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잊어버린 절대적인 근거
얼마전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N사의 블로그에 남겼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내가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고 느낀 것은 주인공인 '로드리고 신부'의 갈등 그대로였다. '신의 침묵' 대개의 기독교인들이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근래 느끼는 불안함, 갈등이기도 하다.
슈사쿠는 로드리고 신부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두 명의 시골 농민이 바다에서 순교를 당하는데 거기엔 어떤 휘광도 지진도... 구약이나 신약에서 봤던 신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사는 그들의 삶에 신이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침묵'을 느끼게 된 것이다. '침묵'이라고 표현하는 일종의 답답함은 오늘 날에도 무수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침묵에 대한 이야기에 어떤 이가 존 푹스의 저서 <선교사> 속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에 로마병사가 순교자의 죽음에서 환상을 보고 회심한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피의 자연 관찰이나 침팬지 연구를 했던 제인 구달 여사를 '신의 침묵'에 빗대어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다.
여기서 오늘날 기독교,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엄청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적인 문제인 신앙이나 사회생활, 성경에의 호기심 등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온전한 대전제로서의 성경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성경에 대한 일종의 불신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녹아들었기 때문에 인정하지도 않는다는데 있다.
논쟁을 시작한 이에 대해서 안타깝지만 <침묵>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갈등과 고통을 겪었던 모든 고민의 기준은 <성경>이었다. 성경을 기준으로 하는 고민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때로는 지적하는데 있어 성경이 아닌 다른 텍스트는 그 권위를 비교할 수가 없다.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심지어 영미 문학사에 빛나는 족적을 남긴 존 번연의 <천로역정>조차 성경을 근거로 할 때 무수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천로역정>의 장면들은 당시 유럽신화에 기초한 환상주의도 담겨있다.
1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이로 유명한 '조지 뮬러' 목사에 대한 이야기도 여기에 포함된다. 철저하게 성경적인 표현으로 조지 뮬러 목사를 일컫는다면 그는 단지 '제대로 기도한 사람'이다. 기도 응답을 받은 것과 제대로 기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응답이라는 대가주의와 기복신앙에 빠진 현대의 기독교가 '응답'이라는 물질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조지 뮬러 목사는 저서를 통해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것이 쉽지 않은 동시에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소명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지 뮬러 목사는 또한 '성경'을 제외한 모든 텍스트, 신앙의 선배들의 저서, 서적들을 읽기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책들이 성경을 읽는 시간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의 절대성, 완선정을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날 기독교는 그렇지 않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
존 맥아더 목사는 CNN에 유대교, 이슬람, 가톨릭 사제들과 함께 나온 프로에서 이렇게 밝혔다.
"저는 성경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이 과학성과 역사성, 예언성을 모두 충족시키고, 성경을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논쟁을 하는데, 토의를 하는데 성경의 권위와 성경의 텍스트를 다른 글에 빗대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주장하는 진리인 것이다. 어떤 비유를 한다해도 거기엔 틈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그 틈을 성경은 인정하거나 감싸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은 이 두루마리(성경)에서 더하거나 빼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서 제하여 버린다고 말한다.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독교에 대한 논쟁에서 성경을 대해야 하는 자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근거와 설명과 판단의 기준이 성경에 있는 것이다. 다른 더하고 뺀 책들, 이야기들은 권위와 진리에 대하여 어떤 면으로도 불완전하다.
내게 '신의 침묵'에 대해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관찰팀이나 제인 구달 여사의 태도로 설명하려한 그의 관점은 성경의 권위를 한참이나 끌어내린 것이다. 사람의 계산된 관찰의 행위는 절대 신의 침묵과 동등해질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어떤 면에선 신의 초월성을 깎아 내리는 동시에 관찰이라는 인간의 가치를 추가한 것이다.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지만, 성경의 절대성에 대한 배반은 한국 기독교가 자주 저지르는 실수다. 부드럽게 말해 배반이지 사실은 배교와 다를 바가 없다.
한국 기독교가 최근에 가장 밝게 조명하고 있는 인물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심지어 여의도 순복음 교회 담임 목사인 이영훈 목사가 회장으로 있는 한기총은 건국 공로 상을 이승만에게 수여했다. 또한 전광훈 목사는 이승만 기념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한기총으로 대변되는 한국 교회의 머리들이 이승만을 기념하고 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거론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값이 그보다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선교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이승만이라는 이름이 더 값어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떻게 생각해도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의 불신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인간의 우상화 사업에 있어서는 이승만 같은 인물 뿐만 아니라 '손양원, 주기철'같은 분의 기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교회사를 다룰 때 결코 잊히지 않을 이름이지만 손양원, 주기철 두 분의 이름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경이 고백하는 유일성 앞에서는 비교될 수 없다. 빛도 이름도 없이 온전한 신앙의 길을 간 분들도 이러할진대 이승만이라니. 권력주의에 빠진 한국 기독교, 개신교의 현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경위에 세워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나 성경이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책으로 궁색한 변명을 하는 것은 절대성을 부정하는 배교일 뿐이다. 스스로 '이단異端'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집단을 만들고 행사를 하고 돈 쓸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기독교 출판사들은 책을 팔려고 날뛰니 일반 성도들과 신자들이 제자리 찾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엘 오스틴 목사의 저서 <긍정의 힘>같은 성경의 탈을 쓴 독서毒書가 100만권이나 팔린 것이다. 고난을 기뻐하라는 신약의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긍정의 힘> <잘 되는 나>. 안타깝지만 성경은 잘 되는 것과 부유해지는 것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욥의 시험이 유복한 재산을 뺏기는 것이고, 다윗이 무너지는 것이 왕이 된 이후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부자 청년에게 가난한 이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라고 할 때 청년의 표정이 어두워 진 것을 말해야 하는게 성경의 대전제이다.
그럼 그렇게 어렵게 살라고 지도하는 성경대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고민해본다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노력의 힘을 은혜로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회개를 말하고 있고 시편을 남겨놓고 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기에 실패자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논쟁이 있다. 바로 동성애다.
매튜 바인스라는 젊은 목회자가 동성애는 죄가 아니며 동성애를 지지하는 책을 썼고, 21세기의 C.S 루이스라는 팀 켈러 목사는 이에 반박하는 주장을 게재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이를 성경이라는 대전제를 두고 볼 때, 동성애자는 죄인이다.
그리고 동성애자를 죄인이라고 지적하는 이성애자도 죄인이다.
기독교 이성애자들도 죄인이다.
성경은 동성애자들만 죄인이라고 밝히지 않는다.
동성애가 기록된 성경의 같은 줄에 도둑질, 음행, 간음, 우상숭배, 술취함, 모욕, 사기가 같이 적혀있다.
남색이 천국을 유업으로 못받는 죄라고 강조하고 항변하면서
똑같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죄인 도둑질, 음행, 술취함, 모욕, 거짓말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게 성경을 통해 본 진실이다. 동성애가 큰 죄인 것은 천국에 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고지순한 권위로서의 성경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두루 아우르는 일반 적인 죄들 또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굉장히 큰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기에 얼마나 적절한지를 묻게 된다.
물론 죄나 문제에 대해서 심도있게 들여다 본다면 다른 결론이나 논쟁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죄에 대해 특별대우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나 성경의 방법은 아니다. 더군다나 굉장히 편법적이고 배교에 가까운 한국 기독교 집단이 할 말은 못 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인 존 파이퍼 목사는 동성애와 낙태에 대해 말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낙태 옹호를 강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동성애'에 대해 각자가 갖고 있고 포기하지도 끊지도 못하는 유혹 중의 하나로 말하고 있다. 존 파이퍼 목사의 입장에 대해 개개인들의 의견차는 분명하겠지만 존 파이퍼 목사는 집중 포화대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작가 로맹 가리는 자신의 저서 <자기 앞의 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아기는 삶을 결정할 수 없는 존재라 죽여도 되고, 노인은 결정할 수 있는 지식이 있어서 죽을 수 없다.
성경이 말하고 논하는 절대성 앞에서 선을 긋고 줄을 세우며 빵의 크기를 재는 것은 사람들의 오랜 실수였고 잘못이었다.
성경은 절대적인 기준이다.
특히나(절대적이라면서 이런 표현을 쓰는건 어색하지만) 기독교 논쟁, 신앙, 성경에 대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다른 어떤 기준도 이에서 벗어나거나 다른 텍스트를 이 권위를 위해서라도 보충하기 위해 쓸 수 없다.
혹여나 개인의 신앙의 온도나 기분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없는 일이다. 대전제로서의 성경의 절대성이 흔들리거나 깨진다면 그것은 더이상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의 신앙이 가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성경은 유일한 푯대가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기서 성경의 대전제로서의 절대성을 말하는 것은 기독교 논쟁에 관한 것이다. 요즘 특히 사회적으로 불거진 동성애를 포함해 개인이 궁금해하거나 질문하는 신앙의 문제까지 말이다.
미국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하나님을 믿지만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들을 한다. 하나님이 성경이고 성경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 하는데 선택적인 태도를 당당하게 말한다. 스스로의 논리에 엄청난 오류가 범해지는데도 당당하다.
오늘의 이것이 현대의 기독교다. 우리나라는 아니 그런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앞서 말한 이승만 우상화는 그 저급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우상을 이용해서 전도와 교세확장의 꿈을 꾼다. 성경과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무기가 있음에도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늘상 항변한다.
성경의 절대성은 그저 문자일 뿐이라고 말하는 우둔한 짓이다. 교회의 수장들이 이 절대성에의 불신이 이 정도인데 앞날이 밝을리가 없다. 서구 종교의 타락이 언제나 교회의 우두머리들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