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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치규 Mar 18. 2022

더불어 정치 (3) 통합보다 안배와 조정을!

부부싸움을 해보면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말들 중 하나가, “왜 당신은 나를 이해 못하는가?”입니다. 부부는 이른바 ‘일심동체’인데 배우자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과 반목이 있을 때 우리는 무척 서운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부부는 단연코 ‘일심동체’가 아닙니다. ‘이심이체二心異體’입니다. 몸도 다르고 살아온 삶도 다르고 그래서 습관도 생각도 다릅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몸’을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태도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판단이 달라 싸움을 했으면 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따지기 전에 자기의 입장이 무엇이며 배우자의 입장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고 어떤 지점에서 갈등이 발생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서로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고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 하며 가정의 화목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갈등을 해결해 주지도 못합니다. 가정 뿐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모든 공동체에서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많은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실패하게 되는 것은 ‘통합’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있어서 입니다. 통합이 불가능할 때도 있고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극심한 분열을 경험합니다. 나라가 거의 둘로 쪼개어지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당선자의 첫마디는 대부분 ‘국민통합’입니다. 선거를 통해 갈라진 민심이 통합되어야 하며 특정 분파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당선인들은 선언합니다. “국익을 우선시하면 진보도 보수도 없으며 영남과 호남도 따로 없다”고 선언한 당선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급하게 통합을 말하는 이런 태도는 무척 위험합니다. 방금 전까지 눈에 불을 켜고 삿대질을 하고 싸움을 했는데 갑자기 가정은 하나며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말하는 것은 생뚱맞은 일입니다. 나의 입장은 이렇고 당신의 입장은 저러니 나는 이것을 양보하고 당신은 저것을 양보하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한 방식입니다. 자신을 지지한 국민과 반대한 국민이 분명히 존재하고 좌와 우도 분명히 존재하며 그래서 조금 전까지 피터지게 싸움을 했는데 통합을 외친다고 통합이 될 리 없습니다. 


공동체는 하나로 통합될 수 없습니다. 주로 둘로 갈라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둘의 존재를 부정하지 말고 명백히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갈라진 둘을 통합하려 애쓰지 말고 서로간의 차이를 좁히고 안배하고 조정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분열을 막으려는 것이 일차적으로 필요한 태도입니다. 이런 방식이야말로 ‘더불어 정치’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정치’의 ‘더불어’는 "둘 이상의 사람이 함께 하다, 무엇과 같이 하다"라는 의미의 '더불다'라는 말, "거기에다 더하여"라는 '더불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말은 상대방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다른 입장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적폐’로 몰아 전폐하려 한다면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상대를 전적으로 파멸시킬 수는 없고 나와 동화할 수 없습니다.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욱 심한 너와 나의 대립이 나타나고 맙니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둘’이 있습니다. 기업가와 노동자, 집을 가진 자와 없는 자,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 수도권과 비수도권, 경상도와 전라도, 원청과 하청,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영업자와 근로자, 남자와 여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노인들과 젊은이들, 여와 야, 세금을 내는 자들과 내지 않는 자들, 중산층 이상과 서민, 기관과 개인, 슈퍼개미들과 진짜 개미들, 친일과 반일, 친미와 친중, 반핵과 찬핵,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마초와 페미 등등 다양한 ‘둘’이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둘이 결국은 보수와 진보라는 큰 ‘둘’로 수렴되어 대립하고 경쟁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치적 지형입니다. 미국과 영국이 그렇고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서로를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어설픈 통합의 시도는 결국 너는 왜 나와 다르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나를 이해하고 나와 하나가 되어야 하며 나와 다른 너는 사라져야 한다는 등의 태도로 이어지고 이는 압제적입니다. 이런 정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를 분열시키는 일을 우리는 수없이 목도해 왔습니다. 


갈등과 대립이 있고 나와 다른 입장이 내 앞에 마주 서 있을 때 우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과 상대방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지킬 것은 무엇이며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은 어떤 부분인지 서로 명확히 하고 시작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그리고 양보하고 타협해 공동체의 평화가 유지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늘 불만이 남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장하고 분배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성장과 더 많은 분배를 요구할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했지만 민주화의 요구로 박정희는 부정되었고, 자유와 민주에의 갈망으로 선택된 김대중 노무현은 그 무능으로 다시 이명박으로 대체되었듯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조정과 분배의 강조점이 달라질 뿐입니다. 


통합은 우리 모두의 이상이 될 수는 있지만 현실은 아닙니다. 타협과 조정이 목적입니다. 통합을 위해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안배하기 위해 대화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셋을 다 가지려 하지 말고 둘을 취하고 하나를 얻겠다는 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상황이 어려울 때에는 하나만 가지고 다음에 둘을 얻도록 해야 하겠다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불어 하는’ 삶과 정치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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