는 것이다. 집과 방은 엄연히 다르다. 단순한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나, 누군가와 함께 숨 쉬는 집과 홀로 존재하는 방 사이에는 아득한 심리적 간극이 존재한다. 혼자 자취를 하던 시절에는 집이 곧 방이었고 방이 곧 집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사는 지금의 집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집과 방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다름 아닌 통제권이다. 거실이나 주방 같은 공용 공간은 나의 의지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타인이 존재하는 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자유는 유보된다. 갑자기 좋아하는 음악의 볼륨을 크게 높인다거나,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소리를 지른다거나, 아무렇게나 누워 천장을 응시하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타인의 시선이 닿는 밖에서는 더더욱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러나 방문을 닫고 혼자 남겨진 내 방에서는, 이웃집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이 모든 해방이 허용된다. 즉, 팽창하는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내가 완벽하게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영토는 고작 이 몇 평 남짓한 방이 전부인 셈이다. 이 작은 공간 안에서만큼은 타인의 색채에 간섭받지 않고, 오롯이 나라는 존재의 밑그림을 칠할 수 있는 유일한 화가가 되는 것이다.


방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전무해진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나는 나 자신의 생조차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을 찬찬히 되짚어보면, 단 한 번이라도 완벽하게 나의 예상대로 플롯이 전개된 적이 있었던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낯선 중학교의 교복을 입었고, 계획에 없던 고등학교의 문을 열었으며, 머릿속에 그려본 적 없던 전공과 대학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마주친 수많은 일들과 인연들 역시 나의 얄팍한 시나리오를 가볍게 비웃듯 불쑥불쑥 내 삶에 개입했다. 물론 그 우연한 시간들이 무의미했다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삶의 서사가 내가 처음에 의도했던 방향대로, 조금만 더 예측 가능한 개연성을 띠고 흘러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은 좀처럼 떨쳐지지가 않는다. 필시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결말을 향해 걷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내가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여 다른 모습이 되었다 한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예상치 못한 전개는 기어코 튀어나왔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폭주하며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와 같다. 어차피 어떤 길을 걸었어도 나는 매번 낯선 전개 속에서 허우적대며 내 손으로 직접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무너지지 않고 삶의 패턴을 새로이 구축하며, 어떻게든 이 벅찬 생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자신의 삶을 단 한 치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두꺼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주인공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독자가 스스로를 투영할 수 있도록 이름표를 비워두는 것은 하루키 소설의 익숙한 작법 중 하나다.) 초상화가로서 캔버스 위에 완벽한 구도를 잡듯 평온했던 그의 일상은, 어느 날 갑자기 던져진 아내 유즈의 이혼 통보로 산산조각 난다. 의도치 않게 익숙한 터전을 떠나 낡은 자동차를 끌고 정처 없이 표류하고, 낯선 곳에서 우연히 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다. 그러다 미술계의 거장이었던 대학 동기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의 산속 빈집에 고립되듯 정착하게 된다.


그 산꼭대기의 작업실에서 그는 정체불명이지만 묘하게 시선을 끄는 백발의 이웃 멘시키를 만나고, 멘시키의 딸로 추정되는 소녀 마리에와 얽히게 된다. 급기야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이데아(기사단장)와 현실의 상처를 형상화한 메타포(얼굴 없는 남자)의 세계를 넘나들며 생사를 건 모험을 한다. 훗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기적처럼 재결합하고, 자신이 낳지 않은 그 아이를 온전히 자신의 딸 무로로서 뜨겁게 사랑하게 되기까지. 주인공의 삶은 그야말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의 연속이었다.


이것은 단지 그가 소설 속 주인공이기 때문에 겪는 작위적인 사건들이 아니다. 우리네 인생 자체가 그렇다. 빈 캔버스 앞에서 대상을 어떻게 그려낼지 한참을 막막해하다가도, 일단 붓을 쥐고 첫 선을 긋기 시작하면 결국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훌륭한 초상화를 완성해 내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말이다. 우리의 삶 역시 통제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 속에서도, 일단 부딪히고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지게 마련이다.


결국 이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을 껴안는 가장 올바른 태도란 무엇일까.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를 관통하는 단단한 철학처럼, 삶이 내게 무얼 던져주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이다. 무언가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진 것을 과감하게 내어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주인공이 캄캄하고 눅눅한 메타포의 강을 건너기 위해, 마리에를 지켜주던 상징과도 같았던 펭귄 인형을 뱃사공에게 기꺼이 내어주었던것처럼. 뼈아픈 상실을 대가로 지불하지 않고서는 결코 다음 챕터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생의 잔인한 이치다.


이러한 수용과 희생의 태도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도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처음 누군가를 대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겉모습이나 단편적인 성격, 혹은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 내 마음의 캔버스 위에 '이 사람은 대략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고 섣부른 스케치를 끝내버린다. 하지만 관계의 심연으로 한 걸음 들어갈수록, 상대방은 나의 납작한 예상을 철저히 빗나가는 전혀 다른 얼굴과 날것의 감정들을 불쑥불쑥 들이민다.


때로는 서로의 가장 밑바닥을 확인하는 처절하고 피로한 갈등을 겪기도 하고, 도무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의 깊은 상처를 목도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소설 속 지하에 뚫린 메타포의 통로와 같다. 좁고 어두우며, 숨이 막힐 듯 답답한 그 감정의 터널 앞을 마주하면 누구나 도망치고 싶어 진다. 하지만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이어가려면, 피하고 싶은 그 어둠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치열하게 부딪혀야만 한다. 그 고통스럽고 답답한 이해의 강을 기어코 건너고 났을 때에야,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의 얄팍한 스케치를 지우고 훨씬 단단하고 입체적인 유화로 덧칠해진다.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평온한 일상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에 예고 없이 거대한 상실과 변화가 찾아왔을 때, 우리가 쥘 수 있는 선택지는 결국 두 가지뿐이다. 그것을 철저히 피할 것인가, 아니면 상처받을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온몸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완벽해 보이는 이웃 멘시키는 철저하게 진실을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마리에가 자신의 핏줄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을 곁에 둔 채, 확고한 진실을 파헤치는 대신 골짜기 건너편 저택에서 망원경으로 그녀를 관망하는 안전한 길을 골랐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화려하고 견고한 성 안에 남기를 선택한 그는 결국 끝까지 마리에를 바라만 보는 고독한 관찰자에 머물렀다.


반면, 주인공은 진실을 받아들이는 거친 길을 택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혼란 앞에서도 그는 기꺼이 무의식의 구덩이 속으로 밧줄을 타고 내려갔고, 목숨을 걸고 메타포의 어둠 속을 헤맸다. 그 처절한 수용의 결과, 주인공은 아내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인 무로를 자신의 진짜 삶으로 끌어안고 진심을 다해 사랑하게 되었다.


멘시키와 주인공 중 누구의 선택이 옳고 그른지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철저히 통제된 고립이 주는 매끈한 안정감도, 상실과 흙투성이가 된 채 뒹구는 일상이 주는 거친 충만함도 각자의 무게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삶이 불쑥 던지는 낯선 문제들을 피해 안전한 방 안으로 도망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히고 구르며 뒹군 끝에 기어이 다시 나의 평온하고 단단한 일상을 씩씩하게 살아내라고. 그것이 결국 내 삶의 붓을 쥐고 있는 창조자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책임감일 것이다.


내 삶의 지나온 궤적을 찬찬히 되짚어보면, 언제나 나의 일상을 뒤흔들었던 굵직하고 낯선 변화들은 푸른빛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의 문턱에서 싹을 틔웠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마다 내 삶의 플롯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거칠게 방향타를 꺾곤 했다.


다가오는 이번 초여름의 바람이 또다시 내게 어떤 낯선 메타포를 실어 올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것이 또 한 번의 당혹스러운 상실의 형태일지, 아니면 방울 소리처럼 울리는 새로운 시작의 신호일지. 분명한 것은 예전처럼 내 방이라는 통제된 우주에만 숨어있지는 않겠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기꺼이 문을 열고 나가 그 낯선 파도를 씩씩하게 온몸으로 맞아보려 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거대한 캔버스를, 그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나의 색깔과 나의 붓터치로 꽉 채워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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