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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보영 Sep 19. 2017

효자동 벽화마을, 여행은 걷는 것

부자여행 : 춘천편 #05

늦은 점심이지만 정말 맛있는 선물을 받은 듯 행복했다. 


우리는 맛있는 막국수를 먹었고 정감어린 춘천시장의 사람들을 만났다. 부른 배를 통통거리며 시장을 한바퀴 돌아본 다음 우리는 먼저 숙소에 들러 짐을 부리고 효자동 벽화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우는 걸으면서 서울에 있는 할머니에게 안부전화를 드렸다. 할머니도 같이 오고 싶었지만 증조할머니가 편찮으셔서 동행하지 못해 아쉬워하셨다. 


시장에서 효자동으로 가는 길은 조금 황량했지만 2월 말치고는 그다지 춥지 않았다. 공기는 맑았고 구름은 없어서 햇살이 따사로왔다. 작은 개천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자 곧 효자동이 나타났다. 우선 마을 초입에 위치한 동사무소에 들러 효자동에 대한 정보를 얻기로 했다. 평일 낮의 동사무소였지만 직원들만 제자리를 지키고 일을 하고 있었고 민원인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등장이 눈에 띤 모양이었다. 중간 자리쯤 앉아있던 직원 한 분이 무슨 일 때문에 오셨냐며 물었다. 우리는 춘천을 여행하는 사람들인데 여기 벽화마을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고 지도가 있으면 얻으려고 한다고 했다. 따로 지도는 없고 춘천 관련 지도만 내주었다. 대신 골목 가는 길이나 방향을 어떻게 잡는 게 좋을지 조언해 주었다. 정성스런 말씀도 고마웠지만 따뜻한 사무실이라 더 좋았다. 춥지는 않았지만 밥 먹고 나서 계속 걸었던지라 진우나 나나 조금 힘들었다. 나보다 더 힘들지 모를 진우를 응원했다. 


“진우야, 여행은 걷는 거야.
그래야 천천히 주위를 둘러 볼 수 있고 사람들도 만날 수 있거든”


이날 처음 한 이 이야기는 진우에게 각인되었는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동생 연우에게 몇 번이나 여행은 걷는거라는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한산한 동네 민원실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우린 양 쪽으로 갈라지는 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때부터 등장하는 예쁜 그림들이 진우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효자마을 낭만골목”이라는 그림글자가 이곳이 우리가 찾던 그곳임을 알려주었다.


효자동은 조선시대 춘천에 살던 반희언이라는 효자의 효행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제철과일조차 귀했던 조선시대에 반희언이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는 병들고 늙으신 어머니를 위해 추운 겨울 지금도 구하기 어려운 산삼과 딸기를 구해 드렸다. 불가능에 가까운 반희언의 효행은 곧 임금의 귀에 들어갔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임금은 이 마을에 효자문을 세워 주었고 이로써 마을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마을에서나 있을 법한 효자이야기지만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우리 아들 진우도 이런 효행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내 부모님께 효자인가? 아니 적어도 불효는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보았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반추해 보건데 역시 나는 불효자에 가깝다.


진우와 나는 때이른 봄바람을 온몸에 받으며 벽화가 가지런히 그려진 마을 골목을 즐겁게 돌아다녔다. 그림 한 장 한 장 진우와 함께 최대한 사진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있었다. 사진 찍는 재미조차 없던 진우는 경사진 골목길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거세진 바람을 피해갈 요량으로 마을 꼭대기 쯤에 위치한 문화회관에 들어갔다. 그곳 쉼터에서 진우는 배터리가 방전된 듯 벤치에 뻗어버렸다. 문화회관은 인적없이 조용했다. 정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위치한 거대한 출입문에 “지금은 공연준비중 입니다”라는 표식이 있을 뿐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빼꼼히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때 벤치에 누워있던 진우가 나타났다. 작은 목소리로 “아빠 들어가시면 안되요”라며 내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안쪽이 궁금했는지 내 밑으로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진우머리가 다치지 않게 문을 조금 더 열 수밖에 없었다. 


안쪽은 어두웠지만 무대 위는 밝았다. 이왕 문이 열린 김에 몸까지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닫았다. 엉겹결에 진우와 나는 공연을 준비하는 무대를 볼 수 있었다. 공연의 내용은 3.1만세운동이었다. 오늘이 바로 만세운동이 벌어진지 3일 전이었다.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한 공연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무대 가운데 가장 뒤쪽이었고 그 옆에는 무대를 총괄하는 스텝들이 연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무대 위에는 많은 연극인들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연극은 이미 한 번인가 접해본 진우라서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내용은 새로운 것이었다. 마침 무대 위에서는 만세운동을 벌이던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일제헌병경찰이 무차별 난사를 하던 장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고 그 사이 유관순 역으로 보이는 여자연기자가 홀로 남았다. 무대는 그 연기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두워졌고 여자연기자 혼자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막 대사를 하려던 참에 무대 위 모든 불이 켜졌다. 이내 감독으로 보이는 남자분이 공연에 대해 이야기했고 앞 쪽 객석에 있던 사람들도 한 마디씩 했다. 연기자들보다 더 진지한 스텝들의 말과 행동에 우리 존재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진우와 내가 염탐꾼처럼 느껴졌다. “진우야. 나가자” 진우를 이끌고 들어올 때처럼 몰래 빠져나왔다.


“진우야 연극이 무슨 내용같아?”

“몰라요”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으이그 이 녀석아. 사실 그 짧은 순간에 본 연극의 내용이 뭔지 물어본 건 억지였다. 내 지나친 욕심일 뿐이었다. 나와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분명 아까 있던 곳인데 아까와는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다른 게 보였다. 김구, 윤봉길, 유관순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그려 놓은 대형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진우야 이 분들이 누군지 알아?” 

“아니요. 몰라요”


알리가 없다. 진우는 이 분들이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진우가 이 분들과 같이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야 옆에 서봐”


독립운동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는 정말 많았다. 그리고 친일파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고 싶은 게 많았다. 영원할 것같은 일제시기도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서 그리고 독립을 꿈꾸는 많은 이들에 의해서 되찾은 것이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얘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우가 배가 고프다고 했기 때문이다. 역시 국수는 금방 꺼지나 보다 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걸음을 재촉했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헌책방에 가는 길에 있었던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효자동 벽화마을이 끝나는 지점 쯤에 어설픈 포장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휑한 거리와 어울리지 않아서 어설퍼 보였는지 몰라도 인적드문 이런 길에 포장마차가 있는 게 낯설었다. 


“아빠 오뎅 먹고 가요”


처음이었다. 진우가 처음으로 어묵을 먹고 가자고 한 것이다. 거짓말. 아홉살이나 된 아이가 길거리 어묵을 먹고 가자고 한 적이 없다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사는 마을에는 길거리 포장마차가 없다. 수년간 계획되어 만들어진 신도시라서 그런지 아파트 입구에 자리잡은 상가 몇 개를 제외하고는 길거리에 음식냄새 풍기는 먹거리가 전혀 없다. 한마디로 삭막하다. 정작 우리는 아파트에 살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런 진우가 이런 제안을 한 배경은 딱 한 가지. 배가 고팠기 때문이겠지만 내 생각엔 지난 전주여행의 추억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했다. 길거리 먹거리가 주는 즐거움. 사실 별거 아니지만 어쩌면 잘 접해보지 못한 진우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던 같다. 왜냐하면 진우는 지난 두 달 동안 너댓 번은 전주에서 먹은 음식에 대해서 동생 연우에게 장광설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나도 허한 기분이 들어 그러마고 했고 우린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잘 익은 걸로 보이는 어묵 한 개를 진우에게 건네 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낯선 곳에 있는 포장마차에 낯선 우리가 들어서자 붕어빵을 만들던 아주머니의 손이 멈칫했다. 붕어빵 아주머니는 우리의 행색을 살펴본 다음 진우에게 물었다.


“아빠랑 여행왔어?”

“네”

“어디서 왔어? 서울?”

“아뇨. 파주에서 왔어요.”

“아하. 아줌마는 큰집이 파주에 있어서 어릴 때 명절마다 갔었어. 옛날에. 아빠랑 같이 여행하니까 좋지?”


아주머니는 대답 잘하는 진우가 기특했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진우는 진우 나름대로 성실하게 대답했고 아주머니는 아빠와 함께 여행다니는 진우를 부러워했다. 아줌마도 어릴 때 여행을 다니고 싶었다면서 말이다. 지금 진우와 내가 다니는 이 여행이 누구에게는 먼 과거의 추억이기도 했고 어릴 적 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진우에게는 현재고 또 미래이기도 했다. 난 처음 여행을 떠나기로 했을 때 진우가 갖길 바랐던 그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 남들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틀림없이 진우에게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낯선 붕어빵 포장마차에서 추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은 조금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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