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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Jan 11. 2016

돈의 이름

104 봉투라는 이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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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정비소에 방문할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이런저런 것을 고쳐야 하는데 정비소에서 일하는 분의 말대로 하면 일단의 '규칙'을 따르는 것보다 저렴하게 해결 할 수 있었다.



정한 날짜에 방문을 하고 차를 정비소 리프트에 위치시켰다.



"전에 말씀드린대로 하고, 금액은 8만원입니다."

"아.. 네, 그러면 찾으러 올 때 드릴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끝나면 어디로 연락을...?"

"제가 3시나 4시에 찾으러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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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읽기로 작정한 책이 있었기에 근처에 종종 다니는 카페에 앉아서 두어시간 앉아있을 요량이었다.

차가운 음료를 주문했는데 박카스에 라임을 섞은듯한 맛이었지만, 목이 타니 그것도 나름 청량하게 넘어갔다.


자리를 잡고 지갑에 넣어둔 현금을 확인하고 나서는 책도 읽고, 핸드폰에 있는 실황영상도 보고 있자니 옆자리에 앉아있던 어떤 여학생은 요즘 유행한다는 컬러링 북을 그려내고 있었다.



'저걸 저렇게 그리다가는 스트레스를 더 받겠다. 스트레스보다 손에 쥐가 먼저 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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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기도 그게 아니기도 한 상태가 될 때쯤 시간이 얼추 됐다.

찌뿌둥한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정비소 앞에 다다를 때쯤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아, 봉투.'


서둘러서 주변에 은행과 ATM기를 둘러봤는데 예전부터 있던 봉투가 요즘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은행에 들르면 습관처럼 두어장 가방에 예비로 봉투를 챙겨놨었는데 마침 쓸 날이 되어서는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500원하는 무지봉투를 사서 지불할 돈을 집어넣고 들어가려는데 문득 내가 왜 봉투를 샀는지 의아해졌다.


'봉투... 왜 돈을 봉투에 넣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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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 세장, 오만원 한장의 돈을 손에 쥐어서 손으로 바로 주면 안되는 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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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돈에도 이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 같아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돈에는 돈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격이 들어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몇 천원을 주거나 갚더라도 주머니나 지갑에서 바로 꺼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구겨진 돈이든 반짝거리는 새돈이든 봉투에 넣어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


상점에서 물건을 사더라도 점원 앞에 휙 던지는 알량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점원이 내미는 손 위에 가지런히 전해주는 사람이 있다.



드라마에서 보면 졸부들이 '돈'에 대한 예의를 잘 못 지킨다.

황금만능주의를 부르짖는 배역들이 오히려 돈을 함부로 던지거나 주인공의 얼굴에 흩뿌리는 장면은 친숙하다.


사람보다 돈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주는 역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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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는 돈을 사용하는 사람의 이름, 흔히 '이름 값'이라는 관용구가 가지는 그 '이름'이 쓰여진 것 같다.


물론, 요즘에는 카드나 어플로도 결제를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현금'을 쓰는 경우가 적어졌지만

새로운 시대의 돈의 역할을 갖는 매개물들 또한 '이름'의 값어치를 보여주는 기능은 크게 다르지 않은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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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는 '돈'이 가진 속물적인 낯을 가려준다. 

돈에 집착하는 것은 전통적 세계에서도 옳지 못했다. 

돈에 매몰되기에 사람들은 더 높은 이상을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을 정성으로 여기는 결혼식이나 장례, 종교적 헌물 경우에도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보여주고 싶어서 봉투에 넣어서 전달한다.




돈을 봉투에 넣어 전하는 것은 돈이 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돈을 받는 사람에게 예의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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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봉투에 넣어 전하는 습관은 부모님에게 배웠다. 

어떤 명목의 회비는 항상 봉투를 들고 다녔다.


요즘에 이렇게 챙기는 사람들은 흔치 않은지라 종종 봉투에 담은 돈을 받게 될 때에는 그 사람이 달라 보인다.




은행에서 수납하는 기능적인 관계가 아니라 

돈의 액수보다 한겹 더 높은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존중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짝이고 뻣뻣한 돈보다는 봉투에 들어있는 돈이 더 말쑥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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