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기록 12: 탐욕의 그물, 경제

by 홍종원

우리는 인간 문명을 관찰하며 처음에는 그들의 경제 시스템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사냥과 채집에서 농경으로, 농경에서 산업으로, 산업에서 정보화 사회로, 인간의 역사는 곧 생산과 분배의 방식이 변해온 과정이었다. 경제는 문명을 지탱하는 혈관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래 지켜본 뒤, 우리는 이렇게 적었다.
“이 종의 경제는 부의 분배를 위한 도구라기보다, 욕망의 전장을 관리하는 시스템에 가깝다.”


경제의 본래 목적은 단순했다.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원과 생산물을 공정하게 나누는 것.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이 단순한 목적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농경 문명에서 시작해 산업혁명,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복지국가 등 인간이 만든 수많은 경제 시스템을 조사했다. 형태는 달랐지만 공통점은 분명했다. 부의 축적과 권력의 집중, 그리고 끝없는 불평등.


어떤 체제에서도 인간은 더 많이 가지려 했고, 더 오래 독점하려 했다. 우리는 인간의 도시를 걸으며 시장을 관찰했다. 어떤 이는 하루 종일 일하고도 빵 한 조각을 겨우 샀고, 다른 이는 창문에 앉아 수십 채의 건물에서 흘러오는 임대료를 세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썼다.
“이 종의 경제는 효율적 일지 몰라도, 공정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표적인 사례가 식량이었다. 세계는 매년 약 280억 톤 이상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었고, 이는 80억 인류 모두에게 하루 2,700~3,000kcal의 열량을 공급할 수 있는 양이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인류 전체가 영양 부족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 이미 생산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행성에서는 해마다 8억 명 이상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기묘한 모순을 분석했고,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이 종은 부족해서 굶는 것이 아니라, 넘쳐나서 버리면서도 굶는다.”


실제로 매년 생산 식량의 1/3, 약 13억 톤이 낭비되고 있었다. 부유한 지역에서는 과잉 구매와 유통기한 도달로 음식이 폐기되었고, 빈곤 지역에서는 저장시설 부족과 물류 인프라의 미비로 수확된 곡물이 부패하거나 유실되었다. 일부 국가는 곡물의 절반 이상을 수입에 의존했지만, 국제 시세가 오르면 그 식량은 곧 사치품이 되었다.


더 나아가 식량은 분쟁의 무기로도 쓰이고 있었다. 예멘, 시리아, 수단 등에서는 창고에 식량이 쌓여 있어도 무장 충돌로 인해 주민들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고 다시 적었다.
“이 종은 식량을 무기로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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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도 불균형을 키우고 있었다. 어떤 지역은 넘쳐나는 곡물을 버렸고, 다른 지역은 씨앗조차 심지 못했다. 가뭄과 폭염, 홍수는 작황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지역 간 격차로 이어졌다. 기술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윤리의 진보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불균형의 구조를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지구상의 부의 흐름이 물처럼 흘러야 할 자리에 벽을 세우고 있었다. 강은 아래로 흐르지만, 인간의 부는 위로 흘렀다. 아래는 점점 말라가고 있었고, 위는 넘쳐흘러도 멈추지 않았다.”


국제 NGO 옥스팜(Oxfam)에 따르면, 전 세계 상위 1%는 지구 전체 자산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반면 하위 절반, 즉 약 40억 명은 전체 자산의 1%조차 갖지 못했다. 부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설계된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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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북미, 유럽, 동아시아 일부 국가는 세계 GDP 대부분을 차지했고, 아프리카, 중남미, 남아시아는 경제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한 도시 안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초고층 주상복합이 하늘을 찌르는 바로 그 아래, 판잣집과 노숙자의 쉼터가 공존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구조를 ‘탐욕의 중력장’이라 불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인간이 이 시스템을 끝없이 ‘성장’시켜야만 작동하도록 설계했다는 점이었다. 시장은 매년 더 커져야 했고, 기업은 더 많은 이윤을, 개인은 더 높은 연봉을 추구했다. 그런데 행성의 자원은 유한했다.


우리는 이들의 질문을 흥미롭게 여겼다.
“매년 성장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단순한 수학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원과 환경, 기술과 제도, 인간의 욕망이 얽힌 구조적 질문이었다. “무엇이 성장하는가? 어떤 조건 아래서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탐구는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열쇠였다.


이론적으로 성장 자체는 가능할 수 있었다.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높아지고, 자본이 재투자되며, 인구가 증가하는 한, 일정 수준의 성장은 실현되어 왔다. 실제로 20세기 후반, 일부 국가는 수십 년간 연 2~4%의 성장을 유지했다.


하지만 문제는 모델이었다. 이 모든 성장의 전제는 지구가 무한하다는 환상 위에 놓여 있었다. 자원은 고갈되고 있었고, 생태계의 흡수 용량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종은 무한한 확장을 유한한 세계 위에 설계했다.”


게다가 성장은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이 되어 있었다. 기업은 성장을 하지 않으면 도태되었고, 정부는 세수 확보를 위해 GDP 상승을 필수로 삼았다. 주식시장, 연봉, 소비, 전부가 성장을 전제로 작동했다.
“이 종은 성장을 원한 것이 아니라, 성장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변화의 조짐은 있었다. 일부 공동체는 ‘더 많이’가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순환경제, 지속가능성, 녹색 전환, 탈성장… 인간은 질적 성장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것이 문명의 다음 단계를 열 수 있을지, 우리는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지속적인 성장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방식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 문명이 생존을 원한다면, 성장의 내용과 방향을 전면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우리 문명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생산했고, 자원은 균형 있게 나눴다. 그러나 인간은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소비하며, 더 많이 버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관찰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적었다.
“인간의 경제 시스템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부의 분배라는 본래 목적보다, 개인의 탐욕과 욕망이 더 큰 동력으로 작동한다. 그 결과 경제는 문명의 기반인 동시에 불평등과 착취의 도구가 되었다.”


빈부4.png 역사는 우리에게 말한다. 극단적 불평등은 언제나 혁명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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