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리니 May 03. 2023

인연을 잘라낸 당신에게①-1.

미니멀리즘화의 두 번째 논제: 나는 나로서 어떻게 존립할 수 있을까

나와의 인연을 잘라낸 당신에게


 린다는 오랜 기간 승무원 준비생이었다. 대학 입학 전부터 흔들리지 않는 꿈이었기에, 승무원이라는 고정된 도안 아래 졸업 후 세계를 비행할 나날을 그려보고는 했었다.


 당신은 왜 이 회사의 이 직무에 지원하려고 하십니까? 취업 준비를 막 시작한 이십 대 초중반, 산업과 직무를 가리지 않았지만 지원서를 한 곳에만 쓰는 것처럼 간신배 마냥 동기를 유연하게 바꾸어대던 나와는 달리 린다는 몇 안 되는 항공사에서 채용하는 티오가 얼마 되지 않는 항공직에만 지원했었다.


 몇 년 후 내가 취업을 하고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을 시기에 린다는 여전히 구직 중이었다. 사람 간의 스트레스로 저 사람은 나한테 왜 이럴까, 그래 내가 전생에 저 사람한테 잘못했겠지 라는, 말도 안 되는 윤회론으로 울분을 토하고 있을 때, 린다는 늘 그랬듯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주면서, 자신은 이제 비행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고 있다고 했다. 너는 영어를 잘하니 더 어울리는 직업이 있을 거라고, 나는 위로해줬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취업 전과는 달리 신입 시절 잦은 실수로 기가 죽은 나와, 긴 취업 공백기로 꿈을 접게 된 린다. 우리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점에서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린다가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고 했다. 친구보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생각할 가능성이 높고, 그리고 너는 아직 자리를 잡기 전이니 조금은 고민해보라고 퇴근 후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서 말렸다. 결혼이 급한 건 그 쪽 사정이라며, 관계의 주도권은 자기에게 있다고 답변이 돌아왔다. 순하디 순한 십년지기는 어디 가고 이기적인 말을 하고 자만하는 표정을 짓는 모르는 여자가 눈 앞에 있었다. 순간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이질감이 들었지만,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온전히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말려보았으나, 린다는 행복한 연애 일상을 들려주었고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소식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남자친구를 본 린다의 부모님이 자식의 연애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했다는 말만 전해 들었는데 딸이 불응하자 반대는 점점 극심해졌고 부모에 대한 린다의 반감도 극대화되었다. 여기서 그간의 자세한 사정은 전개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 상당부분 생략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글의 주인공은 내 친구니깐. 글을 씀으로써 생각의 흐름과 일상을 드러내기로 마음 먹은 나와는 달리, 지금의 린다는 단순히 글에 의해 노출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픔을 직면하고 나아가듯이 정말 나중에 본인이 기억을 되짚어 볼 용기가 생겼을 때, 직접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넘길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싶다.


 기억하는 친구의 마지막 모습은 어머님의 부탁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간 여름날 저녁 파스타 집에서였다. 당시 그 남자를 만나게 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린다는 근시일 내의 결혼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는 속 밑바닥까지 약삭빠른 사람은 못 되었다. 제가 갑이라고 제 미래 계획이 있으니 결혼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앞선 말이 무색하게, 어린 나이에 사회적으로 준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 준비를 하고 자식 계획을 세우는 린다의 모습에서 친구가 말했던 ‘비행이 아닌 다른 앞날’이 모호해져 감을 느꼈다.


 화를 내는 부모와 자신의 뜻은 다르다고 남자의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러 갔다는 정의로운 친구의 이야기에 나는 아프게 화가 났다. 그가 비윤리적으로 ‘효’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식도 함부로 대하는 남의 부모가 소중히 생각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가족을 초라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럼에 따라 린다 자신을 그 별볼일 없는 집안의 일원으로 쉬이 다뤄져도 될 존재로 전락시켰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그와 십 여 년 간 같이 보낸 내 시간을 보잘것없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마치 모욕을 당한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병신 같은 년. 나는 정말이지 린다가 아프게 미워서 독한 말을 머금고 있었다.




 속내가 이러했으니 나가는 말도 고울 리가 없었다. 파스타를 사이에 두고 인간관계 다이어트를 하는 김에 나도 정리하라고 참 못된 말로 몰아세웠다. 상처를 주는 가해자는 분명 나인데, 눈빛을 잃어가는 친구를 앞에 두고 도리어 내가 눈물이 났고 눈물이 나서 화가 났다. 그리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나는 반복 속에 한쪽이 상대를 일방적으로 쏘아붙이는 일련의 상황의 지속. 나는 그 날 친구를 잃었다.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고민을 공유했던 과거의 우리. 그리고 현재, 무례하게 취급된 그를 보며 상처받은 나와 가족으로 인해 폭로되고 나에게 배신당한 린다. 우리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작가의 이전글 벚꽃이 펴서 떠오른, 그날 차인 기억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