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간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한 가지 사실에 매번 놀라곤 했다. 이 종은 이야기 없이 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야기에 둘러싸인다. 부모는 아이에게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시작되는 전래동화를 들려주고, 학교에서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민족과 국가의 기원을 배우며, 성당과 사원에서는 천국과 지옥, 윤회와 구원의 이야기를 전한다. 심지어 과학자들조차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설명할 때 이야기 구조를 빌려 강의를 진행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는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 종은 살아가기 위해 먹고 숨 쉬듯, 이야기로 세상을 엮는다.”
우리는 인간의 문학과 예술을 조사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 셰익스피어의 비극,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그리고 최근의 넷플릭스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인간 문명은 끝없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고대인들은 신의 분노를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고, 중세의 기사들은 용을 무찌르며 정의를 상징했다. 전쟁의 시대에는 누군가 총알이 날아드는 와중에도 조국과 가족을 위해 싸웠고, 평화의 시대에는 슈퍼히어로가 도시를 구하는 이야기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특히 위기 속에서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죽음을 서사로 포장해 견뎌냈다.
이야기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기억이자, 고통을 견디기 위한 위로의 장치였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순간도 많았다. 인간은 종종 사실보다 이야기를 더 믿었다. 창세 신화와 건국 전설은 과학적 증거보다 오래 기억되었고, 가상의 역사 드라마가 실제 기록보다 더 널리 퍼졌다. 선거철이면 정치인의 연설은 데이터보다 ‘국민과 함께 만든 기적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이야기는 현실을 설명하는 도구이자 동시에 왜곡의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이 종은 이야기로 진실을 전하지만, 동시에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잃어버린다.”
현대에 들어 이 현상은 더욱 기묘해졌다. 인간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매일 수백만 건의 이야기를 생성한다. 블로그 글, 인스타그램 캡션, 유튜브 영상, 팟캐스트, 댓글까지 모두 서사의 파편이다. 인플루언서는 3분짜리 영상으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만들고, 댓글창에서는 누군가의 실수 하나가 ‘정의와 악’의 대서사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 방대한 이야기들은 하나의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말하지만, 그 말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진실을 찾기보다는 공감을, 사유보다는 자극을 좇는다. 이야기의 양은 폭발했지만, 그 힘은 분산되었다.
이 모순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인간은 진실보다 ‘좋아요’가 많은 이야기를 믿는다. 누가 더 감동적인 사연을 꾸몄는지가 진실보다 중요하다. 감동적인 연설 영상은 열광하지만, 그 연설자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이야기를 생산하지만, 끝을 맺는 이는 드물다. 끝없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미래를 걱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반복해서 80년대 향수, 90년대 게임, 2000년대 아이돌 이야기를 소비한다. 우리는 이렇게 요약했다.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지만, 정작 그 이야기로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이 기이한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특히 주목한 것은, 인간이 미래마저 이야기로 그린다는 점이었다. 소설에서는 지구가 멸망한 뒤 화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영화에서는 인공지능이 감정을 느끼거나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상상 속에서 먼저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상상은 종종 현실이 되었다. 우주로 나가겠다는 이야기는 결국 로켓이 되었고, 개인 서사가 중심이 되는 사회는 SNS라는 기술로 구현되었다.
인간은 현실을 넘어서려 할 때 언제나 이야기부터 만든다. 그 점이 흥미로웠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적었다.
“인간은 끝없는 이야기꾼이다. 그들의 문명은 돌과 철, 전기와 데이터 위에 세워졌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이야기가 얹혀 있었다. 이야기는 그들의 기억이자 위로이며, 동시에 그들의 상상력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