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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Oct 15. 2023

권력에 매혹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마에스트로'

- <타르> 



'거머리처럼 살아남아 언젠가 이 판을 뒤집어야지'









2019년 개봉한 <우먼 인 할리우드> 속 케이트 블란쳇의 말이다. 누군가의 여자 친구 역할만을 맡던 신인 시절 했던 다짐이란다. 그리고 그 다짐을 그녀는 실현해내고 말았다. 영화 <타르>로 2023년 76회 영국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손에 넣었다. 



 












  



여우주연상, 아니 주연상에 걸맞는 


미국 아카데미 상의 유력한 후보이기도 하다. 올해 아카데미 상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두 명의 여우주연상 후보는 양자경과 케이트 블란쳇이다. 백중지세,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시공을 가로질러 종횡무진한  양자경과 권력의 정점에서 곤두박질쳐버린 마에스트로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은 '여우주연상'이라는 범주를 뛰어넘은 존재감을 드러내 보였다. 최근 영화제에서는 성평등적 관점에서 '여우 주연상'과 '남우 주연상'의 구분을 없애려는 경향이 대두되고 있다. 



알려지다시피 양자경의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처음 성룡을 캐스팅하려 했던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타르> 역시 주인공 캐릭터가 원래는 '남자'로 설정되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양자경과 케이트 블란쳇은 그저 원래 남성이었던 캐릭터를 더 잘 소화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외려 성룡이나, 혹은 다른 남성 배우들이 했다면 좀 신선했거나, 혹은 전형적인 작품이 됐을 지도 모를 작품들이 양자경과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두 배우를 통해 질적으로 다른, 혹은 보다 본질적인 주제의 작품으로 거듭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런 관점에서 <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은 '주연상'에 가장 걸맞은 후보가 아닐까.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영화관에 걸린 거의 마지막 날 허겁지겁 달려가 <타르>를 영접했다. 워낙 개인적으로 경황없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터, 그런데 날마다 듣는 클래식 fm에서 클래식 팬이라면 꼭 봐야하는 영화라며 프로그램마다 화제가 되었다. 심지어 한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코너 특집으로 <타르>를 다루었다. 왜 하필 베를릴 필하모닉이었으며, 영화 속 케이트 블란쳇의 스타일이 카라얀이냐, 클라우디오 아바도냐 다니엘 바렌보임이냐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결국 예매를 하고 말았다. 표를 구하고 보니 그 날이 마지막 상영이었다. 



OTT가 대세인 시대, <타르> 역시 OTT채널을 통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타르>는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걸맞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영화 속 타르가 자신의 악보를 두고 고심하는가 싶더니, 포스터에 등장한 '앙각'의 시점에서 타르를 비춰올라간다. 그와 함께 온 영화관을 '찢을 듯이' 울려퍼지는 오케스트라, 이보다 더 격정적으로 마이에스토 타르를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 있을까.



'마에스트로', 묘한 단어이다. 영화는 민속 음악 전문가이기도 한 타르가 연구했던 '타령조'의 읊조리는 듯한 멜로디를 타고 열린다. 그리고 관객과 함께한 타르의 인터뷰, 장황한 그 인터뷰를 통해 타르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한때는 피아니스트였고, 민속음악 연구자였으며, 이제는 작곡가이고, 당대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의 수석 마에스트로 리디아 타르. 그녀에게 인터뷰어는 묻는다. 왜 마에스트로냐고, 그녀는 여성인데. 그러자 그녀는 반문한다. 여성 우주인도 그저 astronaut라고 하지 않냐고. 그리고 이 질문은 곧 이 영화가 말하고자 바가 된다. 



전투화처럼 낮고 투박한 신발, 통이 넓은 바지, 거칠게 권투 글로브를 끼고  샌드백을 두드리는, 낮고 둔탁한 목소리, 타르 속 케이트 블란쳇이다.  <블루 재스민>을 보고서 케이트 윈슬렛이란 배우가 각인되었었다. <타르> 를 보고 있노라니 곧 쓰러져 버릴 듯이 심약했던 재스민에서 타르까지, 섬세한 여배우에서 그저 '배우'란 이름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한 케이트 블란쳇이 성큼성큼 걸어 온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케이트 블란쳇은 <타르>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기획자이기도 하다. 그녀 스스로 타르인 자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여성으로서는 독보적으로 많은 업적을 이루고, 그 업적의 결과물로 베를릴 필 마에스트로를 거머쥔 그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려 한다. 그녀와 같은 젊은 여성 음악인들을 지원하던 프로그램마저 이제는 '여성'을 넘어 그저 젊은 음악인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하고자 한다. 그러면 당신이 스스로 가꿔온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거침이 없다. 영화 속 그녀의 긴 머리는 여성으로서 그녀의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사자의 갈기털처럼 흩날린다. 특히 클라이막스, 갈기털처럼 머리를 흩날리며 연주회장으로 걸어들어가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이룬 것들을 무참하게 무너뜨린다. 



그녀의 거침없음, 그녀의 욕망은 동시에 그녀의 늪이 되어 간다. 비서처럼 수행하던 젊은 음악가 프란체스카도(노에미 메를랑 분), 그녀를 따르던 아코디언의 젊은 연주자 크리스타도, 그리고 그녀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베를린 필의 제 1 바이올린 연주자인 레즈비언 파트너 샤론(니나 호스 분)도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에 조력자들일 뿐이다. 하지만 그 조력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이니, 추락의 절정에서 샤론은 말한다. 두 사람이 함께 키우던 아이 말고, 타르 너에게 '이용 대상'이 아니던 존재가 있냐고. 타인에 대한 그녀의 오만함은 크리스타의 죽음과 함께 무너져 간다.



영화 속, 타르는 잠을 못이룬다. 어디선가 나는 미세한 소음조차도 그녀의 잠길에 불청객이 되기 때문이다. 귀가 예민하다. 그건 영화 속 작곡가로서 타르의 섬세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동시에 절대 권력을 이룬것같지만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권력의 무상함에 대한 복선이 되기도 한다. 심리적으로 보자면, 그의 당당함 이면에 숨겨져 있는 불안함이라는 심리적 기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루 재스민>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리던 불안함 대신에, 타르는 스스로 끊임없이 거머쥐는 것으로 그 불안함을 상쇄하고자 한다. 기존 권력의 상징이었던 부지휘자를 갈아치고, 자신의 명성에 행여 금이 갈세라 수족같이 부리던 프란체스카의 앞길마저 외면한다. 본원적인 열망과 불안함, 그 쌍두마차를 몰고 타르는 거침없이 질주한다. 



자신을 이루어 왔던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욕망 앞에서 장애가 된다면 거침없이 '손절'하려 했던 타르, 하지만 그 욕망은 부메랑이 되어 그녀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빠뜨린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자신의 고향 집으로 숨어든 것도 잠시, 타르는 낯선 이국의 오케스트라에 선다. 비록 그게 그저 게임 배경 음악에 불과할지라도. 타르는 여전히 마에스트로이다. 때로는 흔들렸을지 몰라도, 음악 앞에 선 그녀는 여전히 당당하다. 아마도 이 영화의 방점은 여기에 찍혀야 하는 게 아닐지.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보게되면 역시나 여성인 기자는 자신도 모르는 새,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주인공을 판단하게 된다. 딸을 위협하는 아이에게 '난 아빠다'라고 일갈하는 타르. 그녀는 많은 성공하는 여성들이 범하듯 '내면의 남성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가는 걸까.  어쩌면 그런 질문마저 자기 검열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왜 여성은 권력지향적이면 안되는가, 권력의 벼랑에서 산화하면 안되는가. 영화 속 케이트 블란쳇이 구현한 타르는 그런 정체성의 모호함을 넘어 인간을 말한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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