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컵 하나가 알려준 기도의 방법

by 홍종원

나는 종교가 없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다. 그 자유 속에서 나는 무신론자로 살아왔다.
반면 아내는 장로회 교회를 다닌다. 흥미로운 건, 나는 아내의 신앙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지나치게 열성적이지 않아서다.


일요일에 여행 일정이 잡히면 미련 없이 교회를 포기한다. 교회에 갈 때도 운동복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선다. 참 편하다. 어릴 적부터 이 동네에서 자라 교회를 터줏대감처럼 드나들었으니, 괜스레 풍기는 ‘토박이 자신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이 부럽기도 하다. 종교에 편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믿음을 갖지 못했을 뿐이다.




일요일 아침은 늘 전쟁이다. 아내는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억지로 데리고 교회에 간다. 나는 집에서 늦잠을 잔다.


결혼 초에는 아내를 따라 여러 교회를 다닌 적도 있었다. 이사할 때마다 교회도 바뀌었고, 목사님들의 설교 스타일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목사님은 성경 구절을 차분히 풀어내며 해석에 충실하셨고, 또 어떤 목사님은 믿음의 힘을 열정적으로 강조하셨다. 또 다른 교회는 기도 시간에 조명과 음악을 활용했는데, 공연장을 연상케 해 신선하기도 했다.


“아, 교회마다 이렇게 다양한 색깔이 있구나.” 그때 나는 놀라면서도 조금은 흥미로웠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교회의 스타일이 아니다.


가끔 아내는 신앙심이 깊어지는 날이면 아이들과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린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지켜본다. 아이들과 아내는 차례로 기도를 올린다. 아이들은 아직 초등학생이지만 제법 능숙하다.


그런데 들을수록 묘한 이질감이 스며든다.


“할아버지가 건강하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이 평안하게 해 주세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게 해 주세요.”


하나같이 ‘바라는 내용’뿐이었다. 노력이나 행동은 빠져 있고, 기도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질 것 같은 소망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어딘가 아쉽게 느꼈다. 마치 중요한 무엇이 빠져 있는 듯했다.




나는 한때 종교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적이 있다. 신의 존재를 알고 싶어 여러 책을 읽었지만, 의문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느 날, 책상 위에 물컵 하나를 올려두고 이렇게 기도했다.
“이 물컵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주세요. 당신이 계신다면 제게 존재를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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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신이 정말 응답하신다면, 어떤 방식일까?
물컵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저쪽에 나타날까?
아니면 책상을 흔들어 물컵을 움직일까?
혹은 누군가 우연히 찾아와 아무렇지 않게 물컵을 옮겨놓을까?


아인슈타인은 ‘빛보다 빠른 것은 없다’고 했는데, 신의 권능은 빛보다 빠를까?


그 질문은 오래 내 마음을 붙잡았다. 지금에 와서 알게 된 건, 이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과학과 신학이 맞부딪히며 논쟁해 온 주제라는 사실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길게 정리해 신학과 과학의 균형점을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쓰고 싶지 않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학문적으로 풀어내도 잘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은 분이라면 직접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여기까지 못 온 분이라면 애초에 내 글에 관심이 없는 것이니 굳이 힘들게 적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나는 결국 이렇게 결론 내렸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을 통해 일을 이루신다.”


기도의 응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도, 눈앞에 펼쳐지는 기적도 아니다.
물컵을 옮겨달라는 기도는, 결국 내가 손을 뻗어 옮길 때 이루어진다. 신은 나를 통해 그 일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아이들의 기도가 어딘가 아쉽게 들렸다.


“할아버지가 건강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할아버지가 건강하도록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깨닫게 하시고, 그 일을 감당할 힘을 주십시오.”


“가족이 평안하게 해 주세요.”라는 말도,
“내 마음의 성급함과 화를 다스려, 가족이 평안을 느낄 수 있도록 제게 인내와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고쳐야 하지 않을까.


기도란 ‘마법 같은 결과’를 요구하는 주문이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할 힘과 의지를 구하는 행위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전쟁터로 떠난 자식을 위해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어머니의 정성처럼.


그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신에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일상의 소망, 내가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라면 기도의 방향은 달라야 한다.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그 일을 위해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최선을 다했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때는 신에게 서운함을 토로해도 되지 않을까.
적어도 노력하지 않고 바라는 것보다는 훨씬 정직한 태도니까.




나는 지금도 종교가 없다. 하지만 기도에 대해서만큼은 나름의 정의를 갖고 있다.


기도는 세상을 바꿔달라는 주문이 아니라,
내가 먼저 바뀌기 위한 다짐이자 힘의 요청이다.


아내와 아이들의 기도를 들으며 느낀 이질감은 바로 이 차이에서 비롯된 것 같다.
당신도 언젠가 다른 사람의 기도를 들을 때나, 스스로 기도문을 읽는 순간에 이 차이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기도는 결국, 세상을 바꾸기 전에 나 자신을 바꾸려는 다짐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내에게도 이런 생각을 전하고 싶지만, 이미 자기만의 신앙관을 가진 사람에게 내 정의를 억지로 들이밀고 싶진 않다. 다만 언젠가 그녀도 기도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때 오늘의 나를 조금은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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