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유연석 분)이 소장 이식 수술 후 좀 더 공부를 위해 1년 동안 미국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친구들에게 밝힌다. 그런 정원을 바라보는 석형(김대명 분)의 눈빛, 아마도 <슬기로운 의사 생활 시즌 2> 마지막 회를 보는 시청자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느덧 12회, 두 시간여의 긴 런닝 타임임에도 여느 회차처럼 훌쩍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시즌이 마무리됐다.
무엇이 이 드라마를 꾸준히 지켜보게 만들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매번 열심히 닥본사를 하기 위해 시간을 맞추며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99즈 다섯 명이 이루어가는 사랑의 결실을 지켜보기 위해서? 물론 이들의 '사랑'이 큰 관심거리이다.
지난 회차 대학 시절부터 서로 지켜보기만 하던 익준(조정석 분)과 송화(전미도 분)가 드디어 '커플'로 이루어졌을 때 소리높여 응원하지 않았던가. 곰탱이 석형이 끈질긴 추민하(안은진 분)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때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저 '결실'이라는 결과물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사랑'으로 치면 이 드라마보다 더 열정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아마도 이들은 '사랑'조차도 '사람 냄새' 나게 해서 그렇지 않을까.
추민하를 데려다 주러 가던 석형, 석형의 손을 놓기 싫어하며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가 보다라는 민하의 말에 석형은 다정하게 타이른다. 자신을 좀 더 지켜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런 석형에게 민하는 이미 자신은 석형을 오래 지켜보았다고 말한다. 너가 이러니 거기에 대해 나는 이만큼 하겠다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마음을 '솔직'하게 말한다.
등장 인물 모두는 '직진'이다. 자신이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되지 않았다고, 망설이면 망설인다고, 사람 살이에서 니가 이만큼 하니 나는 이만큼 하겠다는 '계산'이 없다. 자신이 가진 마음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적어도 이 드라마를 보는 시간만큼은 그 누군가의 '잔꾀'와 '권모술수', 혹은 '통수치는' 일로 인해 오래도록 마음 졸이는 경우가 드물다. 설사 그 누군가가 그런 일을 벌인다 하더라도 그 일에 휘말린 이의 '우직'한 방식 앞에 보는 이의 얹혔던 마음이 누그러지고 만다.
다음날 컨퍼런스가 있기 때문에 석형은 일찌감치 퇴근한다. 이제는 무리하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힘든 나이가 되었다고 웃으며. 하지만 그의 퇴근은 쉽지 않다. 무려 3번이나 출근을 했다는 민하의 말처럼 '응급' 상황에 기꺼이 병원으로 차를 돌린다. 그런 식이다. 긴 런닝 타임의 마지막 회를 채운 건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의 말대로 '저승사자'를 몇 번이나 알현했다는 익준의 말처럼 몇 번의 위기를 넘긴 이식 수술을 마치고 소파에 잠든 모습, 익준만이 아니다. 마지막 회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지쳐서 진료실 소파 위에서 곤히 잠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시즌 2내내 그랬었다.
태어나 한번도 음식을 맛보지 못한 아이를 위해 위험한 소장 이식 수술을 소원하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 어려운 수술을 결심하고, 굽은 등과 불편한 호흡으로 엎드려 잠을 자는 아이를 위해 빼곡한 일정을 다시 쪼개고, 그렇게 주인공들은 여전히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오늘 최선을 다한다.
전에 의료 파업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양분되었을 때, 지인이신 한 의사 선생님께서 자신의 의견을 페이스북에 올리신 적이 있다. 이해 관계의 관점에서만 편의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에, 현장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직업인의 입장에서 안타까움을 피력하셨더랬다.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나 사건이 발생하면 언제나 '입장'이란 것이 우선한다. 그러다 보니 그 '입자' 뒤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미처 살피기 힘든 경우가 많다. 물론 그래서 '환타지'이겠지만, 적어도 율제 병원을 보는 시간 동안 만큼은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삶의 이면을 다시금 되돌아 보게 된다.
<프로이트의 의자>에서 저자는 '좌절'에 빠진 이를 향해 하다못해 이라도 닦으라고 말한다. 자기 연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대신, 이라도 닦으며 움직여야 '좌절'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듯 <슬기로운 의사 생활>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
실연에 빠진 그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해낸다. 그 '일관된 평범한 성실함', 사실 우리가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말고는 없다. 지금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만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라고 철학자는 전한다. 그 엄정한 삶의 진실을 <슬의>는 성실하게 12회차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들이 열심히 해낸 일에는 그래도 역시 '사랑'과 '우정'을 뻬놓을 수 없겠다. 준완, 익순과 함께 노래방에 간 익준과 송화, 준완을 결국 미소짓게 만든 익준, 익순 남매의 멋들어진 공연 뒤에, 의기양양 송화의 독무대가 시작되었다.
왜 안말리냐는 준완의 하소연, 그런데 삑사리를 내며 열창하는 송화를 익준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문득 그런 익준의 미소를 보며, 나는 과연 사랑하는 이에게 저런 마음인가 반성하게 된다. 어려운 수술을 앞둔 정원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겨울처럼, 그리고 겨울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준 정원처럼 말이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스무 살 그때처럼 서로 계산하지 않고 투닥거리며 함께 어울리는 99즈의 온기가 있기에 늘 따뜻했다. 이제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서게 된 로사(김혜숙 분)와 종수(김갑수 분), 그들이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저 '친구'로 둘은 좋다. 돈을 요구해온 아들 때문에 고민하던 종수는 결국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어 로사네로 온다. 그리고 그런 종수를 로사는 기꺼이 함께 한다. 아마도 99즈가 함께 나이들어 간다면 그들도 그러지 않을까. 착한 그들의 '동화같은 이야기'와 함께 나이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