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의 기억

by 푸른소

1999년은 세기말의 퇴폐적 분위기와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가 교차하며 한 시대의 마지막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시대적 변화에 따라 술 시장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알코올 도수 25도였던 소주는 프리미엄 소주를 표방하며 23도로 도수를 낮추어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저알콜 소주의 시대를 열렸다. 맥주는 오비, 였던 독과점이 깨지고 카스가 비열처리 맥주를 내세우면서 맥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0시만 되면 라거, 하이트, 카스 맥주가 번갈아 TV를 지배하며 국민들의 음주를 부추겼다. 밀막걸리가 물러나고 쌀막걸리가 시장을 주도했다. 술을 좋아하는 나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이 술 저 술 번갈아가며 화수목금 주 4회를 빼놓지 않고 마셔댔다.


여느 때와 같이 4일 연속 술을 마시고 숙취에 절어있던 어느 토요일, 태호 선배한테서 통영에 가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뗏목을 타고 해류에 몸을 맡겼던 발해 해상 학술 뗏목탐사대의 추모 1주기를 가자는 전화였다.

발해 해상 학술 뗏목탐사대는 한반도 해류의 흐름이 문화의 전파 흐름임을 주장하며, 일본까지 우리의 문화가 해류를 통해 전파되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세 청년의 도전이었다. 1997년 12월 31일, 세 청년은 겨울 바다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상 악화에도 굴하지 않고 힘겹게 싸우던 청년들에게 일본은 강제 인양을 결정하고 뗏목 인양을 시도했다. 강제 인양은 젊디 젊은 청년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선배의 죽음, 그리고 1주기.... 뻔뻔하게 잊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 길로 통영으로 내려가 1주기 행사에 참석했다.


허겁지겁 묘소로 가던 중, 통영의 한 시민이 추모제에 올려달라고 막걸리를 항아리째 가져왔다. 아직 거르지 않은 술이라 술자루에 담아서 급히 술을 걸렀다. 어느 정도 걸러서 급히 행사장으로 갔고, 선배의 영전에 한잔, 두 잔, 세잔을 올렸다. 그날 그 막걸리가 내 인생 최고의 막걸리가 되었다.

행사를 마치고 식사 겸 술을 한잔 기울였다. 함께 한 선후배들은 막걸리는 먹지 않는다고, 마시면 머리가 아프고, 숙취가 있고, 뒤끝이 안 좋다고 다들 사양했다. 나도 그렇기는 하지만, 귀한 술을 내놓은 아주머니의 정성을 생각해서, 잘못하면 가져온 술을 내가 다시 들고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시기 시작했다. 맛은 너무도 훌륭했다. 아무도 마시지 않으니 혼자 반말이나 되는 술을 다 마시고 말았다. 술을 마셔야 운전자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꼼수도 한몫했다.


서울행 봉고차가 출발했고 알딸딸함에 취해 잠이 들었다. 차는 어느덧 추풍령을 넘어 청주에 이르렀다. 휴게소에 들르면서 잠에서 깨어났는데 너무도 개운했다. 전혀 숙취도 없었다. 그동안 마시던 시중의 막걸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분명 막걸리인데 뭐가 다른 거지?

집에 돌아와 그런 좋은 술을 평생 마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좋은 것은 좋은 술을 담글 수 있는 사람 옆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내가 배우는 수밖에. 당장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다른 건 몰라도 술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이는 나다. 마침 전통주연구소에서 막 개설한 “전통주 빚기” 수업이 있었다.


실상 이렇게 좋은 막걸리가 처음은 아니다. 아련하게 기억되는 막걸리에 대한 추억은 초등학교 때 어느 날로 훌쩍 넘어간다.

여느 때와 같이 하교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 비어 있었다. 방안에는 빨간 다라이에 맑고 뽀얀 우유 같은 액체가 담겨있었다. 술 향기가 나긴 했으나 독하지는 않았다. 호기심에 밥그릇에 떠서 맛을 봤다. 향기롭고 달콤하고 새콤하고 구수하고 씁쓸한 게 맛있었다. 그렇게 한 사발, 두리번거리며 다시 한 사발....., 기억이 없다. 쓰러져 잠을 잔 것 같고, 어머님의 웃음소리에 잠을 깼다. 그리고 멀쩡했다. 집에서 만든 밀주를 먹은 경험은 나에게 막걸리를 특별하게 기억하게 했다.


전통주 빚기는 재미있었다. 처음으로 고두밥도 지어보고, 누룩도 부셔보고, 밑술도 치대 보고.... 모든 것이 처음이지만 선생님이 만들어 놓은 술을 서리해먹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 이것이 정녕 술인가? 선생님은 갖가지 술을 항아리에 넣어 술장고에서 익히고 있었다. 숙성에 들어간 술의 맛은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맛이었다. 말 그대로 아주 맛있었다.

이런 술맛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고심하며 술 빚는 법을 배운 후에도 집에서 내손으로 술을 빚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