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합리성 사이에서

by 홍종원
진정한 합리성이란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까지 포함한 판단이어야 한다.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과연 합리적인가?” 우리는 합리적이란 단어를 참 자주 쓴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실수를 하거나 후회가 남을 때, 혹은 남의 선택을 평가할 때도 그렇다. 그런데 막상 합리적이라는 게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보면, 그 경계가 생각보다 모호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에게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다가온 건, 가족과 이사를 고민할 때였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더 저렴한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산이 금방 끝났다. 더 싸고, 교통도 괜찮고, 당장 재정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막상 와이프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생각한 ‘합리’라는 것이 너무 좁은 범위에 갇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와이프는 결혼 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닐 때마다 늘 불안해했다. 겨우 고향인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안정감을 찾았는데, 다시 또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하다고 했다. 나는 처음엔 ‘적응이 뭐가 그리 어려울까’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게 두려울 때가 많았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싫다고 했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와 친구가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사가 ‘합리적’인 결론 같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 순간 느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합리적이라는 기준이 너무 단순한 계산에만 머무를 때가 많다는 것을. 합리라는 단어에 감정이 포함되지 않는 게 과연 맞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감정이라는 게 늘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감정은 때로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신호다. 와이프의 불안, 아이들의 거부감 역시 단순히 ‘변화가 싫다’는 투정이 아니라,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의 표현일 수 있다. 나 역시 ‘가족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이 모든 고민을 시작한 게 아닐까.


우리는 사회생활에서도 자주 ‘합리성’이라는 명분 아래 감정적 요소를 배제한 채, 기계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감정은 방해물이거나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진정한 합리성이란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까지 포함한 판단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이란 단순히 해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준이다.


합리성이라는 것도 결국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 목적이 행복, 안정, 사랑, 소속감 같은 감정적 가치라면, 합리성은 그 감정을 해치지 않는 방법을 찾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돈을 아끼는 것, 더 효율적인 환경을 찾는 것,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수단과 목적을 뒤바꾼다. 숫자와 논리로만 따져서 정작 중요한 감정은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만을 좇을 수는 없다. 만약 형편이 더 어려워져서 지금의 생활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이사를 해야 한다. 그때는 감정의 상처를 감수하고서라도 가족 전체의 생존과 안전을 우선해야 한다. 합리적 결정이란 결국, 감정도, 경제적 조건도, 미래의 위험도 모두 한꺼번에 저울에 올려놓고 고민하는 과정이다. 감정이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경제적 파탄 역시 반드시 고려해야 할 현실이다.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진짜 합리성’이란 계산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과 논리가 충돌할 때, 그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저울질하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 나름의 균형을 찾아가는 힘. 그것이 우리가 매일 맞닥뜨리는 선택의 본질 아닐까.


나는 결국 이사를 미루기로 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이 동네에 머물 방법을 찾기로 했다. 경제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지만, 가족의 마음이 무너지는 건 더 큰 손실이라고 느꼈다. 그래도 만약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면, 그때는 가족 모두와 충분히 이야기하고, 감정을 돌보면서 변화에 적응할 방법을 함께 찾을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숫자와 논리로만 따진 선택보다 내 마음과 가족의 감정을 함께 들여다보고 내린 결정이 내 안에 더 오래 남는다. 결국 합리와 감정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루는 두 축처럼 서로를 비추고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한쪽만으로는 균형이 깨지고, 둘이 함께할 때 비로소 우리가 진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나는, 숫자와 마음 사이에서 작은 균형을 잡으려고 애쓴다. 때로는 그 균형이 흔들리기도 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내 삶을 조금씩 더 깊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어쩌면 합리성이란, 그렇게 매일매일 나와 내 가족의 감정을 보듬으며 조금 더 나은 길을 찾아가는, 아주 인간적인 노력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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