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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리니 Mar 29. 2023

미니멀리즘. 버림을 통해 분명해지는,

몬드리안의 단순함에서 구하는 삶의 본질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은 그림에서 군더더기를 빼면 색채와 그 색면들의 비례만 남게 되고, 이들이 그림의 필요충분조건임을 보여준다.
서현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미니멀리즘, 버려서 얻는 선명한 본질


 미술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이거 하나는 알겠다.


 만일 어떤 사람을 그려내야 한다면 그 사람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나 팔등의 솜털부터 그려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대상은 윤곽으로 배경과 구분된다고 했다. 점은 대상의 위치를 나타내고, 공허한 공간에 선과 선이 연결된다면 하나의 세분화된 면적이 생겨난다고도 했다. 잘라낸 면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면 아마 그 면적이 전체 공간의 어디쯤에 위치하며, 그 테두리가 어떠한 모양을 갖고 있는지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도려낸 공간 위, 삼분의 이쯤 되는 높이에 가로로 긴 타원형의 원을 나란히 두 개, 그리고 두 원 사이에 적당히 아래 쪽으로 작은 반원 하나를 그려보자. 마지막으로 그림에 색을 칠해본다면 못 그린다는 말은 들어도 이 것이 얼굴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미적으로 보기에 좋건 말건, 그림이 지칭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려내기까지 큰 수고가 들지 않는다는 점을 통해 우리는 대상을 인지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디테일이 요구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없어도 될 부수적인 표현들은 외려 그린 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호하게 만들 때도 있다. 이처럼 대상의 외적 이미지를 그려내고자 한다면 위치, 선과 선사이의 긴장을 통해 만들어지는 공간의 구분, 추가하자면 색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피카소가 표현한 여인, 국립현대미술관 모네전>


 하지만, 몬드리안은 너무했다.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을 다시 봐도 이 그림은 현대미술에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가혹하다. 버려도 적당히 버려야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 아닌가. 이 작품은 전문가나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스쳐 지나가다가 잠시 머물러서 보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당신은 미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가시던 길 그대로 가시라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런 비난을 받을 걱정을 뒤로 하고 다시 한번 살펴본다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몰라도 굵은 선이 비례를 갖추어 공간을 긴장감 있게 구획하고 있고 뚜렷한 색감이 정사각형의 캔버스의 작은 조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다.


 몬드리안처럼 많이 버리지는 않더라도 불필요한 것의 삭제는 대상의 특징을 뚜렷이 하고, 나아가 본질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장황한 설명을 줄이고 줄거리를 뚜렷이 하고자 하는 경향은 현대 미술뿐만 아니라 건축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시대에는 선호되는 트렌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된 몇 백 년 전의 건축물과는 달리 신축되는 건물은 그 뼈대를 노출시키는 경우가 잦다. 투명한 유리를 벽면으로 구성하여 내부가 비치게 하기도 하고, 벽면이 불투명하다면 외벽에 얇은 철판이나 철골 구조를 설치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해당 건물이 어떻게 구조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화려한 외벽 대신 깔끔한 벽면과 크고 굵직한 선으로 보여지는 전체적인 윤곽과 구조는 부수적인 표현을 상당 부분 소거하고 건물 본연의 용도를 분명히 드러내어 깔끔하다.



 단순화로 견고해지는 사람의 내면


 마찬가지로 내 일상에도 단순화가 필요했다. 직장을 다닌 지 좀 되어서 사회초년생은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기성으로 자리잡기에는 너무 많은 것도 아니요, 이 나이쯤 되면 인생의 갈피가 어느 정도 결정이 나서 상대를 만나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던데 아직 나는 기로를 고정하고 누군가를 책임지기에는,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포기할 무언가가 아쉬울 만큼 무책임하다. 어떠한 것을 포기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분이 이제는 필요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간이 날 때 지인들을 만나 바삐 다니는 삶, 겉핥기 식의 취미 부자,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소개팅 상대들을 위해 소비된 시간은 나를 다양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연은 정작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한 고유성을 제대로 드러내지는 못한다.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고 그 시간 안에서 소진되는 체력도 유한하니 덧붙이고 싶은 요소가 많다고 하더라도 모두 획득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우선순위가 없이 좋아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구난방 시도 해보는 생활은 미사여구가 많아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하게끔 삶의 본질을 흐릴 뿐이라는 쓰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최근 나가게 된 독서모임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한 주 동안 각자 읽은 책을 가져오고 소감을 나눠보는 자리는 모인 사람들이 각자 어떤 고민과 결핍이 있는지를 마주하는 자리이다. 부동산 재테크, 집념하는 방법에 대한 자기개발서 등. 재테크를 읽는 사람에게서 아직은 모르지만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얻기 위한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모습을, 몰입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사람에게서 아직은 알지 못하는 일상 속 무언가에 빠져들고 싶어하는 갈망을 보고는 한다. 비슷한 나이대와 상황 속에 놓인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고민에는 보편성이 있다.


I want something.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

I live for something. 나는 무엇을 위해 산다.


 첫 번째, 두 번째 문장의 공통점은 대상이 있다는 점이다. 각 문장에는 주어인 ‘I’ 뿐만 아니라 목적어도 있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원하고, 그 대상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는 한다. 문제는 그 something,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위해서 사는 지를 모른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도 그 해답을 알고 있는 경우는 드물 것만 같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점은 문장의 구조이다. 목적어가 있는 문장은 3형식이고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아니다. 주어와 동사로만 구성된 2형식 구조는 아래와 같다.


I want. 나는 원하다.

I live. 나는 산다.


 미술과, 건축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핵심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정보 전달에 있어 목적어는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주어만큼은 아니다. 대상이 주체보다 커지는 순간 문장은 불안해진다. 문장에서 개별 성분은 각자 정해진 중요도를 지켜야 하며 그 정도가 전도되면 구조가 흔들린다. 목적어가 어떻게 바뀌든 간에 주어가 제 자리를 잡아야 안정된 언어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나와 저 사람들의 고민에도 불필요한 부분을 소거하고 주요한 핵심만을 남겨 앞으로의 시간에서 채워야 할 부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금부터 쓸 글은 흔들리는 나의 주어가 자리를 잡고자 함이며, 그래서 현재의 내가 조금 더 견고해지고자 하는 고민을 다루어 볼 예정이다. 같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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