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와 예술가에게서 배운 글쓰기의 목적

by 홍종원

나는 존경하는 직업이 있다.
요리사예술가이다.


내가 집에서 끓이는 국이나 찌개는 그저 그렇다.
아주 못 하지는 않지만, 맛있다고 하긴 어렵다.
그런데 한때 백종원 레시피를 따라 해 본 적이 있다.


놀라웠다.
같은 내가, 같은 부엌에서, 같은 재료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니.
잠시 착각했다.
나에게 숨은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그 후 나는 백종원을 존경하게 됐다.
그리고 요리사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그 능력.
그건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이다.
소금이 녹아드는 순간의 향,
끓는 국물에서 피어오르는 김,
한 입에 퍼지는 깊은 맛,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작품 같았다.


예술가에 대한 존경심은 조금 다르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는 예술가도 없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거의 없다.
와이프 덕에 전시회에 몇 번 가본 것이 전부다.


처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나중에는 작품 해설을 읽어야만 의미를 알 수 있다는 점이 조금 짜증스럽기도 했다.
설명이 있어야만 이해되는 작품이 과연 예술일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예술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저절로 감탄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지만, 예외는 있었다.
잘 꾸며진 공원에서 조각 작품이나 예술적으로 설계된 공간을 마주했을 때다.
그 순간만큼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햇빛이 스치는 돌 표면의 질감,
쇠가 빚어낸 곡선의 부드러움,
나무와 건축물이 어우러져 만드는 조화가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흔한 돌, 쇠, 나무로 어떻게 이렇게 멋진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순간의 놀라움은,
같은 재료로도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요리사를 볼 때와 비슷했다.
재료는 평범하지만,
결과물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TV에 나오는 예술가의 집을 보면, 그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에 비하면, 나름 정리정돈에 신경 썼다고 믿었던 우리 집은 순식간에 쓰레기장처럼 보인다.


생각해 보니 나는 생활 속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는 장인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같은 재료로,
같은 조건에서,
남들이 만들지 못하는 것을 만드는 능력.
그것이 노력에서 온 것이든, 타고난 감각에서 온 것이든, 혹은 둘 다이든 간에 존경할 만하다.


최근에는 이런 생각도 한다.
예술가들이 전시회를 위해서만 작품을 만들지 않고,
도시나 거리에 조금이라도 그 감각을 적용했다면,
우리의 생활환경이 얼마나 멋져질까 하고.


믈론 요리와 달리 예술 작품은 누구나 쉽게 만들기는 어렵다.
아무리 쉽게 가르쳐도 말이다.
하지만 감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일상 속에서, 길거리에서, 어디에서든 예술을 느끼고 싶다.


유럽에 가본 적은 없다. 하지만 글과 영상을 통해 그들의 예술적 건축물과 거리를 본다.
그 건물들을 유지하기 위해 개보수가 어렵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지만 그대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들의 예술에 대한 애정은 이해하지만, 나에겐 조금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예술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최근에 지어진 그들의 건물은 다르다.
예술적 요소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실용성까지 겸비하고 있다.
우리도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주거 환경은 생활 편리성을 위한 아파트 형식이 대부분이다.
아파트 설계에 예술가가 참여하는지 모르겠다.
실용성만이 아니라, 예술성이 함께 숨 쉬는 주거 공간.
그것이야말로 미래의 모습일 것이다.




유럽의 차는 비싸서 그런지 참 멋지다.
우리는 경쟁력 때문인지 저가형 차량이 주류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차는 종종 조잡해 보인다.
그러나 같은 원료로도 멋을 살릴 수 있다.
예술가가 돌과 쇠로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고,
요리사가 같은 재료로도 훌륭한 맛을 내듯,
차가 싸서 멋이 없다는 건 변명일 뿐이다.


우리 역사를 돌아봐도,
예술적 수준이 유럽에 비해 뒤처질 정도로 낙후되지는 않았다.
다만 발전을 위해 너무 급히 달려오느라 예술성을 놓친 것이다.
이제는 하나하나씩 우리의 전통과 예술성을 되살려야 한다.
그래야 실용성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환경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내 마음속에서 아름다움을 전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요리사와 예술가.
서로 전혀 다른 일을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서 느끼는 공통점은 '존경'이다.
무엇에 대한 존경일까.
아마도 '감동'에 대한 존경일 것이다.
요리사는 맛으로, 예술가는 멋으로 나를 감동시킨다.


그리고 나는 이 감동을 한 단계 더 넓혀 '아름다움'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곧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가 요리사와 예술가에게서 느끼는 모든 감정의 가장 윗자리에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나의 글쓰기에도 이어진다.
글은 감정을 기록하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소설, 수필과 시라면 '감동'이,
과학, 기술, 경제, 정치라면 '통찰력'이 그 아름다움일 것이다.


감동은 마음 깊숙한 곳을 울려,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피어나게 만든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그 울림 속에서 우리는 삶을 더 선명하게 느낀다.


통찰력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길을 비춰준다. 보지 못했던 연결을 보여주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 깨달음의 순간,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이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감동과 통찰력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서 결국 같은 곳, 즉 아름다움에 이르게 된다.
형식은 달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오래 남기는 힘은 같다.
감동이든 통찰력이든, 그 본질은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나는 형식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한다.
수필은 수필다워야 하고, 시는 시다워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글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데 있다.
형식이 어떠하든, 독자가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 글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여러 글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감동이나 통찰력, 그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아이들에게도 가끔씩 말한다.
글을 읽어라.
노래를 들어라.
그림을 봐라.
풍경을 바라봐라.
여행을 떠나라.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껴라. 그것이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다.


나는 내 글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을 전하는 글이 되길 바란다.
요리사와 예술가가 같은 재료로 전혀 다른 맛과 멋을 만들어내듯, 나도 글이라는 재료로 누군가의 마음에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

아름다움이 없는 글은, 잉크만 묻은 종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