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생각한다
- 안희연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나를 열고
여긴 더 이상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소매를 끌며
자꾸만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우리는 한 울타리를 넘어 처음 보는 숲으로 갑니다
보통의
숲이었는데
나무들이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올려다보면 아주 긴 목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흰 종이 위를 맨발로 걸어가 본 적 있니
앞이 안 보이고 축축한 버섯들이 자랄 거야
거기 있어? 물으면 거기 없는
여름
우리는 아름답게 눈이 멀고
그제야 숲은 자신의 호주머니 속에서 눈부신 정원을 꺼내주었던 것입니다
색색의 꽃들 아름다워 손대면
검게 굳어버리는 곳
아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멀찌감치 익숙한 뒷모습을 가진 이가 보였습니다
아니 거기서 무얼 하고 계세요 왜 그런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계세요
무심코 둘러보았는데
모두들
자신을 꼭 닮은 돌 하나를
말없이 닦고 있었습니다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이라는 강렬한 심상.
이 시구는 안희연의 시 「돌의 정원」을 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나의 삶을 되비추는 거울처럼 다가오게 힌다. 그래서 가끔씩 들춰보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묵직한 질문으로 삼는다.
시의 화자가 머무는 "더 이상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곳"은, 곧 지금의 내가 딛고 선 자리이다. 정신없는 변화 속에서 쉼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다 보면, 문득 내가 단지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가 하는 공허함에 휩싸인다. 교사, 엄마, 여성이라는 이름표는 선명하지만, 그 안의 알맹이는 무엇인지, 그 무게는 얼마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내적 동력은 있으나 바퀴는 헛돌고, 지난 세월의 가시적인 결실은 보이지 않아 상실감만 깊어진다. 어쩌면 허술한 알맹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작가라는, 지금과는 또 다른 종류의 단단한 껍데기로 그저 알맹이를 감추려는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그 결핍감과 감추려는 욕망이 나를 글쓰기라는 행위로 밀어붙이는지도 모른다.
철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볼 때, 이 시의 상징들은 더욱 첨예한 질문을 제기한다. '아이'는 나의 타성에 젖은 의식을 흔드는 순수한 부름인가? '정원'은 무엇이며, "손대면 검게 굳어버리는 곳"이라는 그 속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검게 굳는다'는 것은 생명력의 상실, 즉 규정되는 순간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사유의 속성을 뜻하는 것인가? 그것은 진리나 예술, 혹은 글쓰기라는 행위가 가진, 위험하지만 매혹적인 본질일 수 있다.
그 사유의 정원에서 나는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한 나 자신을 대면한다. 이 위태로운 '얼굴'은, 견고한 성취나 확고한 증명을 하지 못한 채 그저 흘러온 일상 속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상실감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내가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 언제든 중심을 잃고 굴러 떨어질 수 있는 하나의 '돌멩이'임을 자각한다.
시의 결론은 "모두들 / 자신을 꼭 닮은 돌 하나를 / 말없이 닦고 있었습니다"라는 숭고한 행위로 귀결된다. 이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랜 물음에 대한 깊은 대답이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을 반항이라 불렀다. 어쩌면 '자신을 닮은 돌'을 '말없이 닦는' 이 행위야말로 가장 치열한 반항일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닦는 행위를 통해 거창한 결과를 얻어내거나 완벽한 무언가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유한한 삶, 이 돌멩이를 묵묵히 닦아내는 그 과정 그 자체에 우리의 존엄이 있다. 나는 그 묵묵한 닦음의 행위 속에서, 상실감과 무력감을 껴안고도 나아갈 수 있는 조용한 위로와 용기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