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계속 정선으로 가는 이유

by 누리달

늘 마음 한편에서 보글거리는 걱정과 불안의 스위치를 잠시 껐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진정한 휴식시간을 정말 오랜만에 마련했다.

회의, 운전, 식사, 전화, 자료, 메시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동시에 여러 일을 쳐내다 보니, 어느새 일의 우선순위는 흐릿해지고, 하루는 늘 소란스러웠다.

‘진짜 쉼’이란 결국 나를 만나는 시간,

누군가와의 약속을 잡듯 나 자신을 위해 일부러 비워두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휴가였지만 동이 트기 전 출발하여 뻥 뚫린 고속도로를 무념무상으로 내달렸다.

사실 세 시간을 어떻게 운전해야 할지 조금은 막막했다. 그런데 내가 지루할까 봐서였을까?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렇게 더블체크에 만전을 기했건만, 새벽부터 업무 전화가 걸려왔다.

‘하, 이 시간에? 하필 오늘?’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일을 처리하며 달리다 보니 인지하지 못했던 남은 거리 숫자가 훅 줄어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일은 잘 해결되었고, 시작이 어찌 되었든..

오늘은 한 번에 하나만 하면 되는 날이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굽이치는 산골 도로로 들어섰다.
막힘은 없었고, 오랜만에 듣는 히사이시 조의 오케스트라 음악이 겨울 풍경과 참 잘 어울렸다.

여정에 오른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에너지를 재정렬 하고 있음을 느꼈다.


몇 년 전 처음 정선을 찾았을 때부터, 정선을 가로지르는 왕복 이차선 도로를 달리는 시간이 좋았다.
산에 인접한 지역은 많지만 이곳은 도로가 유독 산과 가까이 맞닿아 있다.

숲 속을 달리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웅장한 산세 아래에서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치 산이 나를 품어주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이 있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다소 낡은 초록색 표지판에 적힌 낯선 지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에 찌든 외지인에게 그 이름들은 묘하게도 몽글몽글한 감정을 건넸다.


'여량'

본래 구 한말시대 면사무소 소재지로 본리는 지형이 사통오달(四通五達)으로 산자수명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어 식량이 남아 돈다기에 지명을 글자 그대로 여량(餘糧)이라 부르게 되었다.



'숙암'

옛 맥국(貊國)의 갈왕(羯王,가리왕)이 고된 전쟁을 피하여 정선 이 지역에 머물며 암석 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숙면을 취했다 하여 유래된 숙암리(宿岩里).



정선을 꾸준히 찾게 되는 것도 어쩌면 그만큼 쉬고 싶었던 마음이 쌓여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은 같은 여행지를 계속 찾게 만든다.

낯설지 않아서 마음이 놓이고 내 에너지를 오롯이 내게 쓰며, 그래서 더 깊이 휴식할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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