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삶의 '순간'이 곧 '절정'

- <앙드레 브라질리에전>

by 톺아보기

살아있다는 것/ 지금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목마르다는 것/
나뭇잎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가 떠오르는 것(중략)/ 지금 살아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중략) 사람은 사랑한다는 것/ 네 손의 온기/ 생명이라는 것


다나카와 슌타로라는 시인의 이름은 몰라도 '살다'라는 이 시는 익숙할 듯하다. 그림책 <살아있다는 것> 역시 이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살다'라는 시를 읽으면 그냥 지금, 여기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바로 이 '살다'와 같은 그림을 만났다.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중인 앙드레 브라질리에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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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브라질리에? 1929년에 태어나 70년을 넘게 그림을 그렸다는데 생소하다. 그의 그림도 그렇다. 어디 교과서에서도, 어떤 미술의 유파를 설명하는 글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낯선 그림인데, 그런데 친숙하고 편안하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림이 무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많은 유명하고 훌륭한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리는데, 그 전시회를 통해 우리는 무얼 보는 걸까?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유파의 실물 영접? 피카소의 그림이 왜 좋은지 모르겠다던 어떤 평론가의 독설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시회에 간 우리는 우리의 감상을 넘어 보편의 지식을 향유한다는 쾌감이 종종 앞서곤 한다. 하지만 앙드레 브라질리에 전에서는 그럴 것도 없다. 94살의 노화백의 전시회가 우리나라에는 이제 처음이라니까.


'말'을 통해 화가가 말하고픈 건
70년을 넘게 그렸던 그림의 첫 전시이니만큼 젊은 앙드레에서 노년에 앙드레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의 작품이 총망라되어있다. 그런데 이 작가 묘하다. 7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줄기차게 몇 가지 소재에 천착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말'이다.



툴루즈 로트렉의 전시회에 갔을 때 그도 말을 그렸었다. 빨리 달리는 경주마의 모습, '크로키'라는 장르가 그로부터 창안되었다 한다. 어릴적부터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던 로트렉은 '動'에 대한 그의 열망을 '말'을 통해 '해소'했달까. 그렇다면 앙드레 브라질리에에게 있어 말은 어떤 의미일까?



말이 달리는 숲속, 바닷가, 해변 등등은 사계절의 풍광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달리는 말을 제외하면 그건 그냥 봄, 여름, 가을, 계절의 풍경일 뿐이다. 물론 그 계절의 풍광이 아름답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가 갔던 가을의 암스테르담을 그린 '노오란 거리'의 풍경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 거리의 가을에 젖어드는 듯하니까. 그런데 거기에 말이, 아니 달리는 말들이 들어가 있으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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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개 소리인데 나의 '일주(日柱)'가 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늘 달려가고픈 충동에 시달리곤 하는데, 이렇듯 말이란 움직임이요, 생동감의 대상이다. 그냥 사람이 있는 것과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있는 건 다른 경지이다.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그 곳에 말 훈련소가 있어 말을 그렸다는 앙드레 브라질리에의 대답은 마치 홍시를 홍시 맛이라고 하듯 우문현답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처음 본 '대상'을 70년 동안 줄독 '천착'한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이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그림 중 하나가 말이 달리는 숲 속에 눈발이 나리는 장면이었다. 아직 단풍든 주황의 배경이 그대로인 숲에 말들이 달리고, 그곳에 나리는 눈발은 풍경을 넘어 계절을 질주하는 삶의 한 순간처럼 명징하다. 내가 본 브라질리에의 '말'은, 그가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삶의 순간이자, 절정'이 아니었을까.



그처럼 브라질리에는 동적인 순간을 절묘하게 포작한다. 서커스에서 공중곡예를 하는 두 남녀가 손을 맞잡는 순간, 그리고 나신의 남녀들이 물속에서 헤엄치는 그 순간, 그리고 앙리 마티스의 <춤>처럼 여러 남녀들이 환희의 군무를 추는 듯한 장면들도 있다. 노오란, 혹은 주황색의 콘서트는 음악이 보이지 않는데 들리는 듯하다. 스케치를 하고, 아틀리에로 돌아와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전시 설명처럼 동적인 순간을 포착한 그의 데생과 그로부터 탄생한 작품들이 70년의 시간동안 화가의 집요한 '추구'를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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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리에의 세계
그가 몇가지 소재에 천착했다고 해서 그의 모든 그림들이 '같다'라고 할 수는 없다. 젊은 시절 서커스와 말을 그리던 그가 '마티에르'가 강조되는 두터운 유화 기법으로 작품을 했다면 나이가 들며 그의 그림은 이게 '유화야?'라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에 대해 정우철 도슨트는 '서양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예를 들며 브라질리에가 이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아마도 스테인드 글라스같은 그림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 창의 화려한 색유리를 떠올릴 것이다. 나 역시도 도슨트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도스트가 보여준 사진 속 스테인드 글라스는 스테인드 글라스 자체가 아니라, 그를 통해 비춰진 교회의 벽면이었다. 색유리를 통해 하얀 벽면이 투명하고 맑은 수채화처럼 변해가는 모습이 그대로 브라질리에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건 어디선가 본듯한 평범한 유화일지도 몰랐던 그의 그림이 세월을 거쳐, 그리고 화가의 지난한 노력을 통해 비로소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서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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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가 평생에 걸쳐 천착한 대상이라면 사랑하는 아내 샹탈을 빼놓을 수 없다. 샹탈을 만나기 전부터 샹탈과 같은 여성을 그렸다는 '운명론적'이야기를 거쳐, 브라질리에 속 그림 속 여성은 거의 아내였다.



마네 등의 그림에서 본 익숙한 포즈의 저 그림은 2020년 무렵에 그려진 작품이다. 2020년이라, 작가나, 그의 아내나 모두 90살 언저리였던 시절이다. 90 먹은 아내의 나신을 저토록 곱게 그려내는 화가라니. 물론 실물로서 90먹은 아내에게는 그 시간만큼의 연식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시간을 넘어서 90살에도 여전히 '여성'으로서 아름다움을 드러낸 아내를 그린다. 젊어 매력이 넘치는 상탈을 그리는 브라질리에야 그렇다 치지만, 아흔이 넘은 아내의 나신조차 아름답게 그려낸 노화가의 모습에서 '사랑'이 무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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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건 바로 브라질리에라는 화가의 세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가 그린 콘서트의 한 장면, 가족과 함께 한 식사 시간, 그리고 해가 넘어가는 해변을 달리는 말들, 계절의 변화, 브라질리에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그림이 주는 정서처럼 문득 이 화가의 삶은 평안했을까라고 묻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 화가의 그림을 넘어 한 사람으로서 화가의 인생을 감동적으로 전해주는 정우철 도슨트답게 답을 전한다. 어린 시절 1차 대전을 겪은 소년은 그의 집이 군에게 징집이 되기도 했고, 살아오며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보내기도 했단다. 그럼에도 브라질리에는 그런 삶의 굴곡 속에서도 우리가 맞이하는 이 삶의 찰라가 가진 소중함을 자신의 그림에 담으려 애썼다고 한다.



전시장에는 '죽음에 저항하는 삶의 전투'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좋아서 좋은 게 아니라, 소중한 삶의 순간을 절정으로 기꺼이 맞이하고, 경외함, 그것이 바로 아흔이 넘은 노화가가 여전히 전하고픈 메시지다. 그의 그림에 흐드러진 희망의 푸른 색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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