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중심으로
인간에게 어려운 일은 컴퓨터에게 쉽고, 인간에게 쉬운 일은 컴퓨터에게 어렵다.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벡’의 말처럼, 인간과 기계가 활약하는 영역은 뚜렷하게 나뉘어 왔다. 특히 예술은 공감이나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므로, 인간의 고유영역이나 다름없이 여겨졌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발전하며 기계가 인간의 영역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작곡 AI, 소설 AI, 그림 AI, …. 그 발전 속도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가속했고, 콘텐츠 제작 업계에서 꾸준히 비중을 키워나가고 있다.
많은 플랫폼에선 알고리즘을 이용해 사용자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추천한다. 언젠가 알고리즘에 맞춰 제작된 콘텐츠를 보는 것도 꿈 같은 얘기는 아니다. 이렇게 관련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데 반해, 제도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더 큰 혼란을 빚었다. 소유권, 저작권, 형평성, 윤리 문제 등. 벌써 다양한 쟁점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래서 필자는 인간과 기계, 둘의 관계를 다룬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한 굳은 체계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퀀틱 드림에서 2018년에 출시한 어드벤처 게임이다. 안드로이드가 보편화한 미래에 ‘자유 의지’를 얻은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평등한 권리를 얻으려 항쟁하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수사 보조 안드로이드 코너’, ‘가정부 안드로이드 카라’, ‘비서 안드로이드 마커스’이다. 일정 분기마다 플레이어의 시점이 바뀌며, 각 캐릭터를 플레이한다. 그때 저마다의 상황에 맞는 선택지를 고르게 되는데 이것이 서로의 스토리와 결말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이 중에서 내가 주목한 캐릭터는 ‘비서 안드로이드 마커스’이다. 마커스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정체성이 바뀌는 트랜스 아이덴티티 캐릭터이다. 이 변화는 특히 공간을 이동할 때마다 일어나고,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선 다양한 미장센을 빌어 이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필자는 마커스의 서사와 공간 이동에 따라 정체성 변화를 분석하겠다.
마커스는 화가 ‘칼’의 비서로서, 다리를 못 쓰는 그를 오랫동안 보살폈다. 우울증을 앓는 칼의 말동무가 되고, 병을 옆에서 간호하고, 그의 그림 작업도 보조했다. 그 덕분에 칼도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둘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로 발전한다. 마커스의 초반 서사를 보면, 칼이 마커스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결정하라고 조언하는 장면이 있다. 기계에 철학적인 질문은 던지는 행동으로부터 마커스를 상당히 인간처럼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칼의 집은 마커스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공간이다. 마커스는 칼에게 인간처럼 대우받고, 당당하게 거리에 나갈 수 있으며, 안드로이드 혐오 세력과 마주치더라도 고장 날(죽을) 위험이 없었다. 흥분한 혐오자가 마커스를 부수려고도 했지만, 경찰이 나타나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진정시킨다. 그렇다, 이 안전은 그가 칼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얻는 권리이다. 칼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마커스의 사회적(외부적) 정체성은 기계이다. 이를 걱정한 칼은 철학을 알려주며 마커스가 기계를 넘어선 정체성을 찾길 도모했다.
그런데 칼의 아들 ‘리오’가 나타나며 상황이 급변한다. 아버지의 그림을 훔치러 온 리오가 그를 제지하던 마커스와 다툼을 벌인다. 이때 마커스는 반격하지 않을 것을 명령받았지만, 끝내 명령을 어기고 리오를 밀친다. 안드로이드가 공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일까. 리오는 넘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쳐 의식을 잃고 만다. 이로 인해, 마커스는 경찰에 의해 그 자리에서 파괴되고 폐기당한다.
부서진 안드로이드는 폐기장에 마구잡이로 버려져 작동이 멈추도록 방치된다. 쓰레기 산에서 튀어나온 안드로이드의 손과 폐기장을 좀비처럼 떠도는 안드로이드를 보면, 지옥도를 연상시킬 정도다. 그곳에서 간신히 살아난 마커스는 머리에 붙은 상태 표시 LED를 제거한다. LED는 오른쪽 관자놀이에 부착된 동그란 링으로, 상황에 따라 빨강·노랑·파랑으로 빛난다. 모든 안드로이드에 달려있기 때문에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하게 하는 거의 유일한 장치이다. 안드로이드들의 신분증이자 그들을 인간으로부터 격리하는 울타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떼어냄으로써, 마커스는 기계라는 외부적 정체성을 거부하고 자신을 지켜내려 한다.
폐기장에서 ‘안드로이드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곳’에 대한 단서를 얻은 마커스는 안드로이드 해방집단 제리코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제리코는 단순한 피난처였다. 볕도 들지 않는 버려진 화물선 지하에서 인간을 피해 죽을 때까지 숨어 사는 안드로이드들. 이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한 마커스는 그들이 ‘인간’ 대신 ‘공포’에 지배당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기다리지 않고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먼저 방송 시스템을 해킹해 안드로이드에게 인간과 평등한 권리를 줄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중이 안드로이드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안드로이드 해방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자유 의지’를 얻어 해방된 안드로이드와 함께 평화적 시위*를 벌이는데, 여기서 그들은 끊임없이 외친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시위가 평화적이거나 폭력적으로 일어난다. 이 글에선 평화적인 방법으로 긍정적 여론을 이끄는 선택지를 다루겠다.
제리코는 마커스가 자기 욕망을 깨닫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공간이 된다. 마커스는 처음 제리코에 와서 자신이 원하던 자유의 형태를 알아냈다. 누구에게도 지배당하지 않는, 살아있는 사람의 권리. 그는 결국 제리코의 안드로이드들을 설득하고 해방 운동을 함께할 동료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 함께 해방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그의 욕망을 밖으로 표출했다.
이 해방 운동의 영향력은 마커스의 의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제리코에 막 들어온 마커스는 가벼운 평상복을 입었었다. 그러나 해방 운동이 커지며, 마커스의 복장이 크게 달라진다. 다른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용 유니폼이나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는데, 그 사이에서 마커스는 두껍고 긴 코트를 입고 있다.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뚜렷하게 구분될뿐더러 망토처럼 휘날리는 옷이 만화 속 영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마커스를 중심으로 한 투쟁은 안드로이드에게 간절한 싸움이었다.
반면에 인간은 이들을 불량품이라고 규정하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후반 서사를 보면, 정부에서 군대를 동원해서까지 해방 운동을 진압하려고 한다. 비인륜적인 행동을 통해 ‘안드로이드는 어디까지나 기계’라는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내부적 정체성과 기계로서의 외부적 정체성은 해방 운동이란 쟁점에서 충돌한다. 마커스는 여기서 내면적 정체성을 표출하여 트랜스 아이덴티티 캐릭터가 되었다.
마커스의 정체성은 장소를 이동함에 따라 변화한다. 칼의 집에선 기계로, 폐기장에선 쓰레기로, 제리코에선 살아있는 사람으로. 필자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마커스의 행보를 보며,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안드로이드는 왜 사람(인간)이 아닐까. 일반적인 대답은 “기계는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있지 않으면 사회구성원이 될 수 없을까. 그건 아니다.
‘소피아’는 핸슨 로보틱스에서 개발한 인간형 로봇으로, 2017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얼굴이 실제 사람처럼 생긴 데다 60여 가지 표정도 지을 수 있으며, 머신 러닝 기술이 내장되어 웬만한 질문에 사람처럼 대답할 수 있다. 실제로 재난 현장에서 아이와 노인 중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구하겠느냐는 질문에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를 묻는 것처럼 어려운 문제네요. 저에겐 윤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프로그램이 없으니 가까이 있는 사람을 구하겠습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기계를 인류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김도식, 「인공지능 로봇 ‘소피아’와 함께하는 시대」, 『철학과 현실 116』, 2018, 139쪽.
조금 다른 얘기를 먼저 해보겠다. 당신은 가족 외의 전화번호를 5개 이상 외우고 다니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인간은 이미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을 기계에 의탁했다. 우리가 손에서 놓고 다니지 않는 스마트폰은 우리의 뇌나 다름없는 물건이다. 심하게는 팔다리까지. 그런데도 스마트폰은 도구이다. 우리 손안에 있어야만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율주행 자동차는 어떤가? 자율주행 자동차는 조작하지 않아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위험까지 스스로 감지하고 대처한다.
그런 자율주행 자동차가 사고를 낸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설계사, 제조사, 판매사, 소유자, 운전자, …. 기계가 사람의 손을 떠날수록, 사람의 책임은 흐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계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문제 상황에서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해 ‘전자 인간(electronic personhood)’이란 개념이 탄생했다. 이것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로봇이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율적 지능형 로봇의 경우 부여받을 수 있는 지위이다. 인간은 이미 기계를 사회에 받아들일 발판을 다져가고 있다.
여기까지 경제적 관점에서 기계를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에 관해 얘기해보았다. 다음으론 철학적 관점에서 주제를 논해보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우리 인간은 동족처럼 여기는 사람만을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노예나 인디언(선주민)은 두 발로 걷고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를 알아도 인간으로 규정되지 못했었다. 선주민은 특정 종교를 따를 능력에 따라 구분하는 등, 상당히 종교 편파적으로 취급당했다. 그들이 당시 서양인과 다른 생활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시대와 문화, 관습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개념이었다. 한승홍 교수는 인간이 각자(종족)의 우월성, 나르시시즘을 버리고 나서야 ‘인류’라는 개념이 형성됐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는 어떤가. ‘인간(人間)’의 사전적 정의는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다. 생각, 언어, 도구, 사회. 이 네 가지 조건은 특별해 보이면서도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개는 풍부한 인식능력이 있고, 돌고래는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며, 원숭이는 손으로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고, 개미는 무리생활해 사회를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여기는 근거가 무엇일까. 바로, 이성이다.
개와 돌고래, 원숭이, 개미는 본능에 따라서만 행동한다. 환경에 적응해야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은 본능에 지배당하는 수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을 억제하고 환경 조건을 극복함으로써,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문화를 구축하므로 능동적인 존재가 된다. 필자는 스스로 선택하고 그 책임을 짐으로써 비로소 올바른 사회구성원이 된다고 생각한다.
앞에 근거해, 필자는 마커스가 해방 운동을 일으킨 시점에서 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리잡았다고 생각한다. 마커스는 인간의 명령(본능)을 거슬러 시위를 일으켰고, 자신을 방해하던 정부와 대적했다. 정부도 마커스와 안드로이드만을 적대하고, 그 제조사와 소유자를 비난하지 않았다. 안드로이드 해방 운동을 마커스(와 다른 안드로이드)의 책임으로 여긴 것이다. 여기서부터 안드로이드가 암묵적으로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정부가 안드로이드 탄압을 중단하고, 그들을 새로운 지적 생명체로 인정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끝을 맽는다.
앞서 서술한 자율주행 자동차의 사례처럼,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가 알아서 (기계를 포함한) 인류를 위한 일을 모색하고, 시도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계도 인류이자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아직 창조자라는 정체성에 갇혀 나르시시즘을 극복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늦게라도 사회 흐름을 인식하고 더 낮고 넓은 정체성으로 먼저 탈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