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너흰 조금 쉬어
저는 [ ]랑 같이 살아요.
남편? 하아, 네, 아직 같이 살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원한 답은 아니에요. 강아지? 강아지 귀엽지. 그렇지만 저는 발랄미보다는 우아미를 추구하는 편이에요. 그럼 고양이? 네, 저는 고양이랑 같이 살고 있어요. 여러분, 고양이는 완벽하게 사랑스럽답니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면 당장 실행하시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햄스터, 도마뱀, 거북이 등으로 이미 보호자와 합의 보셨던 분들, 옳지 않아요. 고양이는 대체 불가입니다. 행복을 유예하지 마세요.
저는 [ ] 자격증이 있어요.
운전면허요? 네 있어요. 교사자격증? 물론 있죠. 그 덕분에 여러분을 만나고 있어요. 요리사? 바리스타? 포크레인 기사? 제가 그렇게 유능해 보이는군요. 고마워요. 하지만 모두 없어요. 컴퓨터 자격증? 네, 있어요. 그런데 역시 답은 아니에요. 왠지 맞히기 어려운 문제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넣은 문제인데, 이건 그냥 궁금한 채로 남겨 둘게. 신비주의 컨셉이라고 해두자.
저는 [ ] 같은 존재를 꿈꿔요.
완벽한? 강력한? 보석 같은? 미안하지만 그 반대예요. 저는 1층 서쪽 끝 교무실 음지에 서식 중인데 그곳이 마음에 들어요. 이끼? 뭐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저는 먼지 같은 존재를 꿈꿔요. 어디 있어도 크게 티 나지 않는 그런 거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존재감이 없으려면 맡은 일을 묵묵히 잘 해내야만 가능하답니다. 저는 여러분이 졸업한 후에 ‘중3 때 국어 선생님이 누구였더라?’라고 생각하길 바라. 잊힐 수 있는 사람, 그거 쉽지 않은 목표다.
저는 매일 [ ] 해지고 있어요.
성장하고 있어요? 아, 성장이라니 정말 예쁜 말이다. 제가 매일 부피가 커지고 있기는 한데 그것도 성장으로 쳐주나요? 그럼 너무 고맙고. 튼튼해지고 있어요?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보기와 달리 약골입니다. 예뻐지고 있어요? 어머, 우리 예쁜이 사회생활 잘하는 거 봐. 너의 그 말은 뼈에 새길게. 그러나 정답은 아니에요. 음... 마지막 질문의 답은 사실 좀 부끄럽고 망설여지고 자신 없기도 한데 용기 내서 말해볼게. 이건 너희에게 하는 고백이자 나에게 하는 다짐이거든.
저는 매일 친절해지고 있어요. 절대적이고 객관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제보다 오늘 더 친절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답니다.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수업을 하다 보면 가끔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수학 문제를 푸는 아이가 있거든. 그럴 때 당연히 마음 상하지. 그런 학생을 보면 예전엔 ‘웃겨, 국어도 못하면서 영어 단어를 외운다고? 너처럼 공부하면 결국 국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해. 예의 없이 뭐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하지만 이제는 ‘학원 숙제가 급했나 보네. 숙제를 안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노력하네,’라는 생각도 하게 돼. 엎드리는 아이가 밉기만 한 게 아니라 ‘수업을 견디려면 얼마나 힘들까. 그래도 꼬박꼬박 학교에 오다니 대단하다.’ 싶어. ‘집에 큰일이 있는 걸까, 친구랑 싸운 걸까.’ 걱정되기도 하고. 남 앞에 서는 걸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면 말하기 수행평가가 얼마나 부담이 될까 싶어서 안쓰럽고 미안해져.
몸이 안 좋으면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와서 말해 줄래? 대답하기가 어려우면 “갸우뚱” 해 줄래? 졸리면 언제든 뒤에 나가서 서 있거나 살짝 걸어도 돼. 물도 마시고 음료도 마셔. 공부하는 거 힘든데 사탕이나 초콜렛처럼 냄새 없고 소리 없는 간식은 당연히 먹어도 돼.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아 졸고 있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어, 자겠다고 작정한 게 아니잖아, 너무 졸려서 자기도 모르게 잠든 거잖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발표가 부담스러우면 마음속으로 대답을 해봐. 학교도 공부도 너무 버겁다면 그럼 너만의 작은 목표를 세우고 지켰으면 좋겠어. 그래서 수업 시간에 꼭 한 번은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 너에게 찾아오면 좋겠어. 등등... 많은 말을 하게 돼. 그 말 뒤에 자꾸만 여러 경우의 수를 더하게 돼. 네가 어떤 세상에 있는지 모르니까 말이야.
해가 갈수록 너희를 대하는 게 어려워져. 망설이고 머뭇거리게 돼. 반드시 되짚고 곱씹고 후회하게 돼. 그런데 말이야, 함부로 퉁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 힘들고 복잡한 마음이 나를 아주 조금 더 친절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 내 속이 시끄러워지는 것만큼 덜 실수하게 될 거라고 믿어. 내가 교사로 살면서 분명히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변화는 이것뿐이야. 그래서 이 어려운 여정이 싫지 않아.
지금, 계속 노력해 보겠다고 고백하고 다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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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시간에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패스를 하고 싶다면 다음의 규칙에 따른다.
하나. 검지를 준비한다.
둘. 검지를 머리에 대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셋. 최대한 명랑하고 사랑스럽게 외친다. “갸우뚜웅~”
중학생이 위의 차례를 지켜 ‘갸우뚱’이라고 내뱉는 것은 목숨과도 같은 가오를 져버리는 일이다. 미안하지만... 고민하고 도전하는 성장의 기회를 버리려면 이 정도의 기회비용은 감내해야지.
“선생님, 이거 배려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