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좀 버겁기도 했어

은유의 글쓰기 수업 <메타포라 14기> 2차시 후기

by 지르셔 꽤


은유 아직 이야기 안 하신 분이 좀 말해 볼까요? 먼지?

먼지 네? 아, 저는 정체성에 맞게 가만히 있었는데요. 하지만 열심히 들으며 부지런히 배우고 있었어요.

음... 저는 이 글에서 부모님이 글쓴이에게 밥을 차려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전에 이사를 위한 행정 절차를 처리할 때와는 달리 능숙하게 빠른 속도로 밥상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두 사람이 세상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무능한 노인들이 아니라 여전히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존재들임을 알 수 있었어요. 앞뒤 장면의 완전히 다른 속도감이 좋았어요.

이 글의 대부분은 부모님을 묘사하고 있고 글쓴이의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는데, 마지막 단락에 ‘곁에 있다고 늘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이해한다고 해서 지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마 함께 흔들리며 서로를 지탱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라는 표현이 나와요. 제목과 연관된 부분인데 여기서 글쓴이의 모습을 조금 짐작할 수 있었어요. 사회의 시스템에서 내쳐진 부모를 개인이 지탱하며 지치기도 할 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척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었는데요. ‘부모님의 옆을 지키며 맞닥뜨린 것은 내 부모의 늙음과, 늙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람을 밀어내는 세상의 문법이었다.’라는 문장이 이사를 계기로 내가 부모의 늙음을 인식하게 된 것과, 나이 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내쳐지는 현상을 단적으로 담아낸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추구미인 구석 자리의 ‘먼지’로 가만히 가라앉아 있고 싶었으나 그 위태로운 평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무엇이든 말해야만 했다.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이 수업의 규칙이었다. 들숨의 글에 대해 저 세 가지를 말했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온전하게 잘 꺼내 놓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빠른 속도로 질문과 평가와 조언을 주고받는 합평의 문법’에 당황하며 대화에서 기꺼이 밀려나 있었고, 마침내 호명이 되어 입을 열어야 했을 때는 무언가 그럴듯한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긴장이 되었다. 사실 나를 메타포라로 이끈 것은 팔 할이 바람(작가님을 만나고 싶다는)이었고, 수업에서도 ‘학인 먼지’보다 ‘성공한 덕후 1’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은애하는 작가님 앞에서 ‘좋아해요, 팬이에요’ 따위의 고백이 아니라 ‘이게 겨우 나예요’라는 자백을 해야 했으니 얼마나 부담이 되었겠는가. 그러니 그 순간 내 머리와 입이 무사히 협응을 해냈었는지에 대해 자신이 없다. 위에 적은 이야기도 어쩌면 그때의 내 말이 아니라 다만 생각을 옮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합평은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누구도 서로를 재촉하지 않았고, 묻고 싶고 듣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어쩐지 숨이 찼다. 두 시간 반은 스무 명이 다섯 편의 글을 함께 읽고 나누는 데 넉넉한 시간이 아니었다. 글의 구조와 표현을 살펴보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며, 더듬고, 짐작하고, 머무르기도 할 겨를은 부족했다. 특히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도 ‘가족의 형태’를 지키기 위해, 평범한 ‘딸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피해자’조차 되지 못한 뚜기의 이야기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녀의 떨리는 음성으로 들었을 때 나는 글 이야기 같은 건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 전개나 표현의 모호함 같은 건 나중에 나중에 고쳐도 좋을 것 같았다. 뒤이어 바람도리가 아동기의 성폭력 피해와 정신적 외상, 끊임없이 파생되는 고통과 치유를 위한 노력을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주었을 때 나는 아득하고 참담해졌다. 어린아이에게 펼쳐진 미래의 모든 순간이 분투가 되어 버린 것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이토록 흔하다는 것이 화가 났다. 고통을 글로 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은유의 많은 글들에서 배운 터라 두 글 모두 진심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었으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바람도리의 정돈된 문장에 눌러 담긴 밀도 높은 서사가 버거웠다. 끊임없이 자신의 고통을 파헤치고 들여다보아야만 쓸 수 있는, 그래서 겨우 살아낼 수 있었을 그녀의 삶이 보였다. 바람도리의 글 역시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을 바꾸고 덜어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들어주고 싶었다.



나의 부캐는 국어교사이다. (본캐는 하찮고 사나운 개으름뱅이) 일반적 예상과 달리 텍스트를 접하는 일상의 여러 장면에서 맞춤법 오류나 비문쯤은 가볍게 보아 넘긴다.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려는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껏 격려해도 마냥 어렵게 느껴지는 게 글쓰기가 아니던가. 나는 또 여러 장르 중 특별히 에세이를 편애하는데, 상상보다는 실재에 마음이 가는 현실주의자여서 그런 듯하다. 작가의 독백을 따라 삶의 한 장면을 만나고 그것에서 길어 올린 생각을 듣는 것이 좋다. 아름답거나 인상적인 표현을 보면 플래그 스티커를 붙여가며 동경도 하고 질투도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소심한 먼지에, 연쇄 감정이입마에, 흐린 눈 대장에(안 볼란다, 안 볼란다.), 좋은데?를 남발하는 산문 애호가로서, 아무래도 나는 함께 읽고 쓰자고 모인 학인으로서는 낙제점이다. “먼지가 말해볼까요?”하는 다정한 재촉 뒤에 겨우 입을 열지 않았나. 그 부드러운 압박마저 없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한마디도 않고 집에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입을 열었건 열지 않았건 집에 오면서 했던 생각은 같았을 것이다.



오, 이게 어른의 글쓰기구나. 쓰고 싶은 사람의 글은 다르구나. 수업에 오길 잘했어. 역시 좋았어. 진짜 좋았어. 물론 좀 버겁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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