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아무 이유도 없이 문득 떠올라 마음을 흔드는 기억이 있다.
그 남자의 시선
가끔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다 보면, 불현듯 그녀가 떠오른다.
예전 회사에서 가끔 마주쳤던 여자.
함께 일한 적은 없지만, 복도와 엘리베이터에서 스치며 얼굴만 아는 사이였다.
그녀는 늘 밝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다.
꾸미지 않았지만 단정했고, 그 수수한 모습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러나 내 시선을 오래 붙잡은 건 웃음이었다.
동료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 그 웃음은 꾸밈없고 따뜻했다.
그 순간 이후, 그녀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조금씩 그녀에게 기울어졌다.
어느 여름날 퇴근 무렵, 비가 굵어졌다.
나는 현관 앞에서 우산을 펼치려던 순간, 옆에 그녀가 서 있는 걸 보았다.
우산이 없어 발만 구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영 말을 못 할 것 같았다.
“지하철 역까지 같이 쓰고 가실래요?”
그녀가 놀란 듯 고개를 들더니,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내 가슴은 요동쳤다.
우리는 작은 우산 아래 나란히 걸었다.
좁은 공간 탓에 어깨는 스칠 듯 가까웠다.
나는 우산을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내 어깨와 팔은 이미 반쯤 젖었지만, 이상하게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다리를 다쳐 병원에 계신다고 했다.
며칠 동안 병원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지낸다는 말에,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말솜씨가 없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그 속에는 꿋꿋함도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짧은 길이었다.
그러나 빗소리, 젖은 공기, 그녀의 옆모습은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오래 남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회사를 옮겼다.
다른 풍경 속에서 살아가며 그녀의 웃음은 점차 잊혀갔다.
그러던 오늘 저녁.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가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게 보였다.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닫힌 문 너머,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오래 묻혀 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났다.
그 여자의 시선
지하철 게이트를 통과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플랫폼에는 이미 열차가 들어와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달렸지만, 문은 눈앞에서 닫혔다.
떠나는 열차 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예전 회사에서 본 남자였다. 이름은 희미했지만 얼굴은 분명했다.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끔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면 늘 그가 있었다.
창백하고 허약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눈빛은 조용히 따뜻했다.
한 번은 무거운 짐을 옮기던 날, 그가 달려와 대신 들어주었다.
나보다 힘이 없을 것 같았는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온 힘을 다해 박스를 옮겼다.
그때 알았다. 겉모습은 연약해도, 마음만은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비가 쏟아지던 어느 저녁, 우산이 없어 회사 현관에서 발만 구르고 있던 내게 그가 다가왔다.
“같이 쓰고 가시죠.”
작은 우산 속에서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그는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고, 본인은 절반쯤 젖어 있었다.
우산을 잡은 그의 하얀 손가락, 빗속에서 은은히 스며든 체취, 가까운 호흡.
아무렇지 않게 걷는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알 수 없이 뛰었다.
역에 도착하자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회사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렇게 그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오늘, 지하철 문 너머에서 다시 보았다.
시간은 흘렀지만, 작은 우산 아래서 걸었던 그 순간이 다시 살아났다.
그 남자와 여자는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 약속도, 연락처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우산과 빗소리, 닫히는 문 너머의 눈빛은 오래도록 서로의 기억 속에 남았다.
끝났으니 끝난 게 아니라, 스쳐갔기에 끝내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