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사마귀가 들어왔다!

남고 교실을 뒤흔든 '당낭' 선생 이야기

by 오이랑

지난 7월, 퀴퀴한 땀 냄새와 무기력한 한숨이 공기 중에 부유하던 남고 교실. 이곳에 파란을 일으킨 건 카리스마 넘치는 신임 교사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낡은 곤충 채집함에 담겨 온 손님, 바로 사마귀 한 마리였다.


녀석들의 윤리 수업을 담당하는 나는 그저 흥미롭게 이 작은 소동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꽤나 정성스럽게 나뭇가지와 잎사귀로 꾸몄다. 그리고 그 반 마지막 출석 번호 22번에 이어 ‘23번’이라는 번호와 함께 ‘당낭’이라는 비범한 이름을 선사했다. 자고로 당랑권을 구사하는 고수시란다.


점심시간이면 풍경이 달라졌다. 식사를 마친 녀석들이 약속이나 한 듯 교실 한편에 마련된 당낭이의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야, 오늘 급식에 나온 멸치, 당낭 선생은 안 드시냐?" "멍청아, 살아있는 것만 드신다고! 가서 잠자리라도 잡아 와!" 식단까지 챙기는 모습이 여간 지극정성이 아니다. 무심함을 넘어 냉소로 무장했던 남고생들의 얼굴에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았다. 매일같이 책상에 엎드려 자던 녀석마저 눈을 반짝이며 당낭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급기야 녀석들은 족보까지 만들기 시작했다. 당낭이의 엄마, 아빠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생겨났고, 며칠 후에는 한 녀석이 쑥스럽게 다가와 내게 물었다. "선생님도… 당낭이의 가족이 되어주시지 않겠어요?" 어떤 가족 구성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제안만으로도 녀석들의 세계에 내가, 그리고 당낭이가 꽤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낭이는 윤리 수업의 정식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당낭이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한 녀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당연히 고려해야죠! 당낭이도 '삶의 주체' 아닙니까?"


오, 제법인데? 수업 시간에 스치듯 던진 개념을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오, '삶의 주체'. 아주 중요한 개념이지. 미국의 철학자 톰 레건이 말한 개념인데. 단순히 살아있는 것을 넘어, 신념과 욕구를 갖고, 미래를 인식하며, 쾌락과 고통, 즐거움과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 한마디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 같은 존재를 뜻하지. 과연 당낭이가 그럴까?"


그때,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맞아요! 당낭이도 분명 감정이 있어요! 제가 아까 손가락 내미니까 확 물려고 했다고요! 그건 '빡쳤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래, '빡침'이라는 감정. 좋아. 또 다른 의견은?"


이번엔 안경 너머로 늘 삐딱한 눈빛을 보내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그런데 철학자 피터 싱어가 말한 '쾌고감수능력'은 어떻게 증명하죠? 당낭이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릅니까, 아니면 좋다고 웃습니까? 그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거 아닐까요?"


교실 안이 다시 술렁였다. '쾌고감수능력', 즉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도덕적 고려의 출발선이라는 싱어의 주장. 수업 시간에 강조했던 개념을 녀석이 정확히 짚어냈다.


"아니야! 내가 어제 밀웜 줬을 때 더듬이 신나게 흔드는 거 못 봤냐? 그건 '기쁨의 댄스'라고!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게 딱 보이는데!"

"그건 그냥 먹이 보고 흥분한 거겠지, 멍청아!"


아이들의 논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당낭은 과연 고통을 느낄까? 자신의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를 품고 있을까? 우리가 당낭이를 '돌보는' 행위는 과연 당낭이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인간의 만족을 위한 것일까?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토론은 끝나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아이들은 당랑이의 집 앞에서 "야, 너는 삶의 주체냐?" "지금 행복하냐?" 따위의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작은 사마귀 한 마리가 가져온 변화는 놀라웠다. 무기력했던 교실에 활기가 넘쳤고, 아이들은 책 속의 개념을 현실로 가져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당낭은 더 이상 단순한 곤충이 아니었다. 교실의 23번째 학생이자, 팍팍한 남고 교실에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작은 스승, '당낭 선생'이었다.


이보다 더 생생한 수업이 또 있을까. 나는 이 작고 위대한 선생의 수업을 기쁜 마음으로 참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